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河回里)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에 있는 민속마을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들은 보물 2점, 국가민속문화재 9점 등을 포함하여 11점이고 이밖에 국보 2점이 있다. 2010년 7월 31일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의 제34차 회의에서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확정되었다.
풍산 류씨 집안의 발상지이며 그들의 자손들이 여기에 머물러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서애 류성룡과 겸암 류운룡이 이 곳에서 태어났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강거의 제일은 평양이요, 계승의 제일은 하회'라고 극찬하였다. -다음백과 위키백과-
자동차를 이용하는 경우 하회마을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하회마을 장터를 통과하여 마을로 들어가는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주차를 하고 매표소로 가려면 이 장터를 통과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지극히 상업적 논리가 작용하는 분위기에 그닥 바람직하게 보이지도 않으며 마을에 대한 인상을 구기는데 입구부터 한 몫하는 듯하다.
대중교통은 안동역과 안동터미널을 경유하는 246번 버스로 하회마을 장터까지 갈 수 있다. 주민이 아닌 이상 관광객은 역시나 하회마을 장터에서 내려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마을로 가는 무료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하회마을에서 나갈 때는 마을 안 정류장에서 246번을 타도 된다.
마을 입장료는 성인이 5000원, 청소년 군인이 2500원, 어린이가 1500원으로 싸지 않으며 다행히 주차요금은 없다.
또한 마을 입구에서는 전동차를 대여하는데 어린이나 어른을 동반했다면 이용하는 것을 말리고 싶진 않다. 특히 여름에 느긋하게 좀 걷겠다며 마을을 돌아다니다간 쪄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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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 류씨는 이곳에 600년이라는 시간 동안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잡고 있으며, 이 마을 주민의 70%가 풍산 류씨이다.
류씨가 터를 잡기 전에는 허씨와 안씨가 먼저 살고 있었는데, 하회탈의 제작자가 허도령이라는 말이 구전되고 있으며, 강건너 광덕동의 건짓골에는 허정승의 묘가 있어 지금도 해마다 류씨들이 벌초를 하고 있다고 한다. 1642년의 동원록(洞員錄)에는 류씨 이외에도 극히 적은 가구의 허씨와 안씨가 함께 기재되어 있으며,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라는 말이 전해져 온다고 한다.





그래도 필수로 부용대에 올라 하회마을의 전경은 꼭 보길 권한다.




하회마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하동고택(河東古宅)」이라 부른다. 지금의 예천군 용궁 현감을 지낸 류교목(柳敎睦)공이 조선 헌종2년(1836년)에 세웠고, 1953년 현재 소유자의 부친이 인수하였다. 전체 24칸의 활궁(弓)자형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한 채로 이어져 있는 민도리 집이다.
특이한 점은 대문채는 초가집이지만 사랑채와 안채 등은 기와집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건축적 특징은 창건자가 후손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한 차례 융성하면 한 차례는 쇠락하므로 욕심을 내어 전부를 채우려 말고, 부족한 가운데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이라 한다. 또 안채 가운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모두 열린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어 가사를 담당하는 부녀자들이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하회마을에서 처음 만나는 고택인데 문이 굳게 잠겨 들어가 보질 못했다. 적어도 관람 안내지도에 고택이라고 명시되어 있고 입장료를 받았으니 문을 열어놔야 한다고 생각한다.



충효당과 더불어 하회의 남쪽을 대표하는 남촌댁(당호 염행당)은 정종21년 지은 99칸의 건물로서 하회마을 남쪽 사대부의 가옥을 대표하였으나, 1954년 화재로 안채와 사랑채가 소실되고, 현재는 대문간채와 별당, 사당만 남아 있다. 많은 도서와 진귀한 골동품들도 그때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건물의 특징은 문간채는 솟을대문을 두었으며, 안채와 사랑채의 구들 연기를 하나의 큰 굴뚝으로 뽑아낼 정도로 사대부집 가운데에서도 훌륭한 건물이었다. 별당채는 별도로 일곽을 둘러 조성하여 후원 별당의 아취(雅趣)가 느껴진다. 벽체의 화방 담은 화경당(북촌)의 화방담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가식이나 과장 없이 천연덕스럽게 장식하였는데, 기와쪽을 이용하여 석쇠 무늬를 바탕으로 희(囍)자와 수(壽)자를 만들었다.











