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의 관문이자 홍주목의 치소를 둘러쌓은 홍주성은 1,772m에 달하였으나 현재는 남쪽의 810m 성벽만 남아있다.홍주목의 36동에 이르렀던 관아 건물이 일제에 의해 훼손되어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 여하정만 남아 있다.
홍주성이 정확히 언제 축성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발굴조사 결과 홍주성역사관 뒤편토성이 나말여초에 축성된 것으로 확인되며 조선 초기 왜구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석성으로 쌓은 이후 몇 차례의 중축을 거쳤고, 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에 의해 대대적으로 개축되었다.임진왜란, 이몽학의 난, 동학농민항쟁, 천주교박해 등 산 역사의 현장이며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한 민종식, 이세영 등이 홍주의병을 이끌고 전투를 벌인 곳이다.
충청도에 청주, 충주, 공주와 함께 4곳만이 있었던 목(牧)이다.
목(牧)이란 고려, 조선의 관직. 도 아래의 목(牧)을 관할하는 지방관이다.
목은 부-목-군-현의 순서대로 두번째로 높은 등급의 지방행정구역이고 목사의 직위는 지방관 중에서 현재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관찰사(觀察使) 부를 관할하는 '부윤(府尹) 다음에 위치하는 조선시대 정 3품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판윤은 특별시장 유수나 부윤은 광역시장과 대도시시장이므로 오늘날로 치면 목사는 중견도시 시장격 즉 대도호부사는 변방이나 군사기지에 있는 대도시 시장이면서 변경의 지방수령이고 도호부사는 변방의 소도시 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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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조명이 드리운 홍화문.
홍화문은 홍주성의 남문이다.
본래 홍주성은 4개의 문이 있었으나 언제부터 3개의 문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870년 고지도에서 남문의 존재가 확인 되었다.
이는 남문 주변에 송림을 만들어 나쁜 기운을 차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발굴을 통해 남문의 형태가 정면 3칸.측면 2칸의 문루가 있었던 성문으로 확인이 되었다.
홍성군은 2013년 남문을 복원하여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홍성의 앞날을 상징하는 홍화문으로 이름을 정하였다.

홍화문.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게 되면 이 홍화문을 통해 들어가게 된다. 성 안쪽에 군청 주차장도 있지만 무료인지라 자리가 부족하다. 이곳 공영주차장은 널널하지만 유료이다. 그런데 싸다.

홍화문에 오르면서 보이는 홍주성벽.
원래 총 길이 1,772m에 달하는 성벽과 4개의 성문이 존재했으나 현대에 들어서는 북서쪽의 조양문과 일부 체성만이 남아있었다.
이후 복원에서 현재는 약 800m 정도의 성벽과 남문(홍화문)이 복원되었다.

홍화문 안으로 들어와서 보이는 홍성읍내.
앞쪽에 홍성역사관 지붕이 보이고 뒤에 홍성군청이 있다.
충청남도 서북부에 자리한 홍성군은 해안선을 연접한 서해의 관문일 뿐더러 도성의 인후(咽喉)였다. 예로부터 국방 요새일 뿐 아니라 충청도의 중요고을이였고 서산군 태안반도의 인흥항은 해로로 통하여 멀리 중국을 왕래하였던 요지이고 교통 중심지였다.
때문에 예전에 홍주성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상성을 설치한 것이 홍주성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홍주성 역사관, 2019년 4월 1일까지 휴관이다.

홍화문 안쪽에 있는 비석군.
홍주성을 고쳐 짓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홍주는 서해로 가는 길목으로 교통의 중심이며, 충청 서부지역의 군사적 요충지가 되는 곳이다. 홍주성은 조선시대 문종 1년(1451)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쌓아 놓은 곳으로, 민종식, 이세영, 채광묵, 안병찬 등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에 반대하며 의병을 일으켜 이곳에 와서, 성에 머물러 있던 일본군을 덕산으로 쫓아내 성을 되찾았던 전투로 유명하다.
비문에는 순조 24년(1824)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현규가 이 성을 돌아보고 성이 황폐해진 모습에 탄식하여 수리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 비는 1824년(순조 24년) 황폐된 홍주성 보수를 완공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본래 홍성읍 고암리에 있었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성의 축조과정을 알 수 있다. 홍주는 지역이 바닷가에 있어서 서울의 서남쪽의 방비를 위한 중요한 지역이다. 그러나 이 성이 부수어져 1823년순조 23년 봄에 부임한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가 이 성을 수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해 8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1월에 마쳤다.
그리하여 완성된 성의 규모는 7리이고 일을 한 날은 100여일 이었다.
비의 뒷면에는 성쌓기 작업을 주도하고 감독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이 있어 당시 사회상을 파악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홍화문의 안쪽.
처음 성이 축조된 시기는 기록이 없어서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조선 초기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홍주성의 둘레와 단편적인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제 성벽을 둘러보겠다.

