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나무들은 두터운 겨울의 외투를 벗어던지고 그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서서히 연두빛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그리고 지금 세상은 숨막히게 아름다운 생명의 환희속에 나무며, 꽃들은 저마다 절정의 단내를 내뿜으며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이미 광양의 매화는 절정의 고비를 넘어섰고, 이어 구례의 산수유가 그 몸값을 자랑할 즈음 때이르게 온동네의 벚꽃들이 개화를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남도엔 진달래가 산을 뒤덮을 것이다.
이 땅의 봄은 이렇게 꽃들을 쫒아 다니기에도 숨이 차다. 하지만 축제라는 이름으로 번잡함과 귀를 찢는 소음도 사실 마음에 들지 않아 애써 그 아름다움을 외면하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쌩뚱맞게 한적한 서해의 바다를 조망하며 과거의 묵객들이 그랬듯 먼 바다에 시선을 고정하는 연습이 지루하지 않다.
사실은 몇날 몇일을 벼르고 별러서 찾아갔다.
이렇게 일부로 한 장소를 찾아가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다녀오니 밀린 숙제를 한 듯 시원하긴 한데 늘 그렇듯 유적지나 옛성을 돌아보고 오는 발걸음이 그다지 가볍지 않음은 또 왜인지 모르겠다.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은 서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위해 돌로 높이 쌓아올린 석성(石城)이다. 조선 중종 4년(1509)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장생(李長生)이 축성,
충청수영(忠淸水營)의 외곽을 두른 1,650m의 장대한 성(城)으로 자라(鱉)모형의 지형을 이용 높은 곳에 치성(稚城) 또는 곡성을 두어 바다와 섬의 동정을 살폈고 해안방어의 요충지였다.
사방(四方)에 4대 성문(城門)과 소서문(少西門)을 두었고, 동헌을 비롯한 관아건물 영보정(永保亭), 관덕정(觀德亭), 대섭루(待燮樓), 능허각(凌虛閣), 고소대(姑蘇臺) 등이 있었으나 허물어졌고, 서문 망화문(望華門)과 건물로는 진휼청(賑恤廳), 장교청(將校廳), 공해관(控海館)이 보존되고 있다. 망화문은 화강석을 다듬어 아치(Arch)형으로 건립하여 발전된 석조예술을 볼 수 있으며, 오천항(鰲川港)은 백제때부터 중국과 교역하던 항구로서 회이포(回伊浦)라 불리었고, 고려시대에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많은 군선(軍船)을 두었으며, 세조 12년(1466년)수영(水營)을 설치, 충청수군의 최고사령부로 서해안을 방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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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 수영성 위에서 바라다본 오천항. 오른쪽에 영보정이 있고 앞쪽에 있는 건물이 충청 수영장교청이다.

충청 수영성.
충청수영성은 고종 33년(1896) 폐영(廢營)되었으며, 그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軍船) 142척에 수군 수(水軍數)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보호하고 왜구침탈을 방지했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선조 29년(1596 ),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1597) 7월 1일 일본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주차장에서 바로 연결이 된다.

보령 충청수영성(保寧 忠淸水營城)은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일대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곽이다.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9호 보령오천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8월 24일 대한민국의 사적제501호 충청수영성으로 승지정되었고, 2011년 7월 28일 보령 충청수영성으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되었다.


수영성 안쪽에서 본 오천항.



성 안쪽으로 들어오면 좌측에 진휼청과 위에 영보정이 보인다.

진휼청 바로 아래 오천항이 내려다 보인다.

충청 수영성 진휼청.
충청수영 진휼청(忠淸水營 賑恤廳)은 조선시대 충청수영성 안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진휼청으로 추정되는 이곳을 비롯해서 장교청과 삼문만이 남아있으며, 진휼청은 흉년에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 구제를 담당하던 곳이었다.
충청수영이 폐지된 이후 민가로 쓰이다가 1994년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보존하고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대청․온돌방․툇마루, 부엌 등이 있으며, 충청수영 고지도등에 나타난 건물 배치로 볼 때 진휼청으로 추정하고 있다.





진휼청에서 보이는 오천항

성벽을 따라 영보정이 보인다.

올라가면서 뒤로 보이는 진휼청. 아래쪽에 주차장이 있다.


수영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오천항.
오천은 예전부터 보령 북부권의 삶과 생활의 중심지였다. 보령 북부권의 모든 길들은 오천과 통한다는 말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실제로 주포,주교,청소 등 오천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만 세 갈래나 된다. 예전의 영화는 많이 퇴색되었지만, 오천항은 천수만 일대의 주요 어항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오천항은 만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까닭에 방파에 등 별도의 피항시설이 필요 없을만큼 자연적 조건이 좋은 곳이다. 따라서 방파제 없이 해안을 따라 길게 이어진 선착장에 어선들이 정박해 있다. 1일과 6일에 서는 오천장을 찾으면 각종 해산물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오천항에서 이루어지는 잠수기어업으로 채취한 키조개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특산물이고,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홍합역시 인기다.