당호는 양오당(養吾堂)이며, 주일재(主一齎)는 류후장(柳後章 1650~1706)의 아호이다. 이 집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증손인 류만하 공이 충효당에서 분가할 때 지은 집으로 그의 아들인 류후장 공이 증축하였다. 마당에 들어서면 사랑채가 정면에 보이고, 좌측에는 작은 담을 쌓아 놓았는데, 이것을 내외담이라 한다. 안채로 통하는 문 앞에 내외담을 쌓아둠으로써 문을 열어도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게 하였다. 주일재는 사랑채, 안채, 사당, 광채(곡식 등을 넣어 두는 곳)로 구성되어 있다.












양진당은 겸암 류운룡(1539∼1601)의 집으로 매우 오래된 풍산 류씨 종가이다. 입암 류중영(1515∼1573)의 호를 빌어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류중영은 류운룡의 아버지이다. 양진당은 류운룡의 6대손 류영(1687∼1761)의 어릴 때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오른쪽 3칸은 대청, 왼쪽 1칸은 온돌방으로 바깥 주위에 툇마루와 난간을 둘러 마치 누(樓)집과 같은 인상을 주며 대청에는 문을 달아 3칸 모두 열 수 있게 하였다. 건물 안쪽 천장은 지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꾸몄고 한석봉이 쓴 ‘양진당(養眞堂)’이란 당호와 함께 여러 현판들이 걸려 있다. 건물 안쪽 일부 재료를 만든 수법이 뛰어나고, 일반 주택으로는 제법 규모가 큰 조선시대 별당건축물 중 하나이다.

우뚝 솟은 솟을대문과 장엄한 분위기가 감도는 「양진당(養眞堂)」은 풍산 류(柳)씨의 대종가(大宗家)이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입암고택(立巖古宅)」현판은 겸암 류운룡(柳雲龍, 1539~1573)선생의 부친인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 1515~1573) 선생을 지칭한다. 당호인「양진당(養眞堂)」은 겸암 선생의 6대 자손인 류영(柳泳, 1687~1761)공의 아호(雅號)에서 유래하였다.
입암(立巖) 류중영 선생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 부르며, 양진당(養眞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랑채는 고려 건축양식이며, 안채는 조선 건축양식으로서 고려양식과 공존하는 고택이다.

풍산류씨의 하회마을 입향조(入鄕祖)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 공(公)이 13세기 입향 당시에 처음 자리잡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 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하여, 고려말 건축양식과 조선중기 건축양식이 섞여 있다. 하회마을에서는 드물게 정남향(正南向)의 집이며 99칸으로 전해오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


문간채와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고, 口자 형의 안채와 그 북쪽의 사랑채를 一자 형으로 배치하였으며, 오른편 북쪽에는 2개의 사당(祠堂)이 있는데, 정면의 큰 사당은 입암 류중영 선생의 불천위(不遷位: 공신이나 대학자 등의 탁월한 자에게만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말하며, 불천위로 인정되면 4대조까지 올리는 제사의 관행을 깨고 후손 대대로 제사를 올린다.) 사당이며, 작은 사당은 겸암 류운룡 선생의 불천위 사당이다.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의 집이다.


