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스카이워크는 높이 15m, 길이 250m의 하늘 길이다. 서천군이 31억원을 들여 만들었다. 2015년 3월 문을 연 이곳은 연간 30만명이 찾는 관광명소로 자리잡았다. 입장료는 2000원이나 서천과 장항 지역에서 쓸 수 있는 상품권을 주니까 지역 경제를 살린다는 효과도 있다.
단순히 스카이워크를 탐방하는 차원을 넘어 스카이워크 아래의 송림을 산책할 수 있는 것이 또한 이곳의 매력이다.





땅에서만이 아니라 이렇게 15m 높이 위에서도 해송들과 함께 걷게 된다.
해송의 높이가 워낙 커서 스카이워크의 높이와 맞먹을 정도이고 어떤 것은 더 높이 솟아 있는 것도 있다.

대부분의 스카이워크가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투명한 재질을 쓴 것과 달리 일부는 나무를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철재를 사용하였다. 투명한 재질로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것도 아찔하지만 철재로 된 바닥이 숭숭 뚫려 있어 걸을 때마다 약간의 울렁임과 철재 소리가 더해져 긴장감이 더 느껴진다.















장항스카이워크의 끄트머리 즈음에는 장항스카이워크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도 무방한 기벌포 해전 전망대라 쓰여진 푯말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금강하구에 해당하는 기벌포는 7세기 중방 백제와 일본,신라, 당나라가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동북아시아 최초의 국제전쟁을 하였던 그 역사적인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기벌포의 위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백강(白江)은 곧 지금의 금강이고, 금강의 하구가 곧 기벌포라고 알려져 있다.
고구려·신라·백제가 서로 자국의 발전을 노려 싸우던 중 553년에 신라·백제 공수동맹(攻守同盟)이 와해되어 더욱 상호항쟁이 격화되었다. 이에 648년에 신라는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신라와 당나라 군대는 660년에 기벌포에서 연합해 백제의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켜 백제를 멸망시켰고, 다시 668년에는 신라와 당나라 군대가 평양 근처에서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직접 지배하고 신라까지 복속시키려 하면서 신라의 자주성을 빼앗았다. 동시에, 고구려의 평양 이남과 백제 땅을 신라에 주기로 약속한 영토분할 약정을 위배하였다. 이에 격분한 신라는 당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당전쟁(對唐戰爭)을 감행하였다.
신라의 대당전쟁은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간 지속되었다. 신라는 북쪽 경계로 남하하는 당나라 군대를 맞아 675년천성(泉城)과 매소성(買肖城)에서 크게 이겼다.
이에 당은 육로로 신라의 한강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676년 11월 금강 하구 기벌포에 설인귀(薛仁貴)가 지휘하는 당 함대를 침입시켜 신라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기벌포는 백제의 수도인 부여 방어를 위해 중시되던 지역이다. 이곳은 강의 하구라기보다 바다의 만(灣)이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지역으로 기벌포를 장악하면 서해를 남북으로 양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해의 제해권과 관련해서도 아주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앞서 신라는 673년에 함선 1백 척과 해군을 서해에 배치시켜 방비하고 있었다. 676년 설인귀의 당나라 해군이 기벌포로 내려오자, 사찬(沙飡) 시득(施得)이 함선을 이끌고 기벌포에서 설인귀군과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그러나 크고 작은 전투 22번에 걸쳐 결국 당나라의 수군 4천여 명의 목을 베고 승리하였다.
기벌포 전투에서 당나라의 해군을 격파함으로써 신라가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얻게 되었다. 이 싸움은 대당전쟁을 승리로 끝맺은 마지막 회전이었다.

기벌포 전투에서 당의 패배를 두고 이 무렵 당을 둘러싼 새로운 군사적 국면과 관련시키기도 한다. 나당전쟁은 675년 9월 매소성 전투를 고비로 당군의 패색이 짙어졌으며, 676년 2월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긴다. 676년 윤3월 토번(吐蕃)이 당을 공격하자 당은 군사전략을 토번 중심으로 전환시켰다. 당 조정은 토번과의 전쟁에 주력하기 위해 신라와의 전쟁에서 철수하는 방책을 취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해 11월 기벌포 전투 당시 당은 상당수의 병력과 유이민들을 이송하기 위해 기벌포로 집결한 상태로 신라와 전투하였으며, 당은 방어적 태세로 대규모 접전을 회피하여 병선 보전에 주력하였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해전의 성격을 고려할 때 22차례의 싸움이 있었다는 기벌포 전투는 최초 접전은 대규모 해전이었으나, 그 외는 양측 주력군의 회전(會戰)이 아니라 고립되어 있다가 퇴각을 기도하는 당군을 추격하여 소탕하는 성격의 전투로 보기도 한다.
기벌포 전투 이후 서해상에서 당군의 어떠한 군사활동도 감지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신라 수군이 서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당 수군이 이미 대양(大洋) 함대를 구성한 반면 신라수군은 연안(沿岸) 함대에 머물고 있었던 점을 감안해보면, 최초 접전에서 패배한 후 전술을 전환하여 유연하게 대처한 점은 신라 수군의 쾌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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