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세월을 품은 태고의 땅으로 낮달을 찾아 떠나는 구도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개통하는 달마고도는 해남군과 미황사가 공동으로 기획하여 송지면 미황사와 달마산 일원에 조성하였으며, 총 17.47km로 미황사에서 큰바람재, 노시랑골, 몰고리재로 이어지는 구간이다.
2.71km에 이르는 1구간은 미황사에서 큰바람재에 이르는 길로 땅끝 천년 숲 옛길 노선과 연계가 되어 있어서 미황사까지 왕복할 수 있는 순환노선이며, 2구간은 4.37km로 큰바람재에서 노시랑길에 이르는 길이다.
3구간은 5.63km로 노시랑골에서 몰고리재로 이어지며, 몰고리재에서 미황사로 돌아오는 길인 4구간은 5.03.km로 전구간이 땅끝 천년 숲 옛길이다.
구간마다 미황사, 도솔암, 동백나무 군락지, 편백나무 숲, 튤립나무 조림지 등 역사자원과 풍광을 만날 수 있다. 달마고도가 다른 둘레길과 다른 점은 순수 인력으로만 시공을 했다는 점이다. 전 구간에서 돌흙막이, 돌계단, 돌묻히기, 돌붙임, 돌횡배수대 등을 만날 수 있는데, 이 모든 과정을 외부 자재와 장비 없이 순수 인력으로 공사를 진행함으로써 이용하는 관광객과 등산객들이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달마고도는 길에 집중하게 된다.
언뜻 바다가 보이고 섬이 보이며 천혜의 아름다운 절경을 상상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모습보다는 그저 길이 먼저 보이고 그렇게 걷다보면 이 길에 기울인 정성과 이 길을 만들기 위해 애썼던 사람들의 땀이 뿌려진 흙사이로 보이게 된다.
그 길을 오늘은 마음을 비우고 머릿속을 비우고는 형체도 없는 아름다운 환상 하나쯤 떠올려가면서 이성이든 감성이든 경색되지않고 완만하면서 부드러운 사색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귓가에서 뭔가를 속삭여주듯 그렇게 감미로운 영혼의 휴식을 취하고 싶다.
마음은 어지럽고 주변은 혼란스럽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듯 하며, 자꾸 생각과 행동이 어긋나는 참담함 같은 것은 이 길이 끝날 즈음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이다.
때로는 울고 싶고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생각 따위는 가능한 짧게 머물게 하려는 마음으로 그냥 걸어보자며 첫 발을 내 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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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는 사실 근래까지 버려지다시피 한 절이었다고 한다. 그 역사를 따진다면야 신라 경덕왕 8년(749년)으로 올라가고 한창 절이 번성할 때엔 스님이 400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숭유억불로 과거의 영화는 잊혀진 이야기가 되었으며 100년 전에는 절을 살리기 위해 시주를 모으고자 배를 타고 떠난 소속 스님 40명이 풍랑에 전원 익사하는 큰 사고를 겪기도 하였다. 그뿐이랴, 한국전쟁 때 빨치산을 숨겨주었다고 해서 주지 스님이 총살을 당하며 폐사(閉寺)의 갈림길에 섰으니 이 땅의 아픔을 그대로 갈무리한 절이나 다름없다.

이 문의 오른쪽에 미황사 주차장이 있다. 이곳에 주차를 하고 문을 지나 조금 오르면 달마고도의 시작점이 있다.



이 문에서 왼쪽을 보면 달마고도 안내문과 말뚝이 보인다. 이곳이 달마고도의 시작점이다. 절은 내려올 때 둘러봐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그래도 난 절에 들어갔다가 올라가기로 했다.




