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은 서울에서 매우 가까이에 있으며 자유로를 따라 일산이나 파주쪽으로 가다보면 늘 왼쪽 언저리에 보이곤 한다.
물론 행주산성 인근에는 많은 음식점들이 있고 이중의 몇몇 식당은 가성비가 아주 뛰어나기도 하다.
또한 어느 카페에 가면 커피한 잔 앞에 놓고 노을 구경하기 아주 좋은 곳이 있어 한번씩 들리는 곳이기도 하다.
아래에 다시 이야기를 하겠지만 행주산성은 아주 작다. 또한 남한산성이나 북한산성처럼 거나한 성문도 성벽도 없으며 단지 이곳이 토성임을 보여주는 흙무더기만이 몇군데 이어질 뿐이다.
어쩌면 남한산성이나 북한산성을 상상했다면 지극히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남한산성이 인조의 항복으로 굴욕의 장소가 되었다면 이 행주산성은 우리의 위대한 승리와 영광을 보여주는 상징이란 의미에서 아주 소중한 유적지임에는 분명하다.
행주산성(幸州山城)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덕양산에 있는 넓이 0.16km2 산성이다. 임진왜란때 권율장군의 대첩지로 1963년 1월21일 대한민국 사적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정확한 축성연대와 목적은 알 수 없으나, 성 안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과 토기 등 유물이 많이 나와 아마도 백제 때 처음 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행주산성은 고양시의 서남쪽 끝 한강 연안에 덕양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7~8부 능선에 축조된 토성으로 둘레는 1km이다. 1593년 권율 장군이 왜군을 물리친 행주대첩의 전적지이다.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산 정상부에 있으며, 1845년에 건립한 행주대첩 <중건비>가 행주서원 기공사 앞에 세워져 있다. 지금의 정상부 기념비는 1963년에 세운 것이다. 1970년에 행주산성 보수정화사업으로 대대적인 정비와 권율의 사당인 충장사(忠莊祠), 충의정, 덕양정, 진강정 등을 짓고 정문인 대첩문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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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에서 보이는 한강과 방화대교, 그리고 덕양정.

행주산성에 이르는 길, 산책하듯 오붓이 걷기 정말 좋다.

행주산성과 빼놓을 수 없는 권율장군 동상.
권율(權慄, 1537년 ~ 1599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영의정 권철의 막내 아들이자 이항복의 장인이다. 임진왜란의 조선군 장수로, 왜란 당시 조선군 총사령관인 도원수로서 왜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데 기여했으며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을 이끈 장군으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사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1537년 후일 영의정을 지내는 권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상당히 유복한 가정이었다. 그는 나이가 들어도 관직에 나아갈 생각은 않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했다. 가족들의 권고에 뒤늦게 그가 46살이 되던 1582년(선조 15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를 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이어 예조정랑, 호조정랑, 의주목사(義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그의 나이 56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한양이 함락되고 왕실이 북쪽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국내 사정이 시시각각으로 위태로워져서 전라도 순찰사 이광과 방어사 곽영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光州牧使)로서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병사들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라 패전하고 말았다.
그 뒤 권율은 남원에 주둔하여 1천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광주(光州)로 가서 군병을 모집하고 남원으로 이동했다는 설도 있다. 권율은 전라도 금산에서 전주로 진격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진산 인근 이치(배고개)에 진을 쳤다. 임시 도절제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이끄는 1천여 명의 조선군이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2천여명의 대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전투로 일본의 전라도 진격작전을 좌절시켰다. 이 승리로 왜군은 그 후 다시는 전라도를 넘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권율은 전라감사로 승진하였다.
권율은 때마침 명나라에서 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을 탈환할 목적으로 2,300명의 관군과 500명의 승병을 이끌고 한양으로 향했다. 한양으로 향해 북상하던 도중 수원 독산(禿山, 현 오산시)의 독왕산성(禿旺山城)에 주둔하였다. 독왕산성은 물이 귀한 곳이었으며 우키다 히데이에가 이끄는 왜군은 그 기미를 알고 한 달간 성을 포위했다. 이때 권율은 산성 위에 군마들을 세워놓고 병사들로 하여금 말에게 쌀을 쏟아붓고 씻기게 하였다. 성 아래서 볼 때는 마치 풍부한 물로 말들을 씻기는 것 같이 보였다. 이에 왜군은 의기소침하여 포위를 풀고 서울로 후퇴하였으며, 권율의 병사들은 이를 추격하여 왜군에 3천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게 만들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권율의 병법을 높이 치하하여 독왕산성 정상에 세마대(洗馬臺, 말을 씻긴 곳)를 짓게 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러한 기지로 왜군의 서진(西進)을 막은 권율은 1593년 음력 2월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에게 금천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의병장 김천일과 승병장 처영(處英)의 병력을 합쳐 3,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였다. 행주산성의 군민들은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 온 우키다 히데이에의 왜군을 맞아 바위, 화살, 불덩이, 끓는 물을 퍼부어 1만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적장 우키다 및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른팔이라 불리던 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에게 모두 부상을 입히고 격퇴하였다. 이때 성내의 아녀자들이 치마 위에 짧은 덧치마를 대어 적군들에게 던질 돌덩이를 운반한 것이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임진왜란 전부터 행주치마라는 단어가 존재했다는 점으로 볼 때 이는 맞지 않다. 또한 이때 조선군의 신무기인 화차와 비격진천뢰도 맹활약한 바 있다.
행주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권율은 이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탈영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어 어마(御馬)까지 하사받았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권율은 일본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와 함께 울산에서 대진했으나, 명나라 군대 사령관 양호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599년 그의 나이 63세 때 노환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가, 그 해 사망하였다. 선조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이틀간 정사(政事)를 폐하였다고 한다. 권율은 죽은 뒤 전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 이순신, 원균과 함께 임진왜란 중 전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내려진 최고의 영예인 선무공신 1등에 봉해졌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충장(忠莊)의 시호가 내려져 충장공(忠莊公)이 되었으며 충장사에 배향되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에 위치하고 있다.

