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왕산엘 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하질 않아 그저 가볍게 우포늪이나
(http://jail6039.tistory.com/172)보고 가겠다는 것이 우포늪은 물론 창녕의 테마길까지 몇군데 둘러보게 되었다.
그중에 진흥왕 행차길은 처음 들어보는 길이기도 하고 어쩌면 그저 어거지로 붙여 놓은 이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무심히 하게 된다.
그러나 창녕에 있는 진흥왕 척경비의 역사적 가치를 생각해 보면 진흥왕 행차길이라는 이름이 어거지는 또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진흥왕 행차길은 원시시대부터 역사시대로 이어져오는 창녕 역사를 연결하는 테마길로서 제2의 경주라 불릴정도로 많은 역사문화유적지가 남아있어 창녕을 도심속에서 도보로서 체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길이기도 하다.
신라시대 여러 신료들과 함께 창녕에 행차하여 국가적 중대사를 논의했던 진흥왕의 활기찬 기운을 느낄 수 있는 탐방로라고 하는데 나는 그런 기운은 느끼지 못했지만 한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흔적은 느낄 수 있었다.
가야연맹체를 이루는 소국의 수가 10여개가 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중에서 비화가야의 터전이 바로 이곳 창녕이었다. 561년에는 진흥왕이 직접 비화가야의 옛 터전인 비사벌 - 창녕으로 행차하였다.
비화가야는 신라에 병합된 후 비사벌에는 본격적으로 불교문화가 꽃을 피웠을 것이다. 두 손으로 꼽기에도 모자랄 정도로 많은 유물과 유적이 창녕 읍내에 몰려 있어 이들을 모두 찾아보면서 걸으려면 한나절로는 어림도 없다. 창녕을 제2의 경주로 부르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창녕박물관⇒진흥왕척경비발견지(0.92km)⇒만옥정공원(척경비)(0.38km)⇒문화공원(팔각정)(4.2km)⇒창녕교동고분군(2.43km)⇒창녕박물관(0.07km) 으로 되어 있으나 창녕 송현이길과 겹치고 또 시간이 그닥 넉넉치 않아 중요 문화재와 창녕시장을 둘러보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3시간은 거뜬히 걸린다.
아래를 클릭하면 함께 여행할 수 있답니다.
여기 갈래? (여행가자) | 밴드
그동안 고생했잖아요? 이제 여행도 좀 다니며 살아요. 우리 함께 맛집 찾아서 먹고 마시고 즐겁게 여행해요~ 제대로 여행하는법 알려드려요~
band.us

창녕 진흥왕 척경비. 보기엔 그저 볼품없는 바위덩이 세워 놓은 것 같지만 이래뵈도 대한민국 국보 33호이다. 뒤에 보이는 산이 내가 그렇게 가고 싶었던 화왕산이다.

진흥왕 행차길의 시작점인 창녕 박물관이다. 주차는 길 건너 교동 고분군 옆에 주차장이 널널하게 따로 마련되어 있으며 물론 무료이다.
이 창녕 박물관과 교동 송현리 고분군은 요 뒤에 따로 다룰려 한다.

창녕 석빙고.
석빙고란 추운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여 더운 여름까지 보관하여 사용하였던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얼음 창고이다. 조선시대에 중수하였다고 보는 빙고(氷庫)이다. 이는 구조양식의 측면과 장빙(藏氷)의 풍속이 그 당시에 제도화되어 성행하였던 점을 미루어 보아서이다.
이 빙고는 봉토도 거의 완전하며, 외부의 모양은 마치 거대한 고분처럼 보이고 뒤에 흐르는 개천에 직각되게 남북으로 길게 구축되었다. 빙실(氷室)의 입구는 남쪽에 시설하였는데, 좌우에 장대석(長大石)을 옆으로 건너지르며 쌓아 올려서 천정을 구성하였으며 사이의 천정에는 외부로 통하는 환기공 (換氣孔)이 두 곳 설치되었다. 벽은 잡석(雜石)으로 쌓았으나 평평한 방벽(房壁)이 되게 표면(表面)을 치석(治石)하였다. 이러한 구조양식은 석빙고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경주나 안동의 석빙고와 동일한데 규모에 있어 이 석빙고가 약간 작을 뿐이다.

