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역사드라마에서의 공성전은 거의 이곳에서 촬영을 해서 그런지 식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눈에 익은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결국엔 드라마 세트장까지 생기고~ 그럼에도 이따금 들려 한가롭게 산책을 즐기기엔 더없이 좋은 장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예전엔 이 길을 걸어 3관문인 조령관을 지나 옛사람들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수안보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걸어가서 수안보에서 목욕한번 션하게 하고 서울로 돌아오곤 했는데 지금 검색해