천연적으로 외부파랑을 차폐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여 바다와 육지에서 잘 보이지 않는 항구로, 역사적으로는 백제때부터 화이포라 하여 항구로 이용되어 왔으며, 남북국시대에는 당나라와의 교역창구로 이용되었고,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는 서해를 침범하는 오랑캐를 무찌르기 위해 군선이 머물렀던 큰 군항이었다.

오천항은 충남의 고요한 바다 천수만 뒤에 숨은 수줍은 항구다. 천수만 바다가 흘러들어 호수와 같이 잔잔한 물결을 이루는 이곳은, 항구를 감싸고 있는 주변의 산봉우리들이 풍랑을 막아주어 천혜를 입었다. 방파제를 대신한 주변의 산봉우리가 오천항 바다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 또한 자아내니 그 또한 천혜를 입었다. 기실 오천항 일대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충청수영성의 영보정은 예부터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 영보정 앞 성벽에 서면 그림 같은 항구의 풍경에 발길이 머문다.

영보정.
영보정은 1504년(연산군 11) 수사 이량(李良)에 의해 창건돼 7차례 중·개수를 거쳤고 1878년(고종15) 화재로 소실된 이후 137년만에 다시 복원하는 것이며, 이익공(기둥머리에 두공과 창방에 교차되는 상하 두 개의 쇠서로 짜여진 공포)의 팔작지붕을 얹진 형식으로 정면 6칸, 측면 4칸에 면적은 175㎡ 규모로 복원되었다.
아직 2019년 4월1일까지 단청 공사중이다.



영보정 앞에서 보이는 보령 방조제
천수만의 푸른 바다가 “넘실” 들어와 항구를 채우는 곳 오천항의 풍경은 빙도와 어우러져 비경을 자아냈다. 적어도 보령방조제가 물길을 막아서기 전까지는 그랬다. 방조제 너머 빙도가 있는 곳은 홍성의 광천면을 적시고 오천항으로 흘러든 상지천, 광천천의 물길이 천수만과 만나는 곳으로 지금은 강 하구의 풍경으로 빙도 언저리는 변모했다. 방조제 덕에 오천항은 좀 더 다양한 항구의 풍광을 방문객에게 선사한다.



여기서 보면 아래 사진과 같은 그림이 보인다.


방조제에서 고성과 어우러진 항구의 풍광도 감상할 수 있고, 오천항의 푸른 바다를 입체적으로 즐길 수 있다. 배들이 즐비하게 정박해있는 선착장에서, 충청수영성 성벽에 올라서, 방조제를 걸으며 어느 곳 하나 아름다운 항구의 풍경이 다가오지 않는 곳 없다.





뒤쪽까지 수영성곽이 이어지고 멀리 충청수영 해양전망 관망대가 보인다.



오천항은 조선시대에 세조 12(1466)에는 충청도 수군사령부인 충청수영이 설치되어 왜구의 침탈로부터 방어하고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을 보호하던 수군기지였지만, 근대에는 서해안에 출몰하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수영성 안에 있는 비석군.


충청수영 내삼문.
충청수영 내삼문(忠淸水營 內三門)은 충청남도 보령시 충청수영의 북동쪽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3칸 중 가운데 한칸을 높여 솟을지붕형태의 건축물이다.


충청수영 내삼문에 쓰여있는 공해관.
수군절도사가 집무하던 공해관 입구에는 독립운동가 김가진이 친필로 쓴 '공해관(控海館)'이라는 글귀가 선명히 걸려 있다. 김가진은 1910년에 한일합방이 일어나자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조선귀족으로 지정되어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으나 거절했다.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틈타 의친왕을 중화민국의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와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아들 김의한은 김일성과 회담할 때 김구선생을 수행한 분이다.

충청수영 장교청
충청수영 장교청(忠淸水營 將校廳)은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는 건축물이다.충청 수영의 영사건물 중 가장 뚜렷한 형체로 유존되는 건물이다.
수영이 폐지된 후에도 오천군의 중심청사로 사용되었고, 근년에는 오천면 청사로도 사용되었었다.


조선시대 충청수영 안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1896년 폐영과 함께 대부분 없어지고 객사, 공해관의 삼문, 진휼청만 남아 있다. 이 건물은 오천초등학교 자리에서 옮겨진 충청수영 객사(客舍)이다. 수군절도사가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禮)를 올렸으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이 객사의 이름은 운주헌(雲籌軒)이다.
이 건물 앞에 있는 삼문(三門)은 수군절도사가 집무하던 공해관(拱海館)의 출입문 역할을 하던 문으로 원래 객사와는 별도 건물인데 지금은 한자리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오천수영관아(鰲川水營官衙)는 충청남도 보령시에 있는 조선시대 충청 수영청의 관청 건물이다. 충청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36호이다.
오천현 관아는 조선시대 충청수영청의 관청건물로 당시에는 객사 82칸, 상서헌 9칸, 내동헌 10칸, 외동헌 10칸, 아사 5칸, 관청고 10칸, 군사 7칸 등으로 이루어졌음이 여지도에 기록되어 있다. 현존 관아 건물로는 장교청, 진휼청, 공해관으로 3동이 있다.




충청수영 전망대. 시간이 없어 올라가보진 못했다. 이곳에서 보는 낙조가 또 사람 쥑인단다~






2019년 4월1일까진 안에 들어가 볼 수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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