창녕 석빙고 안내문, 이 안내문 주변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으나 옆에 창녕 시장이 자리잡고 있어 주차하기가 쉽지는 않다, 특히 3일,8일은 창녕 장날인 관계로 주차가 만만치 않지만 아무렴 대도시에 비할까~
적당히 차 한 두어대 세울 곳은 널널하다.


창녕 석빙고, 옆에서 보면 무슨 왕릉같다.

창녕 석빙고, 뒤에 교동 고분에서 보겠지만 누가 말해주지 않은 딱 고분같다.
빙고 우측에 남아있는 비에 의하면 “崇禎紀元後再壬戌二月初一日女四月初十日畢”이라 새겨져 있으며 조선 영조 18년(1742)에 현감 신서(申曙)등이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건조 연대는 입구에 서 있는 비석의 기록을 통해 조선 영조 18년(1742년) 당시 이곳의 현감이었던 신후서(申侯曙)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조 시대에 중수하였다고 보는 빙고이다. 이는 구조양식의 측면과 장빙의 풍이 그 당시에 제도화되어 성행하였던 점을 미루어 보아서이다. 이 빙고는 봉토도 거의 완전하며, 외부의 모양은 마치 거대한 고분처럼 보이고 뒤에 흐르는 개천에 직각되게 남북으로 길게 구축되었다. 빙실의 입구는 남쪽에 시설하였는데, 좌우에 장대석을 옆으로 건너지르며 쌓아 올려서 천장을 구성하였으며 사이의 천장에는 외부로 통하는 환기공이 설치되었다.
벽은 잡석으로 쌓았으나 평평한 방벽이 되게 표면을 치석하였다. 이러한 구조 양식은 석빙고의 전형인 경주나 안동의 석빙고와 동일한데 규모에 있어 이 석빙고가 약간 작다.




창녕 만옥정 공원.
창녕공원이라고도 불리는 작은 공원이다. 면적 1만㎡의 작은 공원이지만 지정문화재와 봄철의 벚꽃 장관으로 유명하다. 약 250년 전에 만옥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봄마다 명창(名唱) 대회와 그네뛰기 대회가 열렸다고 전해진다. 화왕산으로 가는 등산로가 옆으로 나 있다.
공원 뒤쪽 언덕 위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비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제33호)가 있는데, 561년(진흥왕 22)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창녕읍 화왕산록(火旺山麓)에 있던 것을 1924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또한 공원에는 조선 후기의 관아건물인 창녕객사(경남유형문화재 제231호),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퇴천삼층석탑(경남유형문화재 제 10호), 창녕척화비(경남문화재자료 제218호) 등의 다양한 문화재가 있다.

