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성이 좋은 이유는 힘들게 산을 오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성은 대게 산성에 편중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방어체계가 오랫동안 산성 중심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읍성은 도심에 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가지 이유로 헐리거나 개발에 밀리어 지금은 그 자취조차 찾아 보기 힘든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읍성을 만나면 일단은 반갑다. 그리고 읍성은 비록 원형을 갖춘 성곽이 드물기는 하지만 지금도 여러곳에서 복원되고 있다니 매우 반가운 일이다.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高敞 茂長縣 官衙와 邑城)는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이다. 1991년 2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46호로 지정되었다. 무장읍성(茂長邑城)은 남문인 진무루에서 무장초등학교 뒷산을 거쳐,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의 좌편까지 뻗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400m, 넓이는 43.847평이다. 성내에는 객사·동헌·진무루 등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고 건물 주변에는 여러 가지 유구들이 산재해 있다. 그동안 흙으로 축조된 토성으로 알려져 왔던 이 성이 공사 때에 성벽 동쪽 끝부분의 단면이 드러났었는데 성곽일부가 흙과 돌을 섞어서 축조된 것임이 밝혀졌다. 1915년에 발견된 '무장읍지'에 의하면 조선 태종 17년(1417)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만여 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만 4개월 동안에 축조했다고 전한다. 높고 험한 산기슭을 따라 이어지는 산성이나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듯 하늘 높이 시야를 가리는 궁성들은 사람의 접근을 막는 ‘단절’에 목적을 둔다. 하지만 나지막한 평지로 아담한 담을 둘러가는 읍성을 바라본다면 날카롭고 매서운 군사적 용도의 시설물이라기보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을 가지게 하는 울타리라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나라의 읍성 중 제작연대가 정확하게 알려진 유일한 읍성인 무장읍성은 조선 태조 때에 빈번하게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1.4㎞의 둘레를 가진 읍성은 진무루 주변의 석축 성곽을 제외하면 대부분 흙으로 다져진 토성이다. 아직도 조선시대 당시의 객사, 동헌 등의 시설물이 무장초등학교 주변에 남아 있다. 건축 당시에는 2만여 명의 인력이 동원되어 여장과 옹성, 성 밖으로 해자까지 두른 견고한 모습이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고부 봉기로 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해산한 후 보복하듯 관군들의 횡포가 이어지자 정읍, 부안, 고창일대의 농민군과 동학세력이 모여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거사를 시작한 역사의 장소이기도 하다.
후에 다시 찾은 무장읍성을 보시려면
https://jail6039.tistory.com/entry/다시찾은-무장읍성
다시찾은 무장읍성
전에 무장 읍성에 대한 내용은 포스팅한 적이 있고, 고창읍성과 더불어 여행할 때 꼭 들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무장읍성의 매력에 빠지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호젓하고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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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4년에 건립된 무장현 객사. 뒤에 다시 설명이 되어 질 것이다.



성벽 위의 배수로가 눈에 들어온다.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



앞에서 이야기한 옹성의 안쪽이다.

무장읍성의 남문인 진무루. 진무루는 조선 태종 17년(1417)에 세워졌다.



진무루의 안쪽이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던 무장객사. 선조 14년에 건립된 무장현의 객사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객사 건물은 주관(主館)과 좌우 익헌으로 구성되는데,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지어져 위엄을 지니면서도 은은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주관은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현감과 대소 관헌이 모여 한양의 대궐을 향해 배례하던 곳이다. 좌우 익헌은 왕명을 받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들의 숙소로 쓰였다. 무장객사의 주관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인데 계단 난간석에는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고, 계단 양옆의 축대 돌에는 연꽃과 화병에 담긴 꽃이 새겨져 있다. 객사 왼편 나무숲이 우거진 옆에 무장을 거쳐 간 수령, 방백들의 영세불망비들이 수십여 개 세워져 있다. 운동장으로 들어서면 멀리서 손짓하듯 서 있는 건물이 보이는데 그것이 무장동헌이다. 1914년 무장과 흥덕현이 고창에 통폐합되기 전까지 무장현감의 집무실로 쓰였던 무장동헌은 조선 명종 20년에 세워졌는데, 정면 6칸에 측면 4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출처 동학농민의 발상지 무장읍성 (신정일의 새로쓰는 택리지 2)-

성안에 남아 있는 각정 공덕비와 비석인데 앞에 철로 제작되어 세워진 비석이 지금까지 보지 못한 특이한 점이다.

앞에서 설명이 되었으나 빠진것 같아서~ 객사는 송사관(松沙館)이라 하여 옛 무송·장사의 끝자를 따서 이름지었다.

성안에 있는 동헌. 객사를 지나면 바로 보인다.

성의 역사를 지켜 봐왔을 성안의 보호수~

객사의 뒷모습이다.





성내의 동헌건물.













옹성 위에서 본 진무루.


누각의 명칭에서 읍(揖)은 고전용어로 인사하는 예(禮)의 한 가지. 두 손을 맞잡아 얼굴 앞으로 들어올리고 허리를 앞으로 공손히 구부렸다가 몸을 펴면서 손을 내리는 행위, 즉 배(拜)보다는 가벼운 예법의 하나이며 취(翠)는 금조(禽鳥)의 하나였던 물총새. 자주호반새와 물총새를 아울러 일컫는 말로 선비들이 좋아하는 단어였다. 다시말하면 읍취루(揖翠樓)는 예(禮)를 갖추며 금조(禽鳥)를 만나는 곳, 즉 업무를 보았다는 것보다 아전들과 외부인들을 맞이하여 잠시 환담하며 회합을 갖는 등 공간이었다. 규모는 정면 4칸에 측면 2칸의 누각이다. 여지승람에는 읍취루(揖翠樓)를 신루(新樓)라고 했으며 현감 최검(崔儉 1493~1497)이 부임했으나 누각이 협소하고 쇄락하여 조선 성종 24년 증축해 짓고 '읍취(揖翠)'라 이름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무장읍지에는 "在客館南取察民憂喜之意名之○金廈梴有記新樓在客館東後改爲挹翠樓"라고 전하고 있다. -출처 한국매일 남도의 정자기행 김은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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