충효당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손자인 졸재 류원지(1598∼1674)가 짓고, 증손자인 눌재 류의하(1616∼1698)가 확장 수리한 것이다. 행랑채는 8대손 일우 류상조(1763∼1838)가 지은 건물로 대문과 방,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을 앞면으로 긴 행랑채를 두고 안쪽으로 ㅁ자 모양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가 연이어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왼쪽에서부터 사랑방, 대청마루, 방,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면서 집안 살림을 돌보던 공간으로 동북쪽에 부엌을 두고 ㄱ자로 꺾여서 안방, 대청, 건넌방이 있다. 또한 건넌방 앞에는 마루와 2칸의 온돌방, 부엌이 있으며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 대청에 걸려 있는 ‘충효당(忠孝堂)’이라고 쓴 현판은 명필가였던 허목(1595∼1682)이 쓴 것이라고 한다.
비교적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서애종택’이라고 부르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서애 생존시의 집은 아니다. 서애는 현재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집에서 소년기와 만년을 보냈다. 선생이 30여년 몸담은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낙향했을 당시의 집은 극히 단출했다고 한다. 선생은 64세 때인 1605년 9월에 하회마을이 수해를 당해 풍산읍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1607년 5월 6일 삼간초옥 농환재에서 타계했다.

지금의 충효당은 서애 사후에 지은 집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선생이 초가삼간에서 돌아가신 후, 선생의 문하생과 사림이 장손(長孫) 졸재(拙齋) 원지(元之)공을 도와서 지었고, 증손자 의하(宜河)공이 확장한 조선중엽의 전형적 사대부(士大夫) 집으로서,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52칸이 남아있다.
충효당 내에는 영모각이 별도로 건립되어 서애선생의 귀중한 저서와 유품 등이 전시되고 있으며, 바깥마당에 엘리자베스2세의 방문기념식수가 있다.


임진왜란때 영의정으로서 국난을 극복한 서애 류성룡 선생의 유물을 보존,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충효당 사랑채의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1966년 6월에 개관하였으며 1977년 6월에 한옥으로 신축하였다.
명칭은 서애 선생이 쓴 ‘영모록(永慕錄)’에서 따왔다. 풍산류씨 세계(世系)를 집록한 책으로, ‘영모’는 오래도록 그리워하고 기다린다는 뜻이다. 현판 글씨는 박정희의 친필이다.
국보132호-징비록(懲毖錄)을 비롯하여, 보물160호-류성룡종손가문적(柳成龍宗孫家文籍) 11종 22점과 보물460호-류성룡종손가유물(柳成龍宗孫家遺物) 가운데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보물160호는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로 임금을 호종하면서 군무를 총괄하던 서애 선생이 직접 손으로 쓴 기록과 임진왜란과 관련되는 문건과 자료들이 일괄 지정된 것이다. 보물460호는 류성룡 선생이 직접 쓴 것과 선생의 어머니에 관한 곤문기, 그리고 조정에서 선생에게 내린 여러 문서들 등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류성룡은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의 학설에 따라 이기론(理氣論)을 펼치고 양명학을 비판했으며 이황의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좇아 기(氣)는 이(理)가 아니면 생(生)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여 기보다 앞서 있는 실체로서의 이를 규정했다.
류성룡은 양명학의 핵심적 이론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과 치양지설(致良知說)이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지나치게 곧아진(矯枉而過直)’ 폐단에 빠진 것으로 불교의 학설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하나에 치중됨이 없이 병진해야 한다는 지행병진설(知行竝進說)을 주장했다.
그가 남긴 저작 중 징비록(懲毖錄)은 이러한 ‘알면 행하여야한다’는 지행병진설이 잘 반영된 책으로 알려 있다. 참혹한 국난의 하나였던 임진왜란에서의 아픈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 그러한 수난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하기 위하여 남긴 저술이다. 임진왜란의 전모를 정확하고 생생하게 비춰주고 있어 임진왜란에 관한 많은 기록 가운데서도 귀중한 사료(史料)로 평가되고 있다.



