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屛山書院)은 서애 류성룡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서원이다. 위치에서 알 수 있듯이 안동 하회마을 뒤의 화산 아래에 있다.
하회마을 입구에서 차로 들어가면 제법 들어간다. 들어가는 길이 비포장 길이라 차의 덜컹거림은 그렇다 해도 먼지가 장난이 아니다.
다녀온 뒤로는 차의 문을 열어 문틈에 쌓여있는 흙먼지를 반드시 물티슈로 닦아 내거나 세차를 권한다.
그보단 시간이 허락한다면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으로 가는 길이 따로 있다. 물론 트레킹을 겸하여 하회마을 뒤의 화산을 경유하는 길도 있지만 낙동강을 바라보며 션하게 옆길로 가는 방법을 적극 추천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안 가거나 간다고 하면 차로 들어갈 것 같다.
서원하면 안동의 도산서원이( https://jail6039.tistory.com/63 )대표적이고 인근의 소수서원 ( https://jail6039.tistory.com/112)정도가 알려지긴 했지만 병산서원엘 가보면 또 다른 한국 건축의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물론 도산서원이나 소수서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정갈함과 자연과의 조화라는 면에서 병산서원이 가진 독특한 매력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아직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찾는 사람도 많지 않아 그 고요함과 한적함을 덤으로 안겨주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서원을 유유자적하며 둘러보는 맛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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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은 1978년 3월 31일 대한민국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시대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던,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을 1572년 선조 5년 서애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고려 시대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을 풍산현에서 1572년 선조 5년 서애 류성룡이 안동으로 옮겨오면서부터 병산 서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607년 서애가 타계하자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13년 광해군 5년에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1614년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621년 광해군 12년에 유림의 공론에 따라 퇴계 선생을 모시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 그 뒤 1629년 인조 9년에 별도의 위패를 마련하여 존덕사에 모셨으며, 그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863년 철종 14년에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유림 선현을 모시고,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 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보호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졌으며 강당은 1921년에, 사당은 1937년 각각 다시 지어졌다. 매년 3월 중정과 9월 중정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병산서원의 정문은 ‘복례문’이다.
서원의 정문은 삼문(三門)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병산서원의 솟을삼문은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고, 좌우로는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다. ‘복례’라는 이름은 논어 <克己復禮爲仁>에서 유래한다. 이는 공자의 가르침을 함축한 경구(警句)로서,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는 유학의 자기 절제의 정신을 표현해 놓은 것이다. 원래는 지금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입교당 중건일기(1921)」에 의하면 서원의 측면인 만대루 동편에 있었던 것을 이건한 것이라 한다. 병산의 험한 형세를 피하고자 했던 풍수원리가 담겨있었다.



만대루는 병산서원에서 가장 알려진 건물로서 건축과 조형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지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이다. 팔작기와집에 홑처마로 된 이 웅장한 건물은 인공적인 서원건축과 자연사이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데 한국 서원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기둥 사이로 보이는 낙동강과 병산은 마치 7폭 병풍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만대’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한 구절인 '취병의만대 백곡회심유(翠屛宜晩對 白谷會深遊)'에서 따온 말이다.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 녘 마주 대할만하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이 즐기기 좋구나’. 병산서원을 대표하는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 물길을 끌어들여 만든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지금은 흙으로 메꾸어 놓아 그 형태만을 짐작할 수 있다. '천원지방'은 우리나라 전통 연못의 조성 원리로 조상들의 우주관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땅을 의미하는 네모진 연못 가운데,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두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수심양성(修心養性)을 근본으로 하여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서원 속의 정원'이다.


서원의 가장 핵심적인 건물인 강당이다. 원래의 명칭은 숭교당(崇敎堂)이었고 명륜당이라고도 불렸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이며,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으로 가구는 5량(樑)이다. 강학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의 명성재(明誠齋)와 서쪽의 경의재(敬義齋), 세 부분으로 나뉜다. 양쪽 방에는 온돌을 들이고 중앙의 강학당은 3칸의 대청으로 개방하였다. 툇마루가 마련된 명성재에는 서원의 원장(院長)이 기거했으며, 서쪽의 경의재는 이른바 교무실에 해당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과 서쪽에서 마주하고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두 건물은 똑같이 크고 작은 2개의 방과 가운데 1칸 마루로 구성되었다. 강당 쪽의 작은 방은 학생회장 격인 유사(有司)의 독방이거나 서적을 보관하는 장서실이다. 2칸 규모의 큰 방은 학생들이 단체로 기거하는 방이었다. 좌고우저(左高右低)의 원리를 쫓아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하였다.







