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온달산성과 적성산성에 관하여 올린 바 있는데 자료를 보강하여 다시 올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의 자료들은 다음 위키백과와 민속자료사전을 참고하였다.
온달산성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 소재한, 남한강을 내려다보는 전망 좋은 산성으로,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산 정상 부근을 테처럼 둘러싼 산성)이다.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이 신라가 쳐들어오자 이 성을 쌓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는 이야기와 관련되어 이름 불렸다. 하지만 발굴조사 결과, 신라 석축산성의 축성 방법이 확인되었고 신라 토기 등도 출토되어, 신라에 의해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산성은 해발 427m의 성산(城山) 정상부에 반월형(半月形)으로 축조된 테뫼식 협축(夾築) 산성이다. 성벽은 남고북저의 지형을 따라 쌓았는데, 남쪽 봉우리 정상부와 북쪽 벽의 안쪽에는 평탄한 땅이 자리하고 있다. 서북쪽은 남한강에 접한 가파른 절벽이며, 동쪽과 남쪽 성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쌓아 올렸다.
산성의 북동쪽 아래에는 온달동굴(천연기념물 제261호)이 있고, 강 건너 주변 지역에도 휴석동 윷판바위, 장발리 선돌 등 온달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또한 영월 태화산성(太華山城)은 온달산성에서 패한 온달을 위하여 누이동생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를 통해서 이 산성은 물론 주변 지역이 신라와 고구려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대치하였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래를 클릭하면 함께 여행할 수 있답니다.
여기 갈래?- 커피,카페, 맛과 아름다운 여행지를 함께..... | 밴드
우리는 커피, 카페, 맛집과 감성이 있는 아름다운 여행지를 찾아 여행하며 일상과 추억을 공유하는 친목 여행밴드 입니다. 가성비 최고의 여행을 추구하며 어떻게 해야 제대로 여행할 수 있는지
band.us







온달산성이 자리하고 있는 영춘면의 구 명칭은 을아단(乙阿但)으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된 전설에서 온달이 을아조(乙阿朝)를 지키기 위해서 성을 쌓았다라는 내용과 부합하고 있다. 또 한편 온달산성이 구 아단성이었다라는 견해를 지지하는 측에서는 온달이 적시하였던 공격목표는 죽령의 이서 지역이기 때문에 충청도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충청도 일대 중원지역의 향방을 보더라도 온달이 분개했던 시점은 6세기 후반으로 신라가 점차 중원지역으로 치고 올라오던 시점이다. 특히나 단양 적성비에도 나와있듯이 550년 경에는 공히 중원지역 인근으로의 진출 야욕을 보이고 있었으며, 실제 신라에 의해서 축성되는 신라 산성이 5~6세기대에 충북, 경북 북부, 강원도 남부지방에 걸쳐서 형성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아차산성은 백제의 책계왕대에 축조된 기사가 있긴 하다. 하지만 아차산성은 현재까지의 조사내용으로 볼 때 신라산성이며 그나마 최근에 고구려 와당이 출토된 바 있기 때문에 백제와의 관련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물론 아차산성을 포함한 일대에서 백제토기가 지표상에서나마 채집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차산성에 대한 추가적인 발굴조사 성과가 있어야겠지만 현시점에서는 지금의 아차산성을 책계왕 당시에 축조하였던 아차성(阿旦城)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온달산성의 축성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둘레 1,523척, 높이 11척의 석축성으로 우물이 1개소 있다”고 하였고,『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온달이 을아조(乙阿朝)를 지키기 위해 축조하였다”는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을아조’는 단양군 영춘(永春)의 옛 지명인 ‘을아단(乙阿旦)’으로,『삼국사기』에서 “온달이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유시(流矢)에 맞아 사망하였다”고 한 내용과도 관련된다. 하지만 아단성을 서울특별시 아차산성(阿且山城)으로 보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온달산성은 성벽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고대 성곽의 축성법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성벽의 축조 방법이나 보강 축조 모습, 유물의 출토 현황 등으로 보아, 처음에는 고구려에 의해 축조되었지만, 6세기 중엽경 신라에 의해 다시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6세기 중엽경 신라와 고구려의 각축과 함께 신라가 남한강 유역 이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지방지배를 추구하였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산성으로 평가된다.