행주산성의 정문.





권율장군의 영정을 모셔 놓은 충장사.





드디어 산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행주 산성은 흙으로 쌓은 토성이다.

언덕이 아니라 토성이다.

행주산성이 토성인 관계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 성위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목책등을 설치해서 방어 했다고 한다.





성의 윤곽이 뚜렷하다.








행주산성에서 보이는 자유로.


마곡대교와 멀리 가양대교가 보인다.

마곡대교위로 열차가 지난간다.

방화대교와 덕양정.

행주대첩비.
행주대첩(幸州大捷)은 임진왜란때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고, 진주대첩, 연안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 불리며,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권율은 임진왜란 초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이치전투와 독성산성 전투 등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웅거하며 명군과 합세해서 한양을 탈환하려다 조명연합군이 벽제관에서 대패하여 평양으로 돌아감으로써 고립 상태에 빠졌다.
한편 일본군은 총퇴각을 하던 중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을 대파하고 한양에 머물게 되었다.
권율은 1593년 음력 2월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에게 금천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였다. 이때 의병장 김천일과 승병장 처영의 병사들도 합세하여 총병력은 관군 3,000여명과 의병 6000여명 등 병력은 총 9,00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행주산성의 지형은 후방에 한강이 흐르고 있었으므로 배수진의 형태였다. 또한 행주산성은 말이 좋아 산성이었지 높이가 120m 밖에 안되는 낮은 언덕에 위치한 것에 불과하였고 지대 역시 험준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욱이 행주산성은 그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성벽도 매우 낮은 토성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조선군은 토성 위를 목책으로 둘러싼채 싸움에 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열악한 조건속에서도 조선군은 휘하 다이묘들을 이끌고 공격해 온 우키다 히데이에의 일본군을 맞아 비격진천뢰 및 신기전 같은 최신 무기들과 천자총통을 비롯한 각종 화포 그리고 바위, 화살, 불덩이, 끓는 물까지도 퍼부어 7차례에 걸친 적의 총공격을 모두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최소 5000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 및 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에게 모두 부상을 입혔다. 특히 우키타 히데이에는 중상을 입고 죽을 위기에 몰렸으나 부하 병사들이 우키타 히데이에를 업고 뛰어서 도망친 덕택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때 조선군의 신무기인 화차와 비격진천뢰도 맹활약한 바 있다. 권율은 이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탈영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어 어마(御馬)까지 하사받았다.
행주대첩시의 성내 아녀자들이 치마 위에 짧은 덧치마를 대어 적군들에게 던질 돌덩이를 운반한 것이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오류이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행주산성은 규모가 작은 토성일뿐만 아니라 산성이었기 때문에 산성안에 민간인이 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에도 행주치마라는 용어가 존재하였다.


행주대교와 멀리 김포대교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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