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은 젓갈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때 강경은 군산, 부여, 공주, 등을 연결하는 수상 교통의 요지여서 크게 번성하였던 곳이다. 서쪽으로 금강이 흐르고 곡창지대인 논산평야, 호남평야와 가까운 지리적 특성 때문에, 수운을 통한 상거래가 발달하여 대구, 평양과 함께 조선의 3대 시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성했다.
강경이 크게 번성한 때는 구한말 1900년대부터다. 일본인의 유입으로 상업이 발달하면서 1910년 한일은행 건물이 지어졌고, 충청남도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다. 전성기에는 인구가 3만 명에 육박했다. 심지어는 전남의 여수처럼 강경 와서 돈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05년 호남선이 개통된 이후 수운의 메리트가 없어지면서 청주와 공주가 강경 상권에서 이탈하는 등 안습한 행보를 걷기 시작했는데, 돈 있는 사람들이 물밀듯이 공주나 더 나아가서는 대전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물론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강경의 위치가 수탈 목표였던 평야들의 중심지였고,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대량의 물량 수송은 대부분 수운으로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에 군산항이 최대 항구 중 하나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강경은 이 때까지만 해도 명줄은 붙잡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강경읍은 조치원읍, 철원읍과 함께 1931년 4월 읍제도의 시행과 함께 설치된 유서깊은 읍이다.
특산물로는 젓갈이 유명하며, 매년 10월 중순에 젓갈 축제가 열린다. 도리어 한 때의 번영이 지나고나서부터 이 곳의 젓갈 유통이 활발해져서, 지금은 전국 젓갈 유통의 70%를 차지한다.
충청방언으로 갱갱이라고 불린다.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舊 韓一銀行 江景支店)은 충남 논산시 강경읍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건축물이다. 2007년 4월 30일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1913년 붉은벽돌조로 신축된 건물로 4개의 그랜드 필라스터(pilaster)와 화강석을 이용한 독특한 형태의 주두(capital), 그리고 4개의 그랜드 필라스터를 엮어주는 엔타블레이처(entablature)를 통해 은행건물로서의 안전하고 굳건한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적절한 비례를 갖고 있는 입면과 벽돌 벽면에 화강석을 장식적으로 활용하는 등 매우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잘 보존되어 있어 근대기 강경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옥녀봉은 논산 8경 중 하나로, 송재정(정자)과 봉수대에서 강경읍내나 금강을 조망하기에 좋다. 옥녀봉 정자에서 바라보면 사방이 거칠 것이 없이 훤하고, 논산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또 부여와 익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고, 평야와 강이 조화를 이루고 저멀리 산이 배경처럼 서 있어 한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한다.
옛날 이 산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아주 맑았고, 산은 숲으로 우거져 있었으며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넓은 들이 있어 경치가 더없이 좋았다고 한다. 때문에 옥녀봉은 달 밝은 보름날 하늘나라 선녀들이 이 산마루에 내려와 경치의 아름다움을 즐겼고 맑은 강물에 목욕을 하며 놀았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옥녀봉 봉수대는 전북 익산 광두원산의 봉수를 받아 황화산성, 노성봉수로 연락을 취하던 곳이다. 송재정 바로 아래편에는 국내 최초의 침례교회 예배터가 자리하고 있어 성지순례지로도 유명하다.


강경은 대한민국에서 면적이 두 번째로 좁은 읍이다.
군산, 부여, 공주 등을 연결하는 수상 교통의 요지여서 크게 번성하였던 곳이다. 서쪽으로 금강이 흐르고 곡창지대인 논산평야, 호남평야와 가까운 지리적 특성 때문에, 수운을 통한 상거래가 발달하여 대구, 평양과 함께 조선의 3대 시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성했다.



죽림서원(竹林書院)은 충남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에 있는, 율곡 이이·우계 성혼사계 김장생·정암 조광조·퇴계 이황·우암 송시열등의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984년 5월 17일 충남 문화재 자료 제75호로 지정되었다.