온달산성의 북벽. 세장방형의 석재로 촘촘하게 쌓아올렸으며, 성벽의 구축 방식 자체는 삼년산성과 유사하다.

온달산성은 누가봐도 전형적인 신라 산성이라는 점이다. 성벽의 형태는 물론 구조적으로도 단양 적성비와 함께 만들어진 단양적성, 보은 삼년산성과 거의 같은 구조와 같은 입지이다.
또 수구문지를 비롯하여 체성부의 외견상의 구조 등 모든 것이 신라의 성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특히 성 내부에서 바깥으로 배수하기 위한 시설 및 수구문지의 구조를 볼 때 전형적인 신라스타일인데, 이것이 단순 개축으로 만들기에는 성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성은 기존에 고구려 성이 있던 게 허물어져서 새로 쌓았을 수도 있는 것이고, 목책성 정도로 있던 것을 신라가 개축하였을 가능성도 당연히 배제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명백한 신라산성이라는 점은 아차산성에 비해서 온달의 사망지로는 다소 설득력을 잃게 하는 부분이다.
더군다나 온달이 590년에 사망한걸로 친다면, 신라의 군사적인 진출 과정 상에서 볼 때 이미 6세기 후반, 7세기경에는 고구려와 한탄강 등지에서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호로구로, 무등리 1, 2보루 등이 대표적이며, 신라의 경우에는 한탄강 남쪽의 칠중성, 육계토성등의 고구려와 신라의 성곽들의 대치 양태가 확인되고 있다. 물론 온달이 경기도 북부의 전선을 돌아서 강원도 방면을 통하여 충청도로 갔을 경우의 수도 있겠으나, 6세기 후반을 넘은 시점에는 충청도는 물론 경기 남부 일대에 신라 산성이 주요 거점마다 형성되어 있는 상태였다.


온달산성에서 내려다본 영춘면 일대. 남한강 상류의 조망이 용이하며, 하안을 따라서 영월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거점이다.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0)의 사위인 온달장군의 이야기가 이 지방에 전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성이 언제 쌓아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전기에 이미 성산성이란 이름으로 있었던 기록이 있다.
벽의 안팎을 모두 비슷한 크기의 돌로 가지런히 쌓아 올린, 둘레 683m의 소규모 산성이다. 성 안에는 삼국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며, 우물터가 남아있고, 성벽 바깥 부분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배수구가 있다. 남서쪽 문 터의 형식과 동문의 돌출부는 우리나라 고대 성곽에서 드물게 보이는 양식으로 주목할 만하다.
성의 북동쪽 남한강의 강변 절벽 아래에는 온달굴이라는 석회암 동굴이 있고, 성을 바라보는 북쪽 강 건너의 산에도 온달과 관계되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성벽의 보존 상태가 좋아, 축성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온달 장군이 신라가 침입해 오자 이 성을 쌓고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고 한다. 둘레는 683m, 동쪽 높이는 6m, 남 북 높이는 7 ~ 8m, 서쪽 높이는 10m, 두께는 3 ~ 4m이다. 성 안에 우물터가 있고, 산 아래 남한강변을 따라 절벽이 있는데, 이곳에 석회암 동굴이 있다.



남문터는 남동향으로 경사진 지형에 자리하였는데, 규모는 길이 6m, 너비 3.9m로 북문터와 같다. 동문터는 너비가 7.3m으로, 현문식(懸門式) 구조로 설치되었으나 뒤에 암문(暗門)으로 사용되고서 메워진 것으로 밝혀졌다. 배수구는 입수구, 배수로, 출수구를 연결시켜 만들었는데, 입·출수구 모두 사다리꼴 형태이며, 출수구가 입수구에 비해 약간 크다. 배수로의 바닥에는 널돌을 놓았고, 돌틈 사이를 점토로 메워 성벽 속으로 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치성은 북문터와 남문터 부근에 있는데, 아래부분은 길이 5.2m, 너비 5.3m, 높이 8m이며, 단면 삼각형으로 바닥을 보강하여 쌓았다. 문 터 옆의 성벽에는 출수구가 있는데, 이를 중심으로 한 좌우 성벽과 북쪽벽 구간에는 아랫부분에 보축이 이루어졌으며, 보축된 벽면 안에는 깬돌과 점토를 혼합하여 채워 넣었다. 남치성과 북치성은 같은 모습 같은 규모이다.

