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은 속리산에 들어가는 관문과도 같다. 그래서 속리산에 가려면 늘 보은을 거쳐서 가곤 했다.
물론 어느날부터 속리산 입구에서 택도 아니게 비싼 법주사의 관람료가 부당하다고 느껴지면서 발길을 끊은지 오래이긴 하다.
그리고 지금은 당진 영덕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굳이 보은을 거치지 않아도 속리산을 갈 수 있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입장료의 부당함을 알고는 보은쪽이나 법주사를 통해 속리산에 가기보단
입장료가 없는 상주방향에서 속리산을 들어가는 것을 선호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번에 뭐 속리산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섰던 것은 아니고 남쪽으로 하염없이 내려가다가 너무 졸려 잠시 눈을 붙인다는게 보은 인근이어서 언젠가는 한번 가보겠다고 벼르고 있었던 삼년산성을
가게 된 것이다.
삼년산성을 처음보면서 느낀점은 그 성벽의 높이가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벽의 형태와 많이 다르기도 하고 그 높이가 과연 맞는 것이며 복원이 철저한 고증을 거쳐 제대로 이루어지긴 했나 하는 의심마저 들곤 했다.
그 성벽의 높이와 돌의 배열이 중국의 성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 한쪽으로 무너저 내린 성벽을 역사적 고증없이 복원할 바엔 그냥 그 모습 그대로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어쩔 수가 없다.
늘 그렇지만 이나라에 산재한 성을 바라 볼때면 그 성에서 삶과 죽음을 마주 했을 사람들의 절규가 들리는 듯 그렇게 오랜세월 삶과 죽음앞에서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한 모서리에 서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삼년산성은 그 위치가 높지 않아서 잠시 오르면 오를 수 있다는 것도 삼년산성의 또다른 특징이라면 특징일 것이며 그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보은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것도 삼년산성이 천혜의 요새로 오랜 세월 살아 남았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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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삼년산성(報恩 三年山城)은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에 있는 돌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 자비 마립간13년(470)에 축조되었고, 소지 마립간 8년(486)에 고쳐 세웠다. 1973년 5월 25일 사적 제235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사기는 성을 쌓는 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설명하지만,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오항산성, 신동국여지승람, 충청 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었다.

주차를 하고 산성 입구에 산성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담은 안내문을 볼 수 있다.


주차장에서 조금 움직이면 이렇게 산성이 눈에 들어온다.

단풍에 제대로 들었다.

산성을 오르는 길. 멀지 않다.

웅장하다는 느낌을 받지만 기존의 우리나라 산성과 그 형태와 모양이 다름에 성 입구에서 많이 당황스러웠다.

이 웅장한 성벽의 높이를 보라. 어디서 이런 성벽을 본적이 있는가!~

삼년산성은 신라가 삼국통일의 전초기지로 쓰려고 심혈을 기울여 축조한 요새였다. 병사 3천 명이 3년 동안 쌓아 470년 자비왕 때 완공됐는데, 성을 쌓는 데 화강암 약 1천만 개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5세기 한반도는 백제와 신라가 연합해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던 시대였고, 신라는 삼국 중 국력이 가장 약했다. 그래서 견고한 성이 필요했으므로 삼년산성을 축조한 것이다.

이곳이 삼년산성 서문의 입구이다.








성벽이 아니라 성벽의 두께이다.

암각자.






안전을 이유로 성벽위로는 걸을 수 없으며 성벽 아래 이렇게 길이 조성되어 있다.


진흥왕은 이곳에서 조련한 군대를 몰고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죽였다. 백제를 멸망시킨 김유신의 5만 군대도 삼년산성에서 훈련을 받았다. 무열왕은 신라와 당나라 간 동맹을 위한 국제회의를 이곳에서 열었는데, 당나라에게 무력시위를 하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고려 태조 왕건도 삼년산성을 빼앗으려다 크게 패했다. 그야말로 불굴의 천년 요새였다.
통일신라 헌덕왕때는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삼년산성에서 관군에 패해 진압됐다.


성의 둘레는 약 1.8 km이고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10 m 이상으로 대단히 높다. 조선시대의 산성이 산 정상을 두르는 형태로 대체로 낮은 편인 것과 비교했을 때 그야말로 요새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았다. 이처럼 성벽이 높고 크기 때문에 하중도 막대하므로, 성벽 모퉁이의 하중이 큰 부분에는 기초를 견고하게 하고자 4중 계단식으로 쌓았다.
성벽의 동쪽과 서쪽은 안쪽은 다진 흙으로, 바깥쪽은 돌로 쌓는 내탁외축(內托外築) 방법을, 남쪽과 북쪽은 모두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하는 내외협축(內外夾築) 방법을 이용했다.






성벽너머로 보은 읍내가 보인다.

보은 시가지와 앞에 19번 국도가 성벽 아래로 보인다.





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보은 들녘.




남문지.

이곳이 남문지이다.
문터는 4곳에 있으나 모두 그 형식이 다르다. 신라가 이 성을 정말로 철옹성으로 만들겠다고 작정하고 만든 티가 팍팍 난다. 정문으로 사용한 서문의 경우 성벽이 안쪽으로 휘었고 계곡부의 중앙에서 북쪽으로 약간 어긋난 지점의 경사면에 있어, 성 밖에서 문의 위치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음은 물론 남북으로 치성 2개가 배치되어 공격하는 적을 쉽게 반격할 수 있다. 북문은 문 밖에 이중으로 성벽을 쌓아 벽을 돌아 올라서야 문으로 다가갈 수 있게 설계되었고, 동문은 들어오는 길을 'ㄹ'자로 만들어 들어오기 힘들게 만들었다. 남문은 치성을 설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문을 바닥에서 띄워놓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만 접근할 수 있게 만들었다.











위에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서 보이는 동문방향. 이곳으로 내려간다.

남문쪽의 성벽이 무너져 내린 모습.













동문이 내려다 보인다.








성벽의 두께도 두께지만 꼭 고구려 장군총을 보는 듯 하다.

이 성벽 높이의 압박이 무지 느껴진다. 이런 높이의 성벽은 우리나라에서 삼년산성 말고는 없을 것이다.



동문 밖에서 동문으로 들어서는 계단.





북문쪽으로 이동하면서 내려다 보이는 동문지.



북문쪽 전망대.

북문 전망대.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북문지. 중간에 성벽이 보인다.

전망대에서 보이는 북문.








북문 전망대가 보이고 아래 무너져 내린 성벽의 일부가 보인다.

성 밖에서 보이는 북문.


북문에서 서문으로 가는 길이 좀 가파르긴하나 곧 끝난다.


북문 전망대가 위에 보인다.




성을 오르는 사람들이 작게 보인다.


처음 올라왔던 서문지.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가 있고 주위 암벽에는 글이 새겨 있다. 옥필(玉筆)·유사암(有似巖)·아미지 등 글씨가 오목새김되었는데, 김생(金生)의 필체라고 전한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이라고 평가받는다.


삼년산성의 진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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