북한산은 작은 산이 아니다. 남한산성처럼 안으로 버스가 다니는 것도 아니고 산세 또한 매우 험하여 성벽을 따라 전구간을 걷거나 하기도 매우 힘들다.
어차피 성문 중의 일부는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 바로 코앞에 있으니 산성 탐방이라기 보단 그냥 등산을 한다~ 생각함 될 것이다.
그래서 산성만의 탐방을 목적으로 한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안그럼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선수가 아닌 이상 무심코 여타 다른 산성이나 성곽을 생각하고 슬슬 걷겠다 생각하며 북한산성에 달려들면 식겁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하루에 북한산성의 성문을 다 탐방하기보단 이틀에 나누어 여유있게 탐방하는 것도 좋을 듯 싶다.
또한 다른 국립공원 주차장과 다르게 일 정액제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온종일 주차 했다간 주차요금의 압박을 심하게 느낄 수도 있으니 에지간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앞에 올렸던 북한산 백운대 구간과 겹치는 구간이 있어 참고하면 될 것이다.
http://jail6039.tistory.com/62
북한산성(北漢山城)은 북한산에 쌓은 산성으로 사적 제162호로 지정되었고,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1번지에 위치한다.
조선시대 숙종(1711년)때 고려시대의 중흥산성을 바탕으로 축성된 산성이다. 14개의 문, 3개의 장대와 함께 유사시 어가를 북한산성으로 옮길 행궁을 건립하였다. 둘레가 7,620보(步)이다.
수문부터 용암문까지 훈련도감에서, 용암문에서 대성문까지 금위영에서, 수문부터 대남문까지 어영청에서 각각 만들었다. 지형에 따라 성벽 없이 여장(女檣)만 쌓은 곳도 있는데, 그 길이는 1,457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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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장대(東將臺)는 북한산성 동쪽에 위치한 장대이며, 북한산성 3개의 장대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금위영의 장수가 주둔했다. 용암문에서 직선거리로 650m 떨어져 있으며, 해발고도는 586.0m이다. 1996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 복원하였다.
기단은 정방형의 이중구조를 갖춘 중층 건물이다. 외부기단은 가로·세로 5.5m의 장방형으로 장주형 초석 12개를 배치했고, 내부 기단은 가로·세로 2.8m의 정방형으로 기단을 만들고 원형 초석 4개를 배치했다.
남장대(南將臺)는 북한산성에 설치된 3개소의 장대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에는 어영청의 장수가 주둔했으며, 행궁을 비롯한 성내 시설물을 관리하기 위한 지휘·관측소로 쓰였다. 북한산 상원봉의 줄기인 나한봉(羅漢峯:현 715봉) 동북쪽에 위치한다. 현재는 기단석만 남아 있다.
북장대(北將臺)는 북한산성에 설치된 3개소의 장대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에는 훈련도감의 장수가 주둔했으며, 중성문 서북쪽에 위치한다. 현재는 공터로 흔적만 남아 있다.

