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백년 동안, 왕들의 상여는 능선 위로 올라갔다. 능선 아래쪽으로 산은 깨끗이 벌목되었다. 무덤들이 들어선 능선은 마을 어디에서나 뚜렷이 보였다. 왕들의 무덤은 우뚝하게 두드러져서 하늘에 닿았다. 무덤들이 오래된 능선을 가득 채운 후에도 왕들은 거듭 죽어서, 무덤은 새로운 능선으로 뻗어나갔다. 그 능선에서 내려다보면 먼 변방 쪽으로 산봉우리들이 출렁거리며 달려갔고 대궐과 관아는 능선의 남쪽 사면에 안겨 있었다. 여러 고을을 휘돌아나가는 강물이 굽이마다 들판을 품었고 들판의 가장자리로 민촌은 흩어져 있었는데, 소 울음소리며 개 짖는 소리가 능선에까지 들려왔다. 왕들은 죽어서 하늘 가까운 산 위에 묻혔지만, 왕들의 내세는 여전히 능선 아래의 들판인 듯 싶었다.
봄마다 새 풀 돋는 무덤들은 연두색으로 빛났고, 겨울에는 눈 덮인 봉분에 칼바람이 부딪혀 새파란 하늘로 눈보라가 날렸다. 하늘이 팽팽한 겨울 저녁에 노을에 비낀 흰 봉분들은 보랏빛으로 젖어들며 밤을 맞았다. 그믐밤에도 무덤들은 어둠이 엷어진 능선 위에서 희끄무레한 윤곽을 드러냈고, 그 위로 푸른 별, 붉은 별, 노란별과 먼별, 가까운 별, 밝은 별, 흐린 별이 반짝였다. 별들은 계절마다 흘러서 자리를 바꾸었고, 무덤과 별 사이에는 어둠이 가득 찼다. 가야(伽倻)의 별이었다.
<현絃의 노래>(김훈, 생각나무, 2004) 중에서 발췌.
죽은 우륵을 묻고 난 니문은 국원을 떠나 구름처럼 떠다니며 산다. 어느 가을, 그의 나이 일흔 두 살, 니문은 가야 대궐 뒤 무덤의 능선에 오른다. 불타버린 대궐 터에는 검게 그을린 석재들이 나뒹굴었고, 봉분들은 팽팽한 하늘 아래서 우뚝하다. 니문은 아라가 묻힌 태자의 봉분 아래 주저앉는다. 니문은 등짐을 내려 금을 꺼낸다. 옛 가야 고을의, 네 줄짜리 금이다. 니문은 사마귀를 들여다보며 금을 뜯는다. 그때 민촌에서 저녁을 짓는 연기가 오른다. 산맥과 봉분과 민촌의 지붕 위에 가을빛이 가득히 내린다. 가야 사회가 문을 닫은 것이다. <현의 노래>는 그렇게 끝난다.
그리고 천년의 세월을 지나 내가 그 왕들의 무덤 능선에서 나의 노래를 부른다.
이제 겨우 50줄에 들어선지 얼마나 되었다고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어두워져만 가는 이 마음의 정전 상태를 내가 알아채고 있는 것이다.
사실 과거의 그 빛나는 미래가 오늘의 이 모습은 아니었는데 어쩌면 지금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아름답게 사는 것인지 아직도 모르는 이 덜 여문 감정의 덩어리를 가지고 이제는 멈출때도 되었건만 내 생에 거는 그 커다란 기대감의 좌절이라는 것이 도대체 멈춰지질 않는다.
그저 앞으로의 삶을 더 열렬히 가꾸고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마음안의 다짐도 어느순간 여지 없이 허물어 지고있는 이 적요한 시간위에 서서 나보다 먼저 살다간 이들의 무덤을 이렇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왕릉이나 무덤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상하게 삶과 죽음에 대한 지대한 철학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나 스스로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까닭에 그 삶과 죽음에 대해 분명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저 내가 이 무덤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다.
한 시대를, 한 세월을 살다가 묻힌 그들의 삶이고 그 삶속에 그들이 어떻게 살았으며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입고 무슨 이상과 꿈을 가지고 살아 냈는지 엿보고 싶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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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교동 고분군
화왕산 서쪽 기슭의 목마산성 아래에 있는 송현동 고분군과는 현풍으로 통하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남쪽에 위치한 대형 고분군이다. 교동에는 왕릉이라고 불리는 대고분을 중심으로 주위에 대소 수십 기의 고분들이 모여 있었으나, 현재는 8기만이 남아 있고 그나마 봉토들의 파손이 심하다. 이 고분군은 1918년에서 1919년 사이 일본인에 의해 그 일부가 발굴조사되어 유물은 대부분 일본으로 옮겨가고 지금은 일부만 국내에 남아 있다. 당시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형 고분군은 횡구식(橫口式) 또는 횡혈식(橫穴式) 고분이었다고 한다.

교동 고분군은 20번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다. 앞쪽에 창녕 박물관 주차장이 있고 이 고분군 옆에 창녕 박물관이 있다.

출토 유물은 금봉관을 비롯하여 순금이식(純金耳飾) 등 각종 귀금속으로 된 장신구와 동, 철제의 무구, 토기 등 대량의 유물이 출토 되었다고 한다. 일본인이 남긴 발굴 보고서가 간단하여 교동고분군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 등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현존하는 고분 중 21기(基)는 지금까지 복원한 것인데 그중 1기는 입구 쪽을 개봉했다. 구조는 현실(玄室)과 연도는 구별이 없고 다만 장방형(長方形)이 평면횡혈식(平面橫穴式) 석실로 삼면의 측벽은 크고 작은 돌덩이이고 판석(板石)으로 천장을 덮은 것이다.
일본인에 의해 개략적인 보고서가 출판되기는 하였으나 그 많은 유물들의 출토 경위와 유구(遺構)들의 특징이 자세하게 밝혀지지 못한 것이 아쉬운 점이다.