율곡 이이·우계 성혼·사계 김장생·정암 조광조·퇴계 이황·우암 송시열 등의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이(1536∼1584)는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인 신사임당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아홉 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이황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원리를 중시한 이황에 맞대어 경험을 중시했다.
성혼(1535∼1598)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젊어서부터 이이와 학문을 교류하였으며 많은 벼슬자리에 추대되었으나 거절하다가 이이의 권유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이 서원은 이이와 성혼을 기리기 위해 인조 4년(1626)에 황산서원이라 하여 세웠다. 후에 김장생을 추가하였으며 현종 6년(1665)에 임금으로부터 ‘죽림’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고 조광조·이황·송시열의 위패를 추가했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1946년에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오다가 1965년 사우를 다시 세웠다.
서원의 건물은 출입구인 홍살문과 외삼문을 통하면 동재, 서재, 내삼문, 사우가 있다.
사우의 오른쪽에는 죽림서원의 중건비와 황산서원의 지비를 세워 놓았다. 사우는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문묘에 모시고 있는 선현들만 모신 서원으로,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임리정(臨履亭)은 충남 논산시에 있는 건축물이다. 1976년 6월 9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인조 4년(1626) 사계 김장생(1548∼1631)이 지은 정자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원래의 이름은 황산정이었으나 “깊은 못가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얇은 얼음장을 밟는 것과 같이, 자기의 처신과 행동에 항상 신중을 기하라”라는 『시경』의 구절을 따서 임리정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앞면 3칸의 기둥 사이를 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왼쪽 2칸은 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을 두었다. 뒤쪽으로는 사랑방을 2개 꾸며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게 하였다.
임리정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정자 양식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김장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 정치인, 문신이다. 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이며, 본관은 광산(光山), 자(字)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文元).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다. 송익필로부터 사서 등을 배웠고,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78년 처음으로 관직길에 나섰으며, 1581년 종계변무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때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1597년에 군자감첨정이 되었다가 안성군수가 되었다. 조정에 잠시 나갔다가 북인의 득세로 귀향하였고, 이후 계축옥사에 동생이 연좌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조정에 출사했으나 병으로 다시 귀향했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파천오자 어가를 맞이하였으며, 난이 평정된 뒤 다시 조정에 출사했다. 이후 원자의 강학을 담당했고,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었으며 또다시 귀향하여 이이와 성혼을 제향하는 황산서원을 세웠으며, 정묘호란때에는 79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소현세자를 호위했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낮은 직책을 전전했으나, 이귀와 함께 이이, 성혼의 학문을 계승하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활약했다. 특히 향리에서 머무르는 동안 아들 김집부터 시작하여 송시열, 송준길등이 죄다 그의 밑에서 수학하였고, 이들은 서인의 학문적인 계통을 담당하는 주요 인사들이 되었다.
예학에 정통한 인물로 그에게 배운 제자들이 이후 조선의 권력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형식적인 예법에 치우친 유교 원칙주의자들의 중시조 격인 인물이다.
1688년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아들 김집도 뒤늦게 종사됨에 따라 부자가 문묘에 종사되는 유일한 사례가 되었다.
이 사람의 증손자가 숙종의 첫번째 장인인 김만기와 구운몽으로 유명한 김만중이다.





팔괘정(八掛亭)은 충청남도 논산시에 있는, 조선 인조 4년(1626)에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고 전하는 정자 건축물이다. 1978년 3월 31일 충청남도의 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었다.
팔괘정은 조선 인조 4년(1626)에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고 전하는 정자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추모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기르던 곳이다.
금강변에 남향으로 세워졌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다. 왼쪽으로 2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지붕은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이다.
건물 안에는 시를 쓴 현판이 걸려있고, 건물 뒤의 바위에 송시열이 새긴 글자가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 죽림서원(竹林書院) 바로 앞에 위치한 누정이다. 김장생(金長生)이 1626년(인조 4)에 이곳으로 내려와 황산서원(黃山書院, 지금의 竹林書院)과 임리정(臨履亭)을 세워 선현(先賢)을 추존하며 후진을 교육하였다. 이후 김장생의 학맥을 이은 송시열(宋時烈)이 1663년(현종 4)에 팔괘정(八卦亭)을 지어 금강(錦江)의 수려한 경관을 즐겼다고 한다.