북한산성은 북한산 국립공원에 속하기 때문에 관리가 잘 되고 있다.
백제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있을 때 개루왕이 한수 북변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한 뒤 한강 이북으로 도성을 옮기고 이후 비류왕 때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산성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진압되었고, 개로왕이 도림의 꼬임에 넘어가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위치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이후 신라가 진흥왕 때에 북한산성에서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고,북한산 순수비가 현 북한산성과 가까운 북한산 비봉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현 위치에 당시에도 산성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때에 들어서면 현종이 천추태후에 의해 승려가 되어 지금의 진관사인 신혈사에 유폐됐다는 기록과 왕건의 재궁(관)을 거란의 3차 침입때 향림사로 피신시켰다는 등 북한산에 관련된 기록은 있으나 북한산성에 대한 기록은 최영장군이 북한산에 있는 중흥산성에 주둔했다는 기록뿐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문종이 한양주변의 요충지와 도성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현 위치에 산성을 쌓자고 말했지만, 백성만 고생한다는 신료들의 만료로 무산되었으며, 이후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이덕형을 보내서 북한산을 정찰하게 하는데, 이덕형은 산세가 험하고 방어에 좋고, 고려 때 주둔한 흔적이 있으니 우리도 여기에 성을 쌓자고 보고한다. 하지만 이는 전후 재정빈곤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결국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도성과 바로 연결되는 배후 산성이 절실함을 느끼고 무려 40여 년간 논의한 끝에 숙종 37년(1711년)에 축성을 끝냈다. 긴 논의과정과는 달리 성벽을 쌓은 데에는 단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성을 쌓은 숙종, 영조, 사도세자, 정조가 왔다갔다고 하며 사도세자는 여기에 온 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고종 때는 엄귀비가 찾아와 지금의 무량사를 창건하고 원찰로 삼았다고 한다. 엄귀비는 무량사 자리에 산신각을 짓고 백일기도를 해 영친왕을 얻고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무량사에는 엄귀비가 모셨다는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가 남아있다.
그 외에도 각종문집에 북한산에서 놀고 갔다는 기록이 수두룩하며 이중에는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도 있다.
성의 시설로는 북문, 대동문, 대서문, 대성문, 중성문에는 초루가 설치되었고, 소동문, 소남문, 서암문, 백운봉암문, 용암봉암문, 동암문,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과 수문이 설치되었다. 성곽에는 성문이외에 시단봉 위에 동장대, 나한봉 동북에 남장대, 중성문 서북에 북장대 등 3개소의 장대와 함께 유사시 어가를 북한산성으로 옮길 행궁을 건립하였다. 또한 주둔부대인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유영지 3개소, 군량미를 보관하는 군창 3개소, 성곽의 관리와 방어를 분담한 승병들이 주둔할 승영사찰 등을 설치하였다.
이후 유사시 도성민들이 전부 들어가 항전할 때 필요식량을 대략 계산한 결과, 무려 10만 석의 곡식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이에 그 많은 곡식을 산성 내에 쌓기는 힘들다고 산 아래에 창고를 지금의 평창동에다 평창이란 이름으로 만들고 5만석을 여기에 비축하게 된다.
성벽은 평지와 산지 등 지형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여 쌓았는데, 고축(高築)· 반축(半築)·반반축(半半築)으로 축성하였으며, 성벽없이 여장(女檣)만 쌓은 곳도 있고 봉우리 부분은 성벽을 쌓지 않은 곳도 있다. 하지만 여장을 쌓을 시점에 이르러 겨울이 다가와 여장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진다. 여장을 깬돌로 쌓으면서 진흙으로 그 빈틈을 속채움하고 바깥에는 석회를 발랐다. 문제는 이러면 여장이 겨울이 지나면 수축과 팽창 덕분에 무너진다는 것... 덕분에 오늘날에 이르러 원 모습이 남아있는 여장은 없으며, 정조 때도 순조 때도 걸핏하면 관리소홀이다, 수리해야 한다, 이야기가 나와 결국 순조 때 행궁을 포함해서 대대적으로 개보수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문제가 있는데 서울시 복원구간의 여장은 한양도성의 여장을 베껴 만들어 성 내에서 성 바깥이 안보이는 등, 원형과 여장기능을 상실했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게다가 현황파악도 매우 어려운데 북한산의 지형이 다소 변화했기 때문이다. 일부 성벽잔존구간은 접근조차 힘든 절벽위에 있으며 분명 성벽 뒤편으로 나 있었을 순찰로가 침식되어 사라지고 성벽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덕분에 능선을 따라가는 등산로가 성벽 잔존구간 위로 지나가게 되어 훼손이 더 심해지고 있으며 비봉능선에서 북한산으로 이르는 문수봉 구간은 심지어 성 내로 진입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성벽이 파괴되어 있다. 또한 성벽을 지키는 병력이 주둔할 성랑지는 등산객들의 휴식 및 식사장소로 걸핏하면 이용되어 초석의 위치가 바뀌고 지표에 남은 와전류가 훼손되는 현실이다.
성곽시설 중 암문 중에 시체를 내보내기 위한 시구문이 있는 점, 성문의 여장이 평여장인 점, 포루를 설치하지 않는 점,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이중성으로 축성한 점 등은 동 시기 산성과 구별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북한산성은 축성 이후 한 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았고, 임금의 행차가 몇 번 있었으나 행궁에서 유숙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특징이 있다.
산성의 정문은 대성문이었으나 지형상 문제로 숙종은 대서문으로 행차했으며 영조는 대성문으로 내시 등에 업혀서 들어왔다. 거기에 영조는 나갈 때 당시 소남문이었던 지금의 대남문으로 나가버려 임금이 지나간 문을 암문으로 둘 순 없어 문을 크게 만들고 문루를 올려 지금의 대남문이 되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이미 반파되어 있던 북문 누각부재를 옮겨서 만들자는 의논이 실록에 남아있다.-출처 위키백과-

올라가는 길이 처음엔 이처럼 완만하고 걷기에도 좋다.