앞에 지붕만 보이는 건물이 창녕 박물관이고 멀리 송현동 고분군이 보인다. 시간이 없어 송현동 고분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창녕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81호) 이 고분군은 대부분 일제시대에 도굴되었거나, 주변이 경작지로 변해 성격 파악이 어렵다. 송현동 고분군을 비롯한 창녕지방 고분군은 약탈적인 발굴과 도굴을 겪었다. 예를 들면 1918년 엄청난 양의 유물에 대한 도굴행위를 시작으로 권력과 결탁한 도굴행위가 대낮에도 공공연하게 행하여졌으며, 도굴한 유물의 대부분은 상인의 손을 거쳐 일본에 유출되었다. 송현동고분군은 봉토는 대형분이고 세 멱을 쌓아올리고 그 위에 뚜껑돌을 여러 개 놓은위 막지 않은 벽을 통해 안치하고 나머지 벽을 쌓아 막는 방법인 횡구식 석실분으로 무덤의 형태와 구조 출토 유물들은 교동 고분군과 비슷하다.



창녕 교동 고분 횡혈식 석실분(앞트기식 돌방무덤)
석실분은 일반적으로 연도가 달린 횡혈식 고분을 가리키는 말이나, 수혈식에 있어서도 내부공간(매장부)이 사람이 서서 다닐 정도로 거대한 것은 석실분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석실분도 내부구조에 따라 수혈식, 횡구식, 횡혈식의 3유형으로 구분된다. 수혈식 석실분(구덩이식 돌방무덤)은 네벽을 쌓고 천장을 덮어오다가 시신을 위로부터 매장하여 덮게돌을 다 덮은 것이며, 횡구식(앞트기식 돌방무덤)은 세 벽을 쌓고 천장 덮게돌도 다 덥고 나머지 한 측벽으로 매장하고 나서 입구를 막아버리는 것을 말한다.

오른쪽에 창녕 박물관이 보인다.





창녕 박물관. 교동 고분군 옆에 위치해 있다.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리에 있는 종합박물관이다. 지역 문화를 연구하고 홍보하며, 선사시대부터 가야시대까지 창녕 지역에서 출토된 고고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다. 창녕박물관은 1996년 3월 개관하였으며, 화왕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교동고분군과 인접하고 있으며 2개의 전시실과 시청각실 등을 갖추고 있다.
건물은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이며, 1층은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로 되어 있다. 지하에는 시청각실이 마련되어 있어 창녕군 관내의 문화유적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시청각자료를 방영하고 있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앞쪽에 주차장이 널널하게 마련되어 있다.

대부분의 박물관이 그렇듯 전시실 입구에 들어서면 이렇게 연표가 나와있다. 이 연표들을 자세히보는 것만으로도 50점 먹고 들어간다.




지석묘 모형.

이곳부터 자세히 보기 시작하면 신라에 가려 그동안 빛을 보지 못한 가야의 문명과 문화의 독창성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뭐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난 이런 전시실 앞에 서면 가슴이 벌렁거리는 소리를 듣곤 한다.







가야 시대 순장된 송현이. 송현동 고분군에서 발견 됐다하여 송현이라 이름 지어졌다. 나이는 대략 16세이고 키가 153.5cm, 팔다리와 목이 긴데다 허리가(21.5인치)로 8등신의 전형적인 미인형 체형이라고 한다.
2007년 송현동 15호분에서 출토되었고 발굴된 인골 4기중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채로 발굴된 것은 그녀가 처음이라고 한다.
가야 전통 복장을 한 그녀는 어디서 본듯 한 평범한 얼굴이기는 하나 슬픈 듯 체념한 자신의 운명에 순응한 표정이기에 보는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이는 앞에서 16세라 했으며 출산 경험이 없고 종아리와 정강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일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순장을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잔인하고 억울한 죽음일 수 있으나 그 시대의 가치관에서 주인이 죽으면 따라 죽는 것을 숙명으로 알고 있었기에 어쩌면 순장이라기 보다는 스스로 따라 죽는다는 의미의 순사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박물관의 백미 디오라마.
가야시대의 유물 중 총 166종 276점(토기류 85점), 말 장식품 42점, 장신구류 50점, 무기종류 53점, 기타 46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교통 고분군과 계성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전시실내에는 유리 고인돌 모형이나 진흥왕 척경비 모형, 그리고 무덤의 내부 양식을 이해할 수 있게 모형도를 잘 갖추고 있다. 특히 전시관 중앙 홀에는 가야 고분의 축조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모형관이 설치되어 관람객이 가야시대 고분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또한 야외 전시관에는 개성고분군의 모형도를 만들어 고분의 양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두었다.

난 사실 이것을 보기 위해 박물관을 찾는다 할만큼 이런 모형을 좋아한다.

이런 모형을 보고 있으면 은근 흥분되는 것을 느낀다. 최근까지도 디오라마 제작을 취미로 가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창녕 박물관에서 반드시 봐야 하는 것중의 하나 진흥왕 척경비 해석문이다. 앞에 (http://jail6039.tistory.com/173) 진흥왕 행차길에서 보았던 그 척경비다.

진흥왕 척경비의 원문.





박물관 야외 전시관.

봉분의 내부 형태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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