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그렇게 사람을 허기지게 만드는 것일까!
설명할 수도 설명되어 지지도 않는 안개처럼 휩싸인 불확실하고 간절하게 사람을 달구어 놓는 고독의 정체를 도대체 난 뭐라 이야기 해야 하나.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이미 내가 알아챈 것일까.
아니면 언제나 멀게만 느껴졌던 성숙이란 단어에 조금은 접근한 것일까~
하룻사이에 극과 극을 오가는 감정의 굽이를 스스로 자제할 능력을 상실하여 도저히 혼자서는
내 감정의 위기를 지켜볼 자신이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나 보다
그래서 스스로 그렇게 내 의식의 자각을 감각적으로 진화시켜 나가는지도 모르겠다.
언제인가 꽉찬 느낌으로 가득 채워질 이 공허하기만 한 넓디 넓은 공터 같은 마음을 조금 더 오래 지니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지극히 무미건조하고 썰렁하며 모자란 기분일지라도 그것이 더욱 더 오래도록 내가 이 삶의 대열에서 느껴지는 외로움을 견디어내는 또다른 방법인 것이다.
논산 명재 고택(論山 明齋 古宅)은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가옥이다. 1984년 12월 24일 대한민국 국가민속문화재 제190호 윤증선생고택(尹拯先生故宅)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1월 29일 논산 명재 고택(論山 明齋 古宅)으로 문화재 지정명칭이 변경되었다.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인 윤증(1629∼1714)이 지었다고 전하는 집이다. 후대에 수리가 있었던 듯 하며 그 세부기법은 19세기 중엽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노성산성이 있는 이 산의 산자락에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사랑채가 있고, 왼쪽 1칸 뒤로 '一' 자형의 중문간채가 자리잡고 있다. 중문간채는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1칸 돌아 들어가게 중문을 내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어서, 중문간채와 함께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집 앞에는 넓은 바깥마당이 있고 그 앞에 인공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다. 또한 안채 뒷쪽에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독특한 뒤뜰을 가꾸어, 우리나라 살림집의 아름다운 공간구조를 보이고 있다.
모든 건축부재의 마감이 치밀하면서 구조가 간결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한 조선의 양반주택으로 중요하다.
지정 당시 명칭은 '윤증선생고택(尹拯先生故宅)'이었으나, 조선 숙종 때의 이름난 유학자 명재 윤증(1629-1711)이 지었다고 전하는 가옥인 점을 반영하여 그의 호를 따라 ‘논산 명재 고택’으로 지정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조선의 학자. 서인 소론의 영수다. 자(字)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윤선거의 아들이자 성혼의 외증손이 된다.
아버지 윤선거 밑에서 수학하여 성혼의 학맥을 계승하였으며, 그 밖에도 장인이 되는 권시를 비롯해 김집, 유계, 송준길, 송시열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 저 중 셋이나 문묘에 배향된 인물들이니 그야말로 아버지 윤선거의 위상과 평판을 알 수 있는 장면이라 볼 수 있다.
이후 학문 연구에 뜻을 품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는데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있어서 상당한 명망을 얻었다. 하지만 1669년 아버지 윤선거의 죽음이 그의 위치를 바꿔놓게 된다. 윤선거는 같은 서인인 송시열과 달리 남인에게 상당히 관대하였고, 윤증 역시 남인의 대표인 윤휴 등의 조문을 받았으며 이를 송시열이 매우 불쾌해 했다. 그리고 1673년 결국 회니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회니논쟁에서 회니란 송시열이 살던 회덕과 윤증이 살던 이성을 말하는 것으로,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을 윤선거의 생전 친구였던 송시열에게 부탁했는데 송시열은 윤선거가 생전에 남인 영수 윤휴를 두둔했던 앙금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조문에 병자호란 때 자결한 처를 두고 도망쳐나온 일을 가지고 야유하는 뜻을 적었다. 이에 윤증이 송시열에게 시정이나 삭제를 요구했으나 송시열은 들어주지 않았고, 이 일에 감정이 상한 윤증은 결국 송시열을 비판하고 사제의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다.
말년에는 제자인 유상기와도 불화가 있었다. 유상기의 조부 유계는 『가례』의 연원과 그 발달을 비교, 고찰하여 가례의 본질과 그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게 하기 위함으로 『가례원류』 란 책을 썼다. 문제는 이 책의 아이디어는 유계가 냈지만 자료를 찾아보는 것은 윤선거와 윤증이 한 일이었다. 따라서 『가례원류』는 유계만의 단독작품이 아니라 공동저서인 셈이었다. 문제는 유상기가 『가례원류』 의 원고를 달라 하였는데 윤증은 "그게 네 조부만의 책이더냐?" 라며 거절했지만 유상기가 노론인 이이명에게 부탁해 가례원류의 간행을 도우라는 어명에 어쩔 수 없이 주었다. 나중에 유계가 단독저자라 기록하고 부친인 윤선거와 자신이 기여한 사실을 모두 빼버린 것을 안 윤증이 분노하여 편지로 질책하자 유상기도 질세라 반격하는등 공방이 이어갔고 그러는 사이 윤증이 죽자 가례원류의 발문을 송시열의 제자 정호와 권상하에게 각각 부탁하고 응한 두사람은 윤증은 스승을 배신한 패륜아라고 비난했다. 자기 옛스승과 사소한 일로 인하여 사제간의 갈등과 분열이 말년에 재현되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 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과 대립각을 세웠으나 다행히 벼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예송논쟁과 각종 환국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특히 경신환국이후 남인의 처리를 두고 남인을 강하게 처벌하자는 서인강경파에 대응하여 박세채, 남구만, 박세당등과 함께 서인 온건파를 이끌게 되어 소론의 영수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윤증은 송시열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훗날 노론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리게 된다.
1714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1716년 소론이 실각하는 병신처분이 일어날 때 관직을 모두 추탈당했으나 1722년 소론이 재집권하자 복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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