‘만대(晩對)’라는 명칭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에서 따온 말인데, 그 말을 풀어보면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 녘 마주 대할 만 하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러 곳 모여 그윽이 즐기며 좋구나.’ 만대루가 아름다운 풍경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긴 하다. 병산서원은 아름다운 절경과 함께 공부하긴 좋은 장소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서원의 내삼문(內三門)에 해당하며,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출입하였다. 정면 3칸의 솟을삼문으로 사당의 출입문답게 붉은 색칠을 하여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고 있다.
향사례에서 신문 앞의 마당은 중요한 장소가 된다. 집례를 맡은 임원들은 신문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일반 학생들은 앞마당에서 참관하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서원건축은 교학(敎學)을 위한 강학 건물과 제향(祭享) 공간인 사당, 부속시설 이렇게 세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병산서원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 강학건물군 : 복례문, 만대루, 동서재, 입교당, 장판각
- 제향건물군 : 신문, 존덕사, 전사청
- 부속시설군 : 주소(庫直舍), 달팽이 뒷간, 광영지, 기타



전사청은 사당에 올릴 제수를 준비하는 곳으로 사당과 한 울타리 안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병산서원의 경우에는 전사청과 사당이 각각 독립된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는 아래쪽에 있는 주소(廚所) 건물과 중심축을 맞춤으로써 전사청으로 올라오는 제수를 마련하는 주소의 작업을 충실히 지휘 감독하기 위함이다. 존덕사의 오른편으로 자리하고 있다.

책을 인쇄할 때 쓰이는 목판(冊版)과 유물을 보관하던 곳으로, 입교당 후면 왼쪽으로 비켜서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도리가 없는 구조이며, 습기를 피하기 위해 정면에 모두 판문(板門)을 달았다. 화마(火魔)를 막기 위해서 다른 건물과 거리를 두어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하였다. 서원의 명문도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 가운데 하나는 바로 판본의 소장량이다. 따라서 책을 발간하는 목판은 서원의 소중한 재산이었다.



주소는 안동지방 고유의 뜰 집 형식인 ‘ㅁ’자형 건물군이다. 3칸 대청이 마당의 전면과 맞닿아 있고 양쪽으로 방을 들였다. 서원의 관리와 식사 준비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묘지기, 장무, 정지지기들이 거주하였고, 향사제 기간에는 참가자들을 위한 숙소로도 이용되었다. 이와 같은 용도의 건물을 고직사(庫直舍) 또는 교직사(校直舍)라고도 한다.

서원 밖 주소(廚所) 앞에 있는 화장실이다. 진흙 돌담의 시작 부분이 끝 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 놓았는데, 그 모양새에서 이름을 따왔다. 출입문을 달아 놓지 않아도 안의 사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한 구조이다. 지붕이 따로 없는 이 하늘 열린 '달팽이 뒷간'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들이 사용하던 것이다. 400여년 전 서원건물과 함께 지어졌으며, 옛 기록에는 대나무로 벽을 둘렀다고도 전해진다. 병산서원의 부속건물에 포함되어 사적 제 206호(1977년)로 지정되었다. 2003년 보수 작업이 이루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국 서원건축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만대루’는 휴식과 강학의 복합건물인데, 팔작지붕에 홑처마로 된 웅장한 건물이다. 팔작지붕이란 우리의 전통 가옥 중에서도 명륜당에 사용된 건축양식인데, 이 형상은 세계에서 가장 보기 드물다. 팔작지붕의 모양은 중앙의 용마루에서 직각으로 내림마루가 내려오다 다시 중간쯤에서 지붕의 코너 자리인 대각선으로 추녀마루가 뻗어나가는 신기한 선을 가졌다.
홑처마를 알려면 처마가 뭔지를 알아야 하는데, ‘처마’란 서까래가 기둥의 바깥으로 뻗은 것을 칭한다. 계절에 따라 실내로 유입되는 직사광선을 조절하기 위한 건축장치이며, 나무로 된 기둥 하부에 직접적으로 빗물이 닿아 썩는 것을 방지한다. 또한, 건물을 화려하게 치장하기도 한다. 보통 서까래만 가지고 처마를 만든 것을 홑처마라 한다. 만대루는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정면 7칸과 측면 2칸의 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둥 사이로 보이는 낙동강과 병산은 7폭 병풍을 보는 듯 한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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