만옥정 공원에 있는 창녕 객사. 이 공원에 있다는 객사를 찾느라 애먹을 만큼 이것이 객사인가 싶기도 했다.
창녕객사(昌寧客舍)는 경남 창녕군 창녕읍에 있는 객사이다. 1983년 8월 12일 경남 유형문화재 제231호로 지정되었다.
객사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이나 외국 사신이 묵는 숙소이자 임금과 대궐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곳으로, 관아의 부속 건물 중 하나이다.
이 객사는 창녕현 관아의 부속 건물로,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300~400년 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시장을 세운다는 구실로 창녕읍 술정리로 옮겨졌으며, 이후 1988년에 이곳으로 이전하여 보존되고 있다.
객사의 전형적인 건물 배치는 종묘의 건물을 모델로 하였기 때문에 가운데에 주 건물이 있고 좌우에 익사가 있는 구조이다. 주 건물로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이 건물에는 벽체나 창호도 없이 기둥과 지붕만이 남아 있고, 좌우의 익사도 없어 원래의 형태를 알 수가 없다.
더구나 지붕도 일반적인 객사에 비해 매우 낮고 건물의 방위조차 원형과 달라 권위 있던 객사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창녕 객사.
객사는 조선시대의 지방 관아건물로 고을 수령이 임금의 위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는 정당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머물렀던 좌·우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고 1924년 군수 이장희가 시장용 건물로 쓰기 위해 창녕읍 술정리로 옮겼다가 1988년 이곳 만옥정에 옮기고 보수했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1층 건물로, 지붕 옆모습이 사람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바닥은 따로 마련하지 않고 기단 위에 곧바로 세웠으며 기둥 사이에는 벽을 쌓지 않아 주위의 경관을 볼 수 있게 했다. 앞면을 제외한 나머지 면들의 기둥 사이에 나무 2개를 가로로 설치해 행사 때 발이나 병풍을 치기 쉽게 했으며, 건물 전체에 쇠못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지어진 건물양식으로 보아 조선 후기의 건물로 추측된다.

창녕에 부임했던 관리들의 공적을 실어 놓은 공덕비, 송덕비들을 만옥정 공원에 모아 놓았다. 앞에 네모 반듯한 돌에는 각 지방관의 이름과 재임년도가 간략하게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재임년도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이들의 재임기간에 과연 공덕을 쌓고 송덕비를 세울만큼 태평성대의 시기였던가 싶다.
물론 그중에 한 둘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조선을 전체를 봤을때 고려말과 버금가는 탐관오리의 천국이요, 수탈의 시기이기도 했다. 시간이 있다면 이들의 이름 하나 하나를 찾아 그들의 행적을 짚어보고 싶긴 했다.

맨 앞의 작은 비석의 주인공은 양심이 있었나 보다. 작게 세운 것을 보면~

만옥정 공원에 있는 퇴천 삼층석탑.
창녕 퇴천 삼층석탑(昌寧 兎川 三層石塔)은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에 있는 남북국 시대의 삼층석탑이다.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제 제10호로 지정되었다.
민가 안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 10월에 해체, 보수하여 창녕의 만옥정 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탑이 있던 마을 주변에서 기와조각과 자기조각들이 발견되어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절이름이나 역사를 전하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탑은 2층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위 ·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의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기단의 일부가 약가 파손되기는 했지만 통일신라의 석탑 변천 과정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창녕지구 전승비. 한가지 잊고 지나칠뻔 했던 창녕의 가치. 이곳이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이다. 설명은 아래 사진에~


창녕 읍내를 관통하는 진흥왕 행차길의 안내도.

드디어 만나는 진흥왕 척경비.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 또는 창녕 신라 진흥왕 순수비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에 있는 신라비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3호로 지정되었다.
561년(신라 진흥왕 22년). 순수비로 통칭되기도 하지만, 북한산 순수비, 황초령 순수비, 마운령 순수비에 있는 순수비처럼 순수관경이란 말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으므로 따로 척경비라 일컫는다. 이 비는 화강암질의 자연암석을 이용하여 개석이나 대석을 사용하지 않은 삼국기 비문의 통식을 갖추고 있으며, 일면을 간 다음 외연에 비석의 형상에 따라 음각으로 줄을 돌렸는데 우상부는 암석이 사면을 이루고 있는 관계로 일행씩 낮추어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27행으로 한 행의 자수는 일정하지 않아 말행은 3자뿐인 것도 있으나 26자의 행이 가장 많고 우반부는 위에서 2행마다 1자씩 낮추어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순수의 연시, 사적, 수가인물의 3부분으로 되어 있고 인물열기는 속부·인명·직관·직위를 표기하여 삼국시대 신라비문의 통식을 따르고 있다. 서체는 해서체이며 자경 4cm이다. 앞부분이 마멸되어 자획이 불분명한 점이 있다.
현재 전문 642자 가운데 400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돌의 크기는 높이 176 cm, 폭 175 cm, 두께 약 30cm이다.
본래 화왕산기슭에 있었던 것을 1914년에 발견하였고, 1924년에 지금의 자리(만옥정공원,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순수비라고 널리 알려져 있으나 창녕읍 주민들과 문화재청에는 척경비라고 되어 있다. -출처 다음 위키백과-

