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여행을 생각하면 우선은 죽녹원과 메타세쿼이아 길이 연상될 것이다.
그리고 소쇄원 정도~
물론 맞다. 그러나 조금 여유를 가지면 그 안에서 쉼을 발견하게 된다.
그저 유명하다니까 죽녹원을 쭈~욱 둘러보고 휙하니 차로 메타세쿼이아 길을 탐방해도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러기에는 담양과 이 죽녹원이 지닌 가치가 생각보다 크다.
다시 말해 그냥 가성비 좋은 여행을 했으면 하는 것이다.
왜? 돈 아까우니까~
담양도 관광지이며 움직이면 돈이고 가는 곳마다 떡~하니 입장료가 있다.
그러니까 죽녹원이든 메타세쿼이아 길이든 그 안에서 가성비 좋은 여행을 했으면 하는 것이다.
우선 죽녹원에서는 빨리 걸을 필요도 없으며 재촉할 필요가 없다.
곳곳에 벤치와 정자가 있어 시원하게 대나무 숲에서 대나무의 숨소리를 한가득 느껴보는 것만도 본전은 할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정자에 앉아 쉬고 놀고 함께한 사람이 있다면 못다 한 이야기도 죽림욕을 즐기는 것도 담양 여행의 새로운 맛이 아닐까 한다.
죽림욕을 즐길 수 있는 2.4㎞의 산책로는 운수대통길, 죽마고우길, 사랑이 변치 않는 길 등 8가지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나무는 사시사철 푸르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 모두 그 나름의 매력과 신비로움을 가지고 있다.
대나무 숲은 외부 온도보다 4~ 7℃정도 낮아 산소발생량이 높고 음이온 발생량이 1,200~ 1,700개로 일반 숲보다 10배가량 많다고 알려져 있다.
산소발생량이 높아 청량감을 느끼게 해 주고 음이온은 혈액을 맑게 해 주고 저항력을 증가시켜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는 효능이 있다고 하니 일상생활에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데 최적의 장소이라 하니 이만한 쉼터가 또 있을까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죽녹원 하면 대나무만 연상하는데 죽녹원이 지닌 진짜 매력은 개인적으로 후문 쪽에 있는 인근에 산재한 정자들을 복원해 놓은 곳이다.
이처럼 각지에 흩어져 있는 정자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즐거움이야 말로 죽녹원이 지닌 진짜 매력이 아닌가 한다.
각 건물의 특징이며 그 고유의 건물이 지닌 역사적 배경과 그 주인들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네 조상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정자를 갖는 것은 꿈도 못 꿨을 것이지만 말이다.
이러한 뒷 이야기는 곧바로 올릴 소쇄원 편에서 다룰까 한다.
그러니 시간을 가지고 여유 있게 각 정자마다 들려보고 둘러보며 마루에도 좀 앉아보며 여유를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죽녹원을 나와서는 오른쪽으로 향교교를 건너면 오른쪽으로는 국수거리가 있고 왼쪽 길을 건너면 관방제림 길이 나온다.
관방제림 길은 쭈~욱 걷다 보면 어느덧 메타세쿼이아 길에 이른다.
관방제림 길이 대략 2km 정도 되니 걸을만하다. 물론 오랜 세월 지켜온 거목들이 시원한 그늘과 함께 반길 것이며 그 길을 맛이 또한 남다르다.
뒤에 관방제림 길을 따로 다룰 것이지만 그렇게 관방제림 길을 통과하여 메타세쿼이아 길까지 다녀오는 것도 나름 괜찮다.
그래서 담양 여행을 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주차는 죽녹원 후문 쪽에 있지만 정문 쪽에도 영산강변 주차장을 많이 이용하던데 난 죽녹원 앞에 담양 종합체육관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물론 무료이다.
그리고 죽녹원의 입장료는 3000원이며 죽녹원 안에 있는 이이남 아트센터의 입장료는 1000원인데 7월 한 달은 무료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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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녹원은 2003년 5월에 조성하여 약 31만㎡의 공간에 울창한 대나무 숲과 가사문학의 산실인 담양의 정자문화 등을 볼 수 있는 시가문화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죽녹원은 전망대, 쉼터, 정자, 다양한 조형물을 비롯 영화·CF촬영지와 다양한 생태문화관광 시설을 갖추고 있다.



