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유적이라야 공주 무령왕릉과 공산성, 그리고 부여의 부소산성과 낙화암이 전부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어쩌면 익산의 백제 유적이라는 말에 좀 생소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 교육이 정치적 목적을 띄고 삼국의 신라를 중심으로 한 경주에 한정되어 집중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역사라는 것이 결국은 승자의 기록이며 고대사에 대한 기록이 신라계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의 《삼국유사》외에는 고대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익산의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은 신라중심의 삼국사관에서 벗어나 보다 폭넓고 다양하게 역사를 바라보고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믿는다.
아래를 클릭하면 함께 여행할 수 있답니다.
여기 갈래? (여행가자) | 밴드
그동안 고생했잖아요? 이제 여행도 좀 다니며 살아요. 우리 함께 맛집 찾아서 먹고 마시고 즐겁게 여행해요~ 제대로 여행하는법 알려드려요~
band.us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益山 王宮里 五層石塔)은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있는 고려의 백제계 오층석탑이다. 대한민국제2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체높이는 8.5m고, 1단의 기단 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미륵사지 앞에 있는 세계유산 표지석.
미륵사지 전시관.
해체 복원중인 미륵사지 그래도 내부에 들어가 볼 수 있다.
미륵사지 당간지주와 미륵사지모형.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益山 彌勒寺址 幢竿支柱)는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 절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 당간지주이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약 3.95미터이다. 현재 원위치에는 지주만이 약 90센티미터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으며, 별다른 장식이 없어서 오히려 단아한 느낌을 풍긴다.
미륵사(彌勒寺)는 백제 무왕때 왕비인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지어진 사찰이다. 2009년 전라북도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해체 중 내부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따르면 639년에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미륵사는 익산 용화산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좌우 능선 사이에 평지에 남향을 향하여 건립되었다.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는 현재 절터만 남아 있으며, 사적 제150호 익산미륵사지(益山彌勒寺址)로 지정되어 있다. 그곳에는 현재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서탑)과 복원된 동탑이 있고, 목탑이 있었던 터가 있으며,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236호) 외에 무왕과 왕비의 설화가 깃든 유물과 유적 등이 1966년에 발굴되었다.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백제 역사 유적지구(공주지역에 2곳(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 4곳(관북리유적 및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나성), 익산 2곳(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미륵사지))등 3개 지역 8곳이 세계 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하여 세계 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현재 서탑이 붕괴 위험 등으로 인하여 해체 복원 진행 중에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 권2 무왕조(武王條)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 무왕(재위: 600년 ~ 641년)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로 향하고 있었을 때 큰 연못 속에서 미륵삼불존(彌勒三尊佛)이 나타나자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소원하여 못을 메우고 탑과 법상, 미륵삼회전, 낭무(廊廡)의 건물을 건립하고 미륵사라 이름했다고 한다. 고려시대 922년에 혜거국사가 미륵사탑을 개탑했다는 기록이 혜거국사 비문에 나타나있고, 출토된 기와의 명문에는 980년, 1267년, 1317년, 1330년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조선시대인 16세기 신증동궁여지승람과 양곡집에 미륵사지석탑이 나타나고 있는데, 석탑의 규모가 '동방최대'라고 강조하고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益山 彌勒寺址 石塔)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에 있으며, 한국에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 무왕의 재위기간 중인 639년에 만들어진 이 석탑은 백제 석탑의 시원 형식(始原形式)이라고 불리며, 여러 면에서 한국 석탑 전체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해체 당시 높이는 14.2 m로,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되는 한국 최대의 석탑이다. 이 석탑은 목조 건물을 석재로 구현하여 백제의 목탑 모습을 잘 보여준다.
미륵사지 석탑이 세워진 시기는 백제 말 무왕(재위 600년 - 641년) 때인 639년이다. 한국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석탑이자 가장 큰 석탑으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이 석탑은 백제 석탑의 시원 형식(始原形式)이라고 불리며, 여러 면에서 한국 석탑 전체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화강암을 사용한 이 석탑은 신라식 석탑의 상하기단과 달리, 지복석(地覆石)으로 구획된 사각형의 기단에 사방 3간(間)의 다층탑을 쌓아올린 것이다.
서쪽면 전체와 남쪽면 대부분, 북쪽면의 절반 정도가 무너지고 층수도 6층까지 밖에 남지 않아서 현재 보수, 정비 중이다. 미륵사지 동탑 복원은 1991년 노태우 정권 당시 문화재관리국 주관 하에 이루어졌다. 한때는 7층 설이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복원 도중 이 탑이 9층이었음을 알려주는 부자재가 발견돼 9층으로 확정됐다.
