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는 나의 고향이며 대학 진학을 위해 청주를 떠나기까지 대략19년을 살았나보다.
아니 중간에 군대생활을 위해 3년을 더 청주서 살았고 지금도 부모님이 청주에 계시는 관계로 1년에 서너번은 더 청주에 내려가는 듯 하다.
그러면서도 청주의 상당산성을 가본 것은 몇번 되지 않는다. 산성 아래에 있는 약수터까지는 학창시절 소풍도 몇번씩 가보곤 했지만 정작 산성을 기어오른다는 것은 그때는 정말 큰마음을 먹어야만 가능하다고 여겼다.
지금은 터널을 통과하는 도로가 생겨서 청주시내에서의 접근성도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접근성이 좋지 않았던 것이 어쩌면 청주의 산당산성이 지금은 모습을 잘 보존하고 과거의 개발 광풍 속에서도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옛모습 그대로를 간직하는데 성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청주 상당산성(淸州 上黨山城)은 삼국시대 백제가 쌓은 산성이다. 1970년 10월 1일 대한민국 사적 제212호로 지정되었다. 상당산성은 둘레가 4.1km, 높이 3~4m, 면적이 704,609m2에 달하는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상당이라는 명칭은 백제 때 청주의 지명인 상당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남문 밖에서 발견된 옛 기와의 명문을 통해 통일신라의 서원경과 관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영호남과 서울로 통하는 통로를 방어하는 요충지로 크게 주목받았다. 특히 임진왜란을 거쳐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군사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충청도의 군사 책임자인 병마절도사는 청주읍성에 있었으며, 그 배후인 성당산성에는 병마우후를 두어 방어하게 하였다. 상당산성에는 대략 3,500명의 병력과 승군이 배속되어 산성의 유지와 보수를 담당하였다.
지금의 모습은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년(1596년)에 수축된 이후 숙종 42년(1716년)부터 영조 23년(1747년)까지 대대적으로 개축되었다. 이때 성벽 축조는 물론 성내에 구룡사 및 남악사와 장대사의 3개 사찰과 암문이 마련되었으며, 관아건물과 장대·포루·창고 등이 완성되어 면모를 갖추었고 이후에도 계속 보수되었다.
상당산성은 동·서·남방 3개소에 성문을 두었는데, 남문은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을 만들고 그 위에 목조 문루(門樓)를 세웠다. 지금은 석축 부분만 남아 있고, 성문의 높이는 3.5m, 너비는 4.2m이다. 동문과 서문도 역시 문루가 있었으며 성문은 무사석으로 네모지게 축조하였는데 높이 2.7m, 너비 2.8m이다. 동문과 남문 부근에 1개소씩의 암문(暗門)이 있고 동남방에 수구(水口)가 있었으나 지금은 여기에 저수지가 만들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장대(東將臺)와 서장대(西將臺)의 터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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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산성은 누가 뭐라하든 그 성벽의 우아한 곡선미는 우리나라 최고라 할만하다.

청주에서 산성에 이르는 도로를 따라가면 성내로 진입할 수도 있지만 성 입구에 잘 마련된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성을 한바퀴 도는 것도 괜찮다. 거리도 시간도 걷기 딱 좋다.

어쩌면 성벽 하나 만큼은 징그럽게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유심히 보면 저 돌 하나 하나가 지닌 세월의 무게를 눈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성벽의 축성방식을 보면 시대마다 어떻게 다르게 발전되어 왔는지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사실 상당산성보다 한양도성의 성벽을 보면 확연히 느낄 수 있다. 한양도성은 다음에 올릴 계획이다.






성벽 바깥으로 성벽의 일부를 덧대어 내밀게 쌓은 것이 치성이다. 적군이 성벽에 바짝 붙으면 성벽 위에서 고개를 내밀고 공격하기가 어려우므로 성벽 가장자리 일부에 구멍을 내어 만들거나 비스듬히 볼 수 있게 치성을 만들어 옆에서 공격할 수 있어야만 했다. 치성의 치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제 몸을 숨기고 밖을 잘 엿보다는데서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치성은 전술상 평지 성문의 좌우 또는 성벽이 곧게 뻗은 부분에 설치하였다. 상당산성은 남쪽 성벽이 곧게 축조되었으므로 그 양쪽 능선 위에서 성벽이 돌아가는 위치가 되는 남문 동쪽과 서남암문 동측에 하나씩의 치성을 만들어 방어력을 높였다. 또 남쪽 방향의 계곡 방향 경사면에 치성을 쌓아 성벽이 비탈을 지나는 구조적 약점을 튼튼히 보강하고 동시에 남쪽 성벽의 방어력을 높였다. 성벽이 굴곡을 이룬 동쪽 북쪽 서쪽성벽에는 성벽이 계속해서 굴곡을 이루며 굽이 돌기 때문에 따로 치성을 두지 않았다.

위에서 본 서남 암문의 바깥 모습.


산성 위에서 본 청주시가 전경




성벽을 도는 사람이 휴대폰에서도 보이는지 모르겠다.













상당산성의 서문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상당산성의 곡선미는 역시 최고라 할 수 있다.




























이나라의 산성안 마을이 대부분 그렇지만 각종 음식점과 요즘엔 카페까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모 그렇게 성안의 사람들과 공존하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런 이유로 성이 훼손되거나 난개발로 흐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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