본래 그냥 야산에 있던 대나무 숲이었지만 2003년 5월에 담양군에서 숲에 공원을 조성해 개원하였다. 넓이는 약 16만㎡의 울창한 대숲이 펼쳐져 있다. 내부에는 총 2.2km의 산책로가 있으며, 죽녹원 8길, 판소리 전수관, 송강 정철 유적지, 죽향 체험마을 등이 있다.

도심지라 접근성이 좋다. 넓은 대숲을 볼 수 있는 드문 곳이어서 대나무를 테마로 한 관광지 겸 휴양지로 인기가 있다. 겨울에도 운치 있는 모습을 즐길 수 있다.







이이남 작가는 1969년 담양 봉산면 출생으로 제2의 백남준이라 불리며 옛 명화들을 현대적 감성으로 재해석 디지털화하는 미디어 아티스트이다.
이이남아트센터에는 담양의 대나무를 아름다운 영상으로 표현한 작품과 김홍도의 묵죽도나 조익의 청죽도, 유명 팝아티스트 작가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우는 여인, 앤디워홀의 신메릴린 먼로 등 동·서양 거장들의 작품을 현대적 감성으로 재해석되어 디지털 화면에서 만나볼 수 있고 작품마다 짧게는 3분, 길게는 20분 정도의 시간을 갖고 지켜봐야 한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여름철 붉은 백일홍 물결로 유명한 명옥헌 원림 내정자로서 위아래 연못을 둘러싼 백일홍과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적송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자의 주인 명곡 오희도(吳希道 1583~1623)는 조선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세 번을 방문하였을 정도로 인품과 학식이 뛰어났다.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가 마치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소리’와 같다 하여 명옥헌이라 하였다.


명옥헌은 못 남쪽에 위치한 언덕 아래 못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북향으로 서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한가운데에 한 칸 넓이의 방을 꾸며 놓았다.
건물 동편에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으며 이 물을 끌어들여 건물 위에 또 하나의 방지를 꾸며 놓았다. 못 가운데에는 자연석으로 된 섬이 있고, 못 밑에는 ㄱ자형으로 열을 지어 배롱나무를 심어 놓았다.
이 정원은 오희도(吳希道)가 외가가 있는 이곳으로 옮겨와 살게 되면서 비롯된 것으로, 그는 광해군 치하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피하여 조용히 지내기 위하여 집 옆에 ‘망재(忘齋)’라는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틈틈이 장계골에서 자연을 즐겼다고 한다.
그가 별세한 뒤 그의 아들 오이정(吳以井)이 아버지가 평소 자연을 즐기던 호봉산(瓠峯山) 기슭의 계류가에 터를 잡아 명옥헌을 짓고, 아래위에 못을 파 꽃나무를 심어 가꾼 것이 오늘날 전하는 명옥헌 정원의 시작이라고 한다.
정철(鄭澈)의 넷째 아들 정홍명(鄭弘溟)이 지은 「명옥헌기 鳴玉軒記」가 전하고 있으며, 계류가 바위에는 송시열(宋時烈)이 썼다고 하는 ‘鳴玉軒癸酉(명옥헌계유)’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명옥헌 뒤 언덕에는 1825년(순조 25)에 창건되고 1868년(고종 5)에 철폐된 도장사(道藏祠)터가 있는데, 현재 명옥헌에는 명옥헌이라 새겨진 현판은 없어졌고 ‘道藏祠’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철이 선조 17년(1584) 대사헌 재직 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물러난 뒤 창평으로 돌아와 4년 동안 은거 생활을 하며 머물렀던 초막을 <죽록정(竹綠亭)>이라 하였다. 지금의 정자는 1770년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웠으며, 이때 이름을 송강정이라 고쳤다. 송강 정철은 임금에 버림받은 자신의 심정을 님과 이별한 여인의 심정으로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을 지었다.
둘레에는 노송과 참대가 무성하고 앞에는 평야, 뒤에는 증암천이 펼쳐져 있으며, 멀리 보이는 무등산의 그림자가 수려하다. 현재 정자 옆에는 그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 전라남도 기념물 제1-2호. 조선시대의 문인 정철(鄭澈)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으로, 식영정(息影亭)·환벽당(環碧堂)과 더불어 정송강유적(鄭松江遺蹟)으로 불린다.
정철이 동인(東人)들의 압박에 못 이겨 대사헌의 자리를 그만두고 하향하여 초막을 짓고 살던 곳이라고 하여 당시에는 이 초막을 죽록정(竹綠亭)이라 불렀다 한다.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정철을 기리기 위하여 1770년(영조 46)에 세운 것인데, 그때 이름을 송강정이라 하였다.
정자는 동남향으로 앉았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방이 꾸며져 있다. 지금도 정자의 정면에 ‘松江亭’이라고 새긴 편액이 있고, 측면 처마 밑에는 ‘竹綠亭’이라는 편액이 보인다.