첫번째 만나게 되는 대서문.
대서문(大西門)은 북한산성에 있는 성문이다. 조선시대 단위로 높이 11척, 넓이 13척이며, 홍예문으로 만들었다.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그 중 대동문(현 대성문) 다음으로 규모가 큰 문이 대서문이다. 대서문은 의상봉과 수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성내부로 통하는 주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북한지’에 의하면 문은 홍예(虹蜺)로 만들어졌고, 초루가 설치되었다. 현재 성문의 육축부는 폭 19m, 높이 6m, 문지폭 7.9m이다. 타원형 홍예 출입구는 높이 4m, 폭 3.3m 이다. 홍예 양쪽에는 문루의 배수시설로 짐승의 얼굴을 형상화한 누혈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문의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비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육축은 3단의 기초석을 쌓아 평지를 조성한 후 8단을 석축하였으며, 그 위로 미석을 한줄로 놓고 여장을 설치하였다. 여장은 하나의 화강암을 깍아서 만들었으며, 그 가운데 20×30cm의 총안이 하나씩 뚫려있다. 육축부의 서쪽에는 성벽을 약간 밖으로 내어 쌓았다. 현재의 문루는 1950년대에 복원된 것이다.

누혈(배수시설)

배수시설 하나에도 예술적이다.




대서문의 안쪽.



중성문의 우아한 자태.
중성문(中城門)은 북한산성의 중성에 위치한 홍예문이다. 규모는 조선시대 단위로 높이가 11∼13척, 너비가 13∼14척이다.







중성문의 안쪽



부왕동암문.
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은 북한산성에 있는 암문으로, 규모는 조선시대 단위로 높이 9척, 너비 8척이다. 외부는 홍예 모양으로 만들었고, 내부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북한산성을 축성할 당시 남쪽은 대남문과 소남문, 암문을 하나씩 만들 계획이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소남문(현 대남문)과 암문 2개(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을 만들었다.
부왕동(扶王洞)은 증취봉 아래에서 발원하여 삼천사로 내려가는 계곡으로 예전에 이곳 삼천사에서 가까운 신혈사에서 임금(고려 현종)을 구한 적이 있다고 하여 왕을 도운 계곡이란 뜻으로 부왕동(扶王洞)이라 명명했다.


















청수동암문.
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은 북한산의 나월봉과 문수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다. 1711년 숙종 37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暗門) 중 하나로, 탕춘대성과 비봉에서 성 안쪽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다.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출입구이다.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청수동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門樓)는 마련하지 않았다. 성문 양쪽은 장대석으로 쌓아올리고, 그 위 천장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들었다. 이런 양식의 성문을 아치 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平据式)이라 부른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 있다.















산을따라 성벽이 이어진다.

대남문(大南門)은 북한산성의 성문으로, 초기의 이름은 소남문(小南門)이었다. 규모는 조선시대 단위로 높이 11척, 너비 11척이다. 현재의 문루는 복원된 것이다.







대성문(大成門)은 보국문과 대남문사이에 위치한 북한산성의 문으로, 초기의 이름은 대동문(大東門)이었다. 규모는 조선시대 단위로 높이 13척, 너비 14척이다. 문루는 1990년대에 와서야 우진각 지붕 형태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되었다.










나무사이와 정상부에 여장이 보인다.


가운데 길게 성곽의 윗부분인 여장이 이어져 있다.





보국문(輔國門)은 대동문과 대성문 사이에 있는 북한산성의 문으로, 초기의 이름은 동암문(東暗門)이었다. 규모는 조선시대 단위로 높이 6척 6촌, 너비 6척 5촌이다.




대동문(大東門)은 북한산성의 문으로, 초기의 이름은 소동문(小東門)이었다. 규모는 조선시대 단위로 높이 9척, 너비 10척이다. 현재의 문루는 1993년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된 것이다.







동장대(東將臺)는 북한산성 동쪽에 위치한 장대이며, 북한산성 3개의 장대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금위영의 장수가 주둔했다. 용암문에서 직선거리로 650m 떨어져 있으며, 해발고도는 586.0m이다. 1996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 복원하였다.







용암문(龍巖門)은 북한산성에 있는 암문으로, 원래 이름은 용암암문(龍巖暗門)이었다. 조선시대단위로 규모는 높이 6척 5푼, 너비 7척 5푼이다.






산영루. 산영루는 17세기 전에 건축되어 몇 번의 중수를 거쳤으며 현재의 것은 1915년 대홍수때 유실된 것을 2014년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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