송시열은 이 정자를 지으면서 창살무늬를 팔괘(八卦)로 꾸몄고, 그로 인하여 정자 이름을 팔괘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팔괘정 뒤에 위치한 황산서원은 지금의 죽림서원이다.
팔괘정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금강 변에 남향하고 있다. 앞면에서 왼쪽 2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은 팔작지붕 구조로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이다. 이 누정 안에는 시를 쓴 현판이 걸려 있고, 누정 뒤의 바위에 송시열이 새긴 글자가 있다.


구 강경노동조합은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염천리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건축물이다. 2007년 4월 30일 대한민국 국가 등록 문화재 제323호로 지정되었다
강경노동조합 초대 조합장 정흥섭이 중심이 되어 1925년 신축한 건물로 원래는 2층 이었으나 현재 1층의 일본목조건축 양식을 지니고 있다. 정면 중앙부에 입구를 두고 돌출된 작은 지붕으로 포치를 구성하고 있는 정면5칸 측면3칸의 건물로 강경지역 근대 상권의 흥망성쇠를 엿 볼 수 있는 상징적 건물이다.




강경성당은 충남 논산시 강경읍에 있는 건축물이다. 2015년 8월 25일 대한민국 국가 등록문화재 제650호로 지정되었다.
강경성당은 1961년에 건립된 것으로, 당시로서는 특이한 구조방식인 첨두형 아치보로 내부를 구성하는 등 현대적 처리가 돋보이는 성당건축물이다.
건축에 조예가 깊은 보드뱅 신부(1897∼1976)의 설계와 감독으로 지어져, 건립 당시의 구조와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존·활용 여건이 양호하며, 당시의 일반적인 건축구조형식을 벗어나 아치 형식의 구조프레임을 사용하여 대형공간을 만드는 등 건축적ㆍ종교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전통의약의 중심에서 지역 주민들의 건강을 지켜온 상징적 공간, 바로 한약방이다. 한약사는 물론이고 한약방이라는 이름마저도 잊혀지고 있는데 1951년에 '한의사 제도'가 도입되면서부터이다. 더욱이 의약(醫藥)의 분리와 전문화로 인해 더 이상 한약사를 선발하지 않기 때문에 한약방을 보기란 쉽지 않다.
대구, 평양과 함께 강경은 조선 말기의 3대 시장으로 일컬어질 만큼 번성했던 곳이다. 특히 강경 구시장인 하시장의 골목에 위치한 상가들은 호황을 누렸는데, '연수당건재한약방'도 시장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 사람들로 들끓었다. 1923년에 건축후 '남일당한약방'으로 운영하였는데, 1933년 동아일보 기사에 '경성남대문밧게서 제일큰약방이라고 이르던 약방인만큼…'이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당시에 지역에서 지명도가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한약방은 이층으로 된 한옥 상가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규모가 제법 크다. 1층은 상업시설을 갖추고 2층은 주택시설을 두었으니 오늘날의 주상복합형 구조라 생각하면 된다. 또한 한식 건물이지만 1층에 차영지붕, 지붕 장식재, 변화된 툇마루 등은 일본 건축의 분위기를 띤다. 따라서 전통적인 한식 구조에 상가의 기능을 더해 근대기 한옥의 변천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한약방은 현재 후손들의 조부인 故 유진순 선생이 활동한 곳이다. 그는 한학에 매진하다가 1953년 정부의 약종상 면허제도 시행 이후로 약종상 면허를 취득하여 한약방을 운영하였다. 남일당한약방은 이후 '연수당건재한약방'으로 상호를 변경하여 운영되었다. 1980년대에 한약도매상 제도가 생기기 전 한약방에서는 한약재를 판매하는 업무를 병행하였는데 이러한 형태의 한약방을 '건재한약방(乾材韓藥房)'이라 일컬었다. 시장이 역 앞으로 옮겨 간 후 옛 이름인 남일당한약방은 토박이들도 이제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 되었다. 현재는 후손이 관리하고 있으며, 문학관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2002년 2월에 연수당건재한약방은 '강경 구(舊) 연수당건재한약방'이라는 명칭으로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제10호)되었다. 국내에서 근대의 역사건축물이 등록된 것으로는 처음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10여 건의 의료시설이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한의학과 관련된 의료행위가 이루어진 의료시설은 '강경 구 연수당건재한약방'이 유일하다.