진흥왕 척경비, 뒤에 화왕산이 보인다.

진흥왕 척경비문
신라 진흥왕 때 세워진 것으로,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화왕산 기슭에 있던 것이 소풍 갔던 학생에게 발견되어 알려졌는데, 학계에 보고된 것은 1914년 2월 7일 창녕 초등학교 일본인 교장 하시모토(橋本良臧)에 의해서였다. 그 후 1924년 지금의 만옥정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흔히 순수비로 통칭되나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순수비처럼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말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 했으므로 따로 척경비(拓境碑)라 일컫는다.
순수의 기원은 중국의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는데 중국의 황제들이 자신의 영토를 둘러보고 그 곳에서 천신께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순수한 기념으로 비를 세우기 시작한것은 진나라 시황제(BC.259∼BC.210)부터라고 한다.


창녕 젊음의 광장.


왼쪽으로 창녕시장이 있다.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昌寧 述亭里 東 三層石塔)은 국보 제34호로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 120에 있다. 남북국 시대의 탑이다.
이 탑은 원래 노변에 있었고 민가의 담 밑으로 하층기단의 일부가 들어가 있었으나, 1965년 주위에 있던 민가들을 철거하여 정화보존조치를 취하였고 탑도 함께 해체해서 수리하였다. 이때 3층 탑신상면(塔身上面)의 방형사리공(方形舍利孔)에서 청동향로형용기(靑銅香爐形容器), 황색(黃色)유리제(製), 사리병(舍利甁), 사리(舍利) 7립(粒), 향편(香片), 유리소주(小珠) 등의 사리장치(舍利裝置)가 발견되었다.
본탑(本塔)을 동탑이라 함은 한 사찰내에 쌍탑이 건립된 때문이 아니라 술정리에 2기(基)의 석탑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며 서3층석탑은 본탑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일반형 석탑으로 기단은 이중 4개의 면석과 4개의 갑석으로 조립되었고, 상하기단의 면석에는 모두 탱주 2주식이 각출되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1석이며 옥개석 받침은 각 층 5단이고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졌다. 세부양식에서 신라석탑의 통식을 따르고 작풍에 있어 장중명쾌한 기풍이 있는 석탑이다.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며 각부의 수법도 신라 중기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비견되는 작품이다. 현재 탑의 높이는 5.75m이다.