성벽위에서 보이는 홍화문.

같은 장소지만 이 사진은 조명 공사가 한창 진행 중 일때이다.




성벽 위에서 보이는 홍주성 역사관과 홍성군청.

멀찌기 보이는 홍화문의 안쪽.

홍주성 역사관

홍주성 천년 여행길의 안내. 성벽 앞에 홍성의 역사적 인물들의 흉상이 있다.
만해 한용운선생, 김좌진장군, 최영 장군, 성삼문 등이 있다.

만해 한용운 선생 흉상.
만해 한용운은 1879년(고종16) 8월 29일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에서 청주한씨 서원군 한명보의 후손인 부친 한응준과 모친 온양방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릴 때 이름은 유천(裕天), 본명은 정옥(貞玉), 불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 (卍海, 혹은 萬海)라 한다. 6세부터 성곡리의 서당골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사찰령을 공포하여 우리나라의 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시키고 사찰에 대한 권리를 장악하려 하자 반대운동을 벌였으며,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여 불교계의 개혁을 주도하였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을 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 수감 중 ‘독립의 서(獨立의 書)’를 썼다.
1926년 88편으로 된 ‘님의침묵’ 시집을 발간하였고 지조가 곧고 절개가 있어 일제와 추호의 타협도 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몸바치다가 1944년 6월 2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별세하였다. 묘지는 서울 중랑구 망우동 정상에 부인 유씨와 같이 쌍봉으로 안장되었다. 홍성군은 결성면 성곡리 한용운 생가지에 생가 복원에 이어 사당을 건립하였다.


군청 앞쪽에 있는 성벽앞에 있는 성삼문의 흉상.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꼽힌다.본관은 창녕. 자는 근보(槿甫)ㆍ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아버지는 도총관 승(勝)이다. 외가인 홍주(洪州) 노은골에서 출생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묻는 소리가 3번 들려서 삼문(三問)이라 이름 지었다는 일화가 전한다.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 식년시에 응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힌 뒤 세종의 명으로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ㆍ신숙주ㆍ최항ㆍ박팽년ㆍ이개(李塏) 등과 더불어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 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차례나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音韻)을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오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헌을 했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유성원 등과 함께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실패하여 능지처형(凌遲處刑)을 당했고 집안도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
1691년(숙종 17)에 관직이 회복되었으며, 1758년(영조 34)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숙종 2년(1676)에 이량과 호서의 유림 등이 선생의 옛 집 근처에 사당을 세우고 사육신을 같이 모실 것을 청하자, 나라에서 녹운서원이라 하였고, 뒤에 노은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고, 후에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고 노은단이라고 하고 제사를 지냈다.
1954년 홍성 고적현창회에서는 제단을 보수하고, 노은단수호위원회에서 음력 9월 16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충청도 4목 가운데 하나인 홍주목의 동헌인 안회당과 1896년 홍주목사 이승우가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며 홍주목사들이 정사를 구상하며 휴식을 취하였던 곳으로 정각은 6각형의 수상정인 여하정이 있다. 홍성군청 안뜰에는 보우국사가 왕사가 된 것을 기념으로 심었다고 전해지는 느티나무와 홍주관아의 외삼문인 홍주아문이 있다.

안회당.







보우가 심었다는 느티나무와 여하정.


여하정.





홍주성 역사관, 휴관을 알리는 현수막이 있다. 참고 하시길~


홍주성내에 있는 옥이다.