미황사는 해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489m) 서쪽, 한반도의 가장 남쪽 끝에 자리한 사찰이다.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의조화상이 창건했다. 고려시대에는 남송의 달관(達官), 군자(君子) 등이 미황사에 내왕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전기까지도 사세를 유지해 온 것으로 보인다.
1754년(영조30년)에 기록된 <미황사법당중수상량문>에 보면 미황사는 임진왜란 이후 세 차례 중건이 있었다고 한다. 첫번째는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어 다음 해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1601년에 마무리되었고, 이때의 불사는 만선스님이 담당했다. 그 뒤 1658년(효종 9년)에서 1660년(현종 1년)까지 두 번째 중창이 이루어졌으며, 이때는 성간(省侃), 수신(脩信)스님이 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1751년(영조27년)에 덕수(德修)스님에 의해 시작되어 상량문이 씌어진 1754년에 마무리 되었다. 이때의 불사는 동서 양쪽에 금고각(金鼓閣)을 세우고, 대웅전과 나한전을 중수하고 기와를 번와하는 대규모 불사였다. 이에 필요한 목재를 1751년에는 보길도에서 실어 왔으며, 대둔사와 인근 마을에서 공사를 도왔다고 한다.

퇴락한 지 100년이 흐른 1989년 즈음, 지운스님과 현공, 금강스님이 주인 없이 비어있던 미황사에 들어서면서 퇴락한 법당을 일으켜 세우고 잡초 무성한 마당을 쓸기도 하면서 살기 시작했다. 흔적만 남아 있던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 달마전, 부도암 등이 하나하나 복원되었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자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땅끝 마을 아름다운 절, 미황사’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단청이 벗겨진 대웅보전은 그 사이 보물 947호로 지정되었고, 내부의 화려한 벽화와 기둥 아래 주초석에 새겨진 게와 물고기와 거북이는 이곳의 특징이 되었다. 응진당(보물 1183호)과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 달마전, 세심당, 후원, 향적전, 안심료, 자하루, 감로다실 등이 세월의 흐름 속에 고즈넉히 자리잡고 있다.


달마고도의 장점은 원점회귀라는 것이다. 다른 둘레길과 다르게 원점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종착점에서 대중교통을 찾는 불편함이 없다.
따라서 이 미황사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달마고도는 최근의 길 열풍에 따라 급조한 길도, 편의를 위해 중장비를 투입하여 고르게 다듬고 깎아내린 길도 아니다.
미황사의 주지 금강스님 (폐허나 다름없는 미황사를 1989년부터 2년간 직접 지게에 돌을 지고 날라 고치며 다시 생명을 불어넣은 스님이기도 하다. 2000년부터 17년째 주지를 맡고 있다.)이 길을 구상, 일체의 중장비를 불허하고 손수레와 호미, 삽, 지게를 이용, 40여 명의 일손과 함께 250일에 걸쳐 만들어낸 ‘원시적’이자 ‘자연의 훼손을 최소화한’ 길이다.
그렇게 기존의 9km의 옛길에 새로이 9km를 이어붙여 총 18km의 둘레길이 탄생하였다.



































이 지점에서 선택을 잘해야 한다. 위로 가면 도솔암으로 가는 길이다.
약간은 가로질러 갈 수 있으나 이미 10km의 산 길을 걸은지라 힘이 부칠 수도 있다. 도솔암 300m라고 하지만 급경사에 한여름이다. 자칫하면 곡소리가 날 수도 있다. 차라리 달마고도를 완주하고 나중에 차로 도솔함 근처까지 갈 수 있으니 그 길을 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여기까지와서 도솔암을 지나칠 수 없다는 강한 유혹은 어쩔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 기도 도량으로 나와있는 도솔암은 미황사의 말사이건만 미황사를 창건한 의조 스님이 미황사 창건 전에 수행정진하였던 암자라 한다.
정유재란 당시 전화로 불에 타 터만 남았던 이 암자는 달마산의 정상부에 있어 재건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곳으로 여러번의 복원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암자이다.
그러나 2002년 6월, 오대산 월정사의 법조 스님이 3일간 연달아 꿈을 꾸고 찾아와 도솔암 터에 올라 32일 만에 단청까지 복원, 중창했다.
이렇게 복원된 도솔암은 달마산 정상부의 수려한 풍경과 어우러져 아침저녁으로 해가 뜨고 질 때마다 환상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암자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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