논산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네가 개태사의 가마솥과 은진의 미륵불과 강경의 미나(미내)다리를 보았느냐?"고 물어본다고 하여 반드시 구경해야 할 이 지방의 명물이 이 세 가지라고 한다. 민간이 주도하여 놓은 다리나, 500명이 먹을 밥을 짓는 큰 솥이나 동양 최대의 석조 미륵불이 이 지방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곳이 물산이 넉넉하고 경제가 번성했던 곳 임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충청남도 논산시 채운면 삼거리의 강경천에 놓여있는 조선시대의 홍예(虹霓)다리. 길이30m, 너비2.8m, 높이4.5m였고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있다.
영조 때 송만운이라는 사람이 주도하여 민간의 필요에 따라 만든 다리라는 이 미내다리가 이 고장의 명물이라고 하는 이유는 남아있는 옛 다리가 흔히 서울의 궁궐에 놓인 것이나 절 입구에 놓인 것이기 쉬운데 미내다리는 민간의 소용에 따라 물자를 모으고 힘을 합해 지어 물자의 소통을 원활히 하는 데 큰 구실을 한 다리임에 뜻이 있다고 한다. 더욱이 돌다리를 놓는 일은 웬만한 경제적인 기반으로는 어려운 일이니만큼 강경장이 이곳의 경제력을 짐작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유적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조선시대 영정조 때에 꽃 핀 경제적인 번성의 한 중심지로서 강경의 지난 모습을 대변해준 다리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 배가 들어왔으며 전국 교역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는 강경포구가 바로 이곳이며, 수많은 봇짐장수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던 다리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이 다리가 놓여있는 하천을 미하(美河)라고 해서 다리이름을 미내다리(渼奈橋)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있는가하면, 미내라는 승려가 시주를 받아서 만들었다는 데서 그 이름이 연유하였다는 기록이 비문에 남아있다. 또 (동국여지승람)에는 "예전에 다리가 있었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바위가 보인다고 해서 조암교(潮巖橋)또는 미교(渼橋)라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다리는 3개의 홍예로 된 돌다리인데 가운데 홍예가 가장 크고 남북 쪽의 것이 작다. 받침을 긴 장대석으로 쌓고 그 위에 홍예석을 둘렀으며, 가운데 홍예의 종석은 다리난간 쪽으로 돌출 시켜 호랑이 머리를 조각하였다. 북쪽 홍예는 용머리를 새긴 종석이 있고 난간 경계석에는 여러 가지 꽃무늬를 새긴 듯하나 마멸이 심하다. 몇 ㎞ 떨어진 원목다리와 형태는 거의 같으나 이 다리가 더 크고 우람하며 치석이 정교하다. 다리 앞에는 커다란 암반이 있는데 여기에 원래 화강암제의 은진미교비(恩津渼橋碑)가 있었으나 파괴되어 현재 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이다. 비문에 의하면 1731년(영조7년)에 강경촌에 살던 석설산, 송만운 등이 주동이 되어 황산의 유승업, 설우, 청원 등이 이 공사에 진력하여 시작한 지 1년이 못되어 완성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때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 중의 하나로서 그 의의가 있다. 이 다리가 놓이자 정월대보름날이면 무병장수하고 소원성취하기를 비는 많은 사람들이 답교놀이를 하는 지역의 문화중심지 노릇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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