탑이 세워져 있는 창녕군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영역에 속해 있던 곳이며, 진흥왕 때부터 신라의 정치·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기단에는 위·아래층 모두 각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탑신 역시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한 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가 간결한 모습이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1965년 탑을 해체, 복원할 당시 3층 몸돌에서 뚜껑달린 청동잔형사리용기 등의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바닥돌 주위에 돌림돌을 놓았던 구조도 밝혀졌다.
8세기 중엽인 남북국 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적당한 비율로 줄어드는 몸돌로 인해 충분한 안정감과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세부적인 수법도 정교하여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과 비길만한 기품이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신라 영역에 속해있던 창녕의 지역적인 특성으로 볼 때, 경주 중심의 탑 건립 경향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창녕 진양하씨 고택
창녕 진양하씨 고택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가옥이다. 1968년 11월 25일 대한민국 국가민속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창녕 하씨 고택
창녕 지방에 있는 옛집으로 안채·사랑채·대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안채만 지정되어 있다. 안채는 현소유자 하경목 씨의 18대 조상이 이 마을에 들어와 세종 7년(1425)에 지은 건물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건륭 25년’<영조 36년(1760)>이라는 기록이 발견되어 이 때에 다시 지었거나 수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남향한 안채는 중부 이남지방에서 일반적인 앞면 4칸·옆면 1칸의 '一'자형 홑집으로, 왼쪽부터 작은방·대청·큰방·부엌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처마는 이 집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기둥의 높이에 가까울 정도로 깊다. 이는 일조량과 강우량을 고려한 남부지방 가옥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살림집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지붕은 억새풀을 엮어서 얹은 초가로 수명이 길 뿐만 아니라 옛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대청은 통나무를 윗부분만 편평히 깎아 깔았는데 매우 오래된 것이다. 또한 목재는 못을 쓰지 않고 구멍을 뚫어 연결하였으며, 천장은 흙을 깔지 않은 상태로 구성하여 가볍게 한 점 등이 내부의 특징이다.
앞마당에는 작은 텃밭을 가꾸었고 부엌 앞쪽에는 장독대가 있으며, 안채 뒤로는 꽃계단을 꾸며 몇그루의 오래된 나무들이 어울러 숲을 이루고 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약간의 변형이 있었지만 일반가옥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초가 앞쪽으로는 기와로 이은 사랑채가 하나 더 있다. 이 사랑채는 1898년에 새로 지었다고 한다. 사랑채 남쪽에는 대문이 있다.
원래는 대문간 좌우에 마판(馬板) 등의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안채의 평면은 중부 이남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一자형 홑집이다. 평면구성은 동쪽 끝이 부엌이고 다음이 큰방, 이어서 대청, 서쪽 끝이 작은방이다. 정면에서 보면 부엌·큰방·대청과 작은방의 간살이가 제각기 달라 일정하지 않다.
그 중에서 큰방의 간살이가 제일 넓다. 부엌의 동쪽과 북쪽에는 반 반 칸 넓이로 증축한 부분이 있다. 또 큰방과 작은방 앞쪽에도 뒷날 첨가시설한 쪽마루가 있는데 그 넓이가 반 반 칸에 이른다. 마루 앞쪽에는 쪽마루가 없다. 이는 토벽집으로 앞퇴가 없었던 것을 후대에 필요에 따라 첨가하여 퇴칸을 증설한 것이다. 대청의 마루는 이 집의 나이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고식(古式)이다.
마루는 귀틀의 너비와 두께가 13㎝ 정도이며, 거기에 길이 82㎝, 너비 17∼20㎝의 마루청판을 깔았다. 마루청판은 통나무를 둘로 쪼개어 평평한 면이 위에 나오게 나란히 끼었다. 방의 문짝들은 이미 바뀌어 옛모습은 사라졌고 부엌의 널판문도 새로이 만들어졌다.
큰방·작은방의 천장은 고미반자이고 대청은 삿갓천장인데 올려다보면 서까래 위로 대오리로 엮은 산자가 있고 그 위에 겨릅대[麻骨]를 엮어 덮었다. 그리고 그 위로 억새풀로 이엉을 이었다. 보토나 새우·흙을 얹지 않은 상태로 지붕을 구성하였다. 이 마을에서는 이러한 기법의 집을 ‘건새집’이라 부른다. 건새집의 구성은 농촌 서민주택의 부속건물에서 간혹 볼 수 있으며 지붕이 가볍기 때문에 건축부재를 가늘게 쓸 수 있는 특징을 가진다.
'걷기 좋은길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청 수영성과 오천항 (1) | 2019.03.22 |
---|---|
천년의 노래 창녕 고분군과 창녕 박물관 (4) | 2019.01.16 |
창녕 우포늪 생명길 (4) | 2019.01.12 |
해맞이가서 들려보면 좋은 호미곶 등대 박물관 (0) | 2018.12.26 |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2) | 2018.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