미륵사지 석탑은 기단이 목탑과 같이 낮은 1단을 이루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각 면마다 3칸씩을 나누고 가운데칸에 문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내부가 통하게 만들었으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웠다. 1층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세웠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목조건축의 배흘림기법을 따르고 있다. 기둥 위에도 목조건축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재료인 평방과 창방을 본떠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살짝 치켜 올려져 있다. 2층부터는 탑신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화되며, 지붕돌도 1층보다 너비가 줄어들 뿐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탑의 일시 붕괴를 막기 위해 시멘트로 보수한 부분이 미관상 좋지 않고 향후 추가 붕괴될 우려가 있어서 국가문화재위원회가 1999년 4월 해체보수정비를 결정하였다. 전라북도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미륵사지석탑보수정비 준비를 시작으로 석탑해체보수정비를 위한 가설덧집 공사 등의 공정을 완료하였고, 2001년 10월부터 국립문화재 연구소가 본격적인 해체보수정비를 시작하였다.
미륵사지 석탑 해체보수정비사업은 당초 2007년에 완료할 계획이었으나, 동양 최대의 석탑이며 중요 국보임을 감안하여 신중하게 해체하고 백제 창건 당시 건축기술을 조사하기 위한 학술연구를 병행하면서 작업일정이 늦어져 완료일이 2014년까지로 연장되었다가 2017년말까지로 다시 미루어졌다.
석탑의 복원 방식을 놓고 문화재청은 1·2층은 완전대칭복원하고 3~6층은 해체 전의 모습으로 부분복원을 하겠다는 입장이나, 지자체의원들과 일부 전문가들은 탑의 유지·보존과 재붕괴 방지를 위해서 5층까지는 완전대칭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륵사지 디오라마.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치미.
주로 점토로 제작되고 있는데 용마루에 얹힐 수 있도록 하단부의 중앙에 적새[積瓦]와 연결하는 반원형 또는 방형의 홈이 가로로 패어 있어 고정시킬 수 있게 되어 있다. 측면은 몸통과 깃 부분을 구획하는 굵은 돌대가 설정되어, 그 안쪽에는 침선(沈線)이나 꽃무늬를 배치하고 바깥쪽에는 봉황의 날개깃과 같은 단열(段列)이 층을 이루면서 호형(弧形)으로 길게 뻗어 있다. 앞면은 굴곡된 능골이 반전되고 있으며 뒷면은 무늬가 전혀 없는 공백 상태이거나 연꽃무늬 등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일반적인 형태이다. 치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길상(吉祥)과 벽사(辟邪)의 상징으로서 의장(意匠)된 상상의 새인 봉황에서 비롯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 한나라 때는 반우(反羽), 진나라 때는 치미, 당나라 때는 치문(鴟吻), 통일신라 때는 누미(樓尾)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어 왔다.
왕궁리 유적 전시관.
왕궁리 세계유산 표지석.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益山 王宮里 五層石塔)은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있는 고려의 백제계 오층석탑이다. 대한민국제2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체높이는 8.5m고, 1단의 기단 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미륵사지 석탑과 마찬가지로 목조 탑파의 형식을 모방한 탑이나 건축적인 가구보다는 조각적이며 응집적(凝集的)인 가구를 보임을 특징으로 삼는다. 그 토대(土臺)는 주위의 지반에서 독립되어 완전히 탑파의 중력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높은 기단을 형성하며, 옥신(屋身)은 복잡한 목조 탑파의 형식을 떠나 단순화된 응결(凝結)을 보이고 각 기둥의 형식은 배흘림(엔타시스, entasis)을 떠나 있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기단부에 탱주(撑柱)가 2개 있는 사각 형 석탑이며 옥신(屋身)과 옥개석은 모두 여러 개의 석재(石材)로 구성되었다. 옥신부는 4우주(四隅柱)와 탱주가 각출된 중간석 등 모두 8개로 되었고, 2층은 4면 1석으로 4개, 3층 이상은 2개의 석재로 조립하였다. 옥개석은 넓은 편이며 개석과 받침이 각각 다른 돌이고 받침은 3단씩이다. 개석은 1층부터 3층까지 8석, 4층과 5층은 4석으로 구성되었다.
이 석탑은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언제 제작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태였으나 1965년 보수작업 때 기단의 구성양식과 기단 안에서 찾아낸 사리장치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그 시기가 비교적 뚜렷이 밝혀졌다. 즉, 백제의 옛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왕궁리 유적지구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는 순간 "헐~" 할 수도 있다. 허허벌판에 고작 이 탑 하나 우쭉 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깨어진 기와 조각 모아 놓은 기와 무덤이 전부이다.
어쩌면 그래서 이 왕궁리 유적이 더 애처롭고 더 애잔하면 더 소중하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유적지구에서 나온 기와를 모아놓은 기와 무덤.
'걷기 좋은길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례 산수유 마을 (0) | 2018.02.27 |
---|---|
평창 오대산 선재길 (1) | 2018.02.14 |
정조의 꿈(6) 수원화성 장안문 (0) | 2018.02.12 |
정조의 꿈(5) 수원화성 화서문 (0) | 2018.02.09 |
정조의 꿈(4) 수원화성 팔달문 (1) | 2018.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