새타령의 귀재 명창 이날치(李捺致), 창작판소리의 대가박동실(朴東實) 등 판소리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송당(又松堂)은 박동실이 청년시절 판소리를 익히고 배운 강학장소로서 길이보존하기 위해 이곳에 이전 복원하였다. 우송당은 국악 교육 전문 장소로서 남도민요, 판소리, 풍물 등 국악교육 프로그램을 운영 자율적인 국악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광풍각은 소쇄원의 하단에 있는 별당으로 건축된 정면 3칸, 측면 1칸 전 후퇴의 팔작지붕 한식기와 건물이다. 중안 1칸은 온돌방으로 뒷면에는 90cm 높이의 함실아궁이가 있다. 방의 문턱에는 머름대를 구성하였으며, 문은 삼분 합의 들어 열개 문으로 되어 있다. 막돌허튼층의 낮은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으며, 주두와 소로, 장혀, 굴도리로 결구된 평 5량 가구이다. 천장은 연등천장과 우물천장을 혼합하였는데 서까래가 모이는 부분은 눈썹 천장으로 되어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서까래는 선자 서까래이다.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기묘사화(1519)로 인해 은사인 정암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자 출세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살기 위해 고향에 꾸민 별서정원이다. 광풍각은 ‘비겐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으로 손님을 위한 사랑방 역할을 하였다.



나주목사 등 13개의 고을 지방관을 역임한 김윤제(金允悌:1501 - 1572)가 낙향하여 창건하고 육영(育英)에 힘쓰던 곳이다. 환벽(環璧)이란 뜻 그대로 푸르름이 고리를 두르듯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루고, 시가문학과 관련된 국문학사적인 인문학적 가치가 매우 큰 곳이며, 별서원림으로서 가치가 우수한 호남의 대표적인 누정문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그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철(鄭徹)과 김성원(金成遠) 등이 있다. 특히, 정철은 16세 때부터 27세에 관계에 나갈 때까지 환벽당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환벽당은 환벽(環璧)이란 뜻 그대로 푸르름이 고리를 두르듯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루고, 시가문학과 관련된 국문학사적인 인문학적 가치가 매우 큰 곳이며, 별서원림으로서 가치가 우수한 호남의 대표적인 누정문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송시열이 판액을 썼으며 임억령의 시가 현판에 걸려 있다. 사실 이 환벽당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은데 나중에 환벽당을 탐방했을때 다시 다룰까 한다.


담양은 조선 중기 시조(時調), 가사(歌辭) 등의 국문학을 비롯하여 한시(漢詩) 등이 무수히 창작된 시가문학의 산실이다. 시비공원에는 면앙 송순, 하서 김인후,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등 조선 중기 당시 쟁쟁한 인물들의 주요 작품을 현재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서예작가들이 씀으로써 다양한 서체를 감상할 수 있다.

이 시에서도 보듯 님은 당연히 임금이다. 대부분의 시는 임금에 대한 자신의 변함없는 충성과 하루빨리 자신을 불러 달라는 기대를 품고 있다.