산성에는 동·남·북의 문터와 남·북 치성(雉城), 우물터, 수구 등의 시설이 남아 있고 3곳의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그 외에 신라시대~고려시대의 토기 조각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성벽은 대부분 비슷한 크기로 다듬은 네모난 석회암 널돌을 면과 모를 맞추어 수직에 가깝게 쌓은 모습이다.
바깥쪽 경사면 아래부터 일정한 높이까지 체성을 축조하고서물이 나가는 수구(水口)를 안쪽 바닥돌 아래까지 경사지게 만든 다음 위쪽에 체성의 안팎을 협축의 방식으로 쌓아 올렸으며, 성벽의 안은 돌로만 채웠다.
동쪽과 남쪽 성벽은 높이 6∼8.5m, 너비 3.6∼4m 정도가 남아 있고, 북문터와 회절부의 성벽은 계곡에 쌓은 것이어서 너비가 다른 구간에 비해 넓은 편이다.

문터 입수구 양쪽에서 확인된 유물 포함층의 맨 밑바닥층에서 6세기 중엽 경에 제작된 신라 기와나 토기 조각이 출토되었고, 그 위로는 경질 토기와 큰 항아리 조각 등 9세기 이후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이로써 보아 이 산성은 6세기 중엽 경에 축조되어 9세기경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 안에서도 같은 시기의 기와나 토기 조각이 다량 수습되어,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이 많은 건물들을 건립하고서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안에는 잔디밭이 깔려 있어 걸어 다니기 좋게 되어 있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경사가 심하지만 그래도 걸을만 하다.


온달이 되찾고자 한 땅, <삼국사기>의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鷄立峴竹嶺已西)'은 오늘날 충주와 단양 일대, 남한강 중류 유역을 가리킨다. 이것만 보면 온달산성이 단양에 있으니, 전투 중에 온달이 사망한 곳이 온달산성이 맞을 것도 같다.
하지만 이곳만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이곳을 포함한 한강 유역 전체를 되찾고자 하는 표현(계립현과 죽령 서쪽이 최종적인 목적지, 즉 소백산맥 이북 지역 전체의 회복)이라면 서울의 아차산성이 맞을 가능성이 크다. 먼저 한강 하류 유역을 장악하고 한강을 따라 올라와 충주와 단양 일대를 공략하는 것이 일반적 수순이기 때문이다. 이는 진흥왕 때의 신라가 한강 하류 유역을 차지하는 역순서의 루트이기도 하다.




충청도 일대는 고대에 이른바 "중원"으로 불리던 곳으로 삼국시대 5~6세기 삼국의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던 시점의 주무대였다. 그러한 바 중원지역에는 삼국시대의 성곽의 축조 밀집도가 굉장히 높은 편인데, 온달산성 또한 그러한 여러 사례 중 하나이다.

산성 자체는 둘레 683m의 크지 않은 성이다. 경사진 산줄기에 쌓아 전체적으로 경사가 급하다는 느낌을 준다. 본래 존재하던 일부의 성벽과 최근에 복원해 놓은 성벽이 하나로 연결되어 마치 반달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



기와는 선조무늬〔線條文〕, 문살무늬〔格子文〕, 복합무늬〔複合文〕, 민무늬〔無文〕 등의 여러 무늬가 다양하게 확인되었는데, 대부분 굵은 선조무늬가 찍힌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외에 비교적 이른 시기로 편년될 수 있는 가는 문살무늬〔細格子文〕가 새겨진 황갈색의 암키와 조각도 확인되었다. 토기는 신라 경질토기류, 목에 돌대가 돌려진 경질 큰 항아리 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城(성)을 찾아 떠난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읍성의 무한매력 무장읍성 (3) | 2020.06.15 |
---|---|
단양의 숨겨진 보물 단양 적성산성과 신라적성비 (1) | 2019.06.12 |
청주 정북동 토성 (3) | 2019.06.01 |
천년의 요새 보은 삼년산성 (1) | 2018.11.05 |
영광과 승리를 간직한 행주산성 (4) | 2018.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