홍주성에 관한 안내. 옆에 홍주성 전투를 그린 그림이 인상깊다.
현재 홍성군은 장기적으로 홍주읍성을 복원할 계획이다. 그러나 많은 부분 허물어진 후 성이 있던 자리는 대부분 민가가 들어선 이후라 복원이 쉬운 편은 아니다. 특히 홍주성 유적 안에는 홍주 군청과 홍주초등학교도 들어와 있기에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도 많다. 때문에 홍주 군청은 조만간 이전계획을 세울 예정이다. 단지 홍주초등학교는 문화재유적 안이지만 교육청 소관이라서 현재로써는 복원할 수 없다.
2016년부터 북문지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2008년경 복문지 일대를 문화재 조사했다 복토 한후 화단으로 놔두었으나 16년 이후 본격적인 복원을 시작해서 주변의 건물들은 상당수 철거된 상태이고 체성발굴을 위해 도로도 우회로 신설하였다.
참고로 북문지는 1906년 일본에 항거해서 의병이 저항했으나 일본의 군사공격으로 성문은 파괴되고 문밖은 의병들의 대량 학살 처형지로 쓰였다.
이에 따라 복문복원과 더불어서 홍주성 의병공원도 계획 중에 있다.


1904년 한일의정서·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고, 1905년에는 통감부 설치와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 조약이 체결되자 반일 감정은 전국적으로 고조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조직되어 치열한 항쟁을 벌였다. 동학농민운동의 잔여 세력인 활빈당이 해체되자 그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도 을사 의병에 가담하였다. 1906년에는 그 의병 활동이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 중 가장 손꼽히는 전투로 홍주성 전투를 들 수 있다. 1906년 5월에 민종식 부대가 홍주성(現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서 일본군을 화포로 몰아내자 일본은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부대를 대거 투입하여 성 주위를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의병 부대는 시가전을 벌이는 등 끝까지 항전했으나 사상자 속출로 결국 퇴각하였다. 현재 홍주성안에는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병오 항일 의병 기념탑이 있다.
을사 의병의 지도부는 을미의병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양반 유생이 중심이었고, 지도 이념도 위정척사 사상에 기반한 반외세 의식이었다. 이러한 양반 유생 중심의 의병은 민중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의병 부대를 조직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그들이 가진 계급적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의병 대중의 반침략적·반봉건적 요구를 수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후 민중 세력이 의병의 지도부로 진출하는 등 의병의 성격이 변화하고 전투력의 질적인 발전을 이루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후 정미의병에서는 더욱 조직화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왼쪽으로 공영주차장이 있다.

홍주성에 있는 거의 유일한 치.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이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은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치 위에서 보이는 홍주성벽, 안쪽에 옥이 있다.




성벽을 사이로 양쪽에 주차장이 있다. 밖에 있는 주차장은 공영주차장으로 유료이다. 안쪽은 무료이지만 자리가 부족하고 바닥이 흙이다.
깔끔하게 바깥의 공영주차장에 주차하고 성을 둘러보는 것을 권장한다. 주차요금은 입장료라 생각해도 무방하게 싸다.



홍주성 홍화문에 내려다 본 홍성읍내.
조선 세종 때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곽 축조를 했고 문종 1년(1451)에 새로 고쳐 쌓았다.
성의 둘레가 4,856척(약 1.5㎞),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문은 4개가 있었고, 여장·적대 등의 여러 시설이 설치되었으며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한다.

홍주성의 조양문. 이어지는 성벽이 훼손된 관계로 이렇게 동떨어져 있다.
조양문(朝陽門)은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에 위치한 홍주읍성의 4대문 중 하나이다. 대한민국 사적 제231호로 제정되어 있다.
홍주성의 동문으로 서문인 경의문, 북문인 망화문의 문액은 흥선대원군이 친필로 하사하였으나 망실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서문과 북문은 없어지고 조양문마저 파괴하려고 하였으나 읍민들의 결사적인 반대로 화를 면하였다. 1906년에 을사늑약에 반대한 홍주의병과 일본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조양문은 홍주성의 동문이며 홍성군의 관문으로 고종조에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동서남북의 문루도 다시 세웠다. 동문은 조양문 서문은 경의문 북문은 망화문이라 하는데, 대원군이 친필로 하사하였으며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이었다. 북문은 역대 목사들이 문루에서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하기도 하였는데, 동학운동(1894) 때는 수백 명의 동학군이 여기에서 처형되었다. 고종 광무 10년(1906) 항일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때의 흔적이 조양문 곳곳에 보인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조양문 또한 파괴되었으나 부분적인 보수로 퇴락되었던 것을 1975년 문루를 해체 복원하여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홍주성에 밤이 드리우기 시작하고 곧 야간 조명이 켜질 것이다.

안쪽부터 불빛이 드리우고 있다.










홍화문 앞에서는 한가지 빛이 아닌 여러가지로 변화하는 빛을 보여주고 있다. 조용히 할테니 천천히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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