식영정은 1560년(명종15) 서하당 김성원(金成遠)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에게 지어드린 정자다. 정면2칸, 측면3칸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우뚝하게 솟아 있는 노송과 한 여름 붉은 꽃의 무리가 온통 나무를 뒤덮는 배롱나무가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정자다. 식영정이란 정자의 이름은 〈장자〉제물편의 “자기의 그림자가 두려워 도망치다 죽은 바보”이야기에서 가져왔다. 여기서 그림자는 인간의 욕망을 의미하며, 누구나 세속을 벗어나지 않고는 이를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옛날 선인들은 세속을 떠나 있는 그곳, 그림자도 쉬는 그곳을 “식영(息影)세계”라 했다.

식영정을 지은 김성원은 정철과 함께 김윤제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로서, 유년에 창계천 건너 작은 동산 위의 환벽당(環碧堂)에서 함께 공부하였다.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은 성산의 4계절을 아름답게 표현한 시가로서, 가사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가사(歌辭)다. 가사는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 초기에 걸쳐 생겨난 우리 문학의 한 형식으로 시조와 함께 양반, 평민, 부녀자 등 다양한 계층에서 부른 노래를 일컫는다. 시가와 산문의 중간 형식인 가사문학은 특히 이곳 식영정을 중심으로 하는 담양지방의 정자원림을 바탕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식영정은 환벽당, 소쇄원과 함께 일동(一洞)의 삼승(三勝)이라 일컬어졌다. 여기서 일동의 동(洞)은 동천(洞天)을 의미하며, 동천이란 산수가 빼어난 아름다운 경승지를 대상으로 마치 신선이 살고 있는 선계와 같은 곳 상징하는 지명이다. 식영정을 포함한 이 정자원림들은 이러한 동천의 경승 중에서 특별히 수려한 장소 세 곳을 선정하였다고 하여 일동삼승이라 한 것이다.







면앙정은 중종 28년(1533)에 면앙정 송순(1493∼1582)선생이 관직을 떠나 선비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내던 정자로, 퇴계 이황을 비롯한 유명인사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던 곳이다.
조선 중기 문신인 송순 선생은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말년에는 학문에 전념하면서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처음 있던 정자는 선조 30년(1597)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어, 효종 5년(1654)에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
정자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면앙정은 간소한 양식의 건물이기는 하지만, 역사적 가치가 커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신(侍臣)이었던 송순(宋純)이 만년에 벼슬을 떠나 후학들을 가르치며 한가롭게 여생을 지냈던 곳이다.
송순은 41세가 되던 1533년(중종 28)에 잠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이 정자를 짓고, 「면앙정삼언가(俛仰亭三言歌)」를 지어 정자이름과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 한다. 그러나 그 정자는 1597년(선조 30) 임진왜란으로 파괴되고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1654년(효종 5)에 중건한 것이다.
건물은 동남향하고 있으며, 한가운데에 한 칸 넓이의 방이 꾸며져 있다. 기둥은 방주(方柱)를 사용하였으며 주두(柱頭)조차 생략되고, 처마도 부연(浮椽)이 없는 간소한 건물이다. 주위에는 상수리나무·굴참나무·밤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그 속에는 아름드리 나무도 간간이 서 있다. 주된 전망은 후면에 해당하는 서북쪽으로 평야 너머로 연산(連山)이 보이고 서남쪽에는 맑은 냇물이 흐르고 있다.
면앙정의 풍류운치는 당대에 명사들에게 흠모되었는데, 송순이 지은 잡가(雜歌) 2편에서 그 풍취를 살펴볼 수 있으며, 이 글은 또한 『청구영언』 등 가집(歌集)에 무명작으로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십년을 경영해야 초당삼간 지어내니 반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드릴대 업스니 돌려두고 보리라.” 이 노래는 만년에 이 정자를 두고 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 건물은 간소한 양식의 건물이기는 하지만 역사적 의의가 크기에 1972년에 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중수 때에 원형이 많이 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정자는 소쇄원, 식영정 등 담양, 창평 일대에 선비들이 세운 여러 정자 중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가사문학으로 대표되는 이 지역 양반문화를 선도했던 곳이다. 담양읍을 지나 장성군으로 흘러드는 영산강 옆 작은 동산에 정자가 세워졌다. 정자 마루에 걸터앉으면 영산강과 담양의 넓은 평야, 멀리 노령산맥은 높은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자 건물은 앞면3칸, 옆면 2칸의 크지 않은 규모로 가운데 온돌방을 두고 있는 전형적인 담양지역 정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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