국가 민속문화재 제87호로 작천고택 또는 류시주 가옥이라고 부른다. 원래 작천 류도관의 호를 따서 작천고택이라고 불렀는데, 현재의 집주인인 류시주의 이름을 따서 부르기도 한다. 조선중기의 건축양식을 다랐으며, 1934년 대홍수로 1채가 유실되고 현재는 일자형의 안채만 남아있다. 사랑방에서 안방으로 이어지는 앞마당에는 작은 토담을 쌓아 사랑방 손님과 안채의 부녀자가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만든 것이 재미있는 특징이다.


2006년 11월 27일 천연기념물 제473호로 지정되었다. 안동 하회마을(중요민속마을 122호) 북서쪽 강변을 따라 펼쳐진 넓은 모래 퇴적층에 있는 소나무숲이다.
조선 선조 때 서애(西厓) 류성룡의 형인 겸암(謙菴) 류운용(1539~1601)이 강 건너편 바위 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만송정(萬松亭)이라 한다. 1983년에 세운 만송정비(萬松亭碑)에는 이 솔숲의 내력과 함께, 현재의 숲이 1906년에 다시 심은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숲에는 수령 90~150년 된 소나무 100여 그루와 마을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심는 작은 소나무들이 함께 자란다. 이 소나무들의 크기는 나무높이 16~18m·가슴높이 줄기지름 30~70㎝ 정도이다. 이 숲은 여름에는 홍수 때 수해를 막아주고 겨울에는 세찬 북서풍을 막아주며, 마을사람들의 휴식공간 혹은 문화공간으로 활용된다. 보호면적은 47만 6,430㎡이다.


서애 선생이 선조 9년 (1576년)에 잠시 조정에서 물러나 있을 때 만송정이 한눈에 들어오는 마을 북쪽에 짓고 학문을 했던 곳으로 은퇴한 후에는 정양하던 곳이기도 하다. 원래 원지(遠志)는 한약재로 심기(心氣)를 다스려 정신의 혼탁과 번민을 풀어주는 소초(小草)를 말하는데, 하회마을의 안산이기도 한 원지산(遠志山)에서 자생하는 풀이다.
따라서 원지라는 당호와 북향하고 있는 두 건물을 생각하면 북녘에 있는 임금님을 사모하는 선비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이 건물은 정조·순조 조에 초계문신과 예조·호조 참판을 역임한 학서 류이좌(鶴棲 柳台佐)의 선고(先考)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류사춘(柳師春)공이 정조 21년(1797)에 작은 사랑과 좌우익랑을 처음 건립하였다. 안채, 큰사랑, 대문간, 사당은 경상도도사를 지낸 그의 증손 석호 류도성(柳道性)이 철종 13년(1862)에 건립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안채, 사랑채, 큰 사랑채, 대문간채, 사당 등을 두루 갖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하회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이다.
화경당은 마을북쪽 99칸 집으로 불려졌으며, 사랑채, 안채, 별당채, 사당, 대문간채를 두루 갖춘 사대부 집이다.



부용대에서는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으니 꼭 올라가 보길 권한다. 그닥 힘들지 않다.



이 정사는 서애 선생이 노후에 한가로이 지내면서 학문을 하기 위해 세우려 하였으나 재력이 없어 짓지 못했다. 그러던 중 승려 탄홍(誕弘)이 스스로 10년이나 시주를 모아 선조19년(1586)에 완성한 우정의 산물로 선생의 덕망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알려주는 증거이다.
처음에는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 했는데, 옥연(玉淵)은 정사 바로 앞에 흐르는 깊은 못의 색조가 마치 옥과 같이 맑고도 맑아서 서애 선생이 이름하였다. 선생은 이 집에서 임진왜란의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을 구상하고 저술하였다.
건물의 특징은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터가 넓고 평탄한 것과 사랑채와 별당채는 남향이며, 안채와 행랑채는 동향으로 지은 것이다.





화천서운은 병산서원과 마찬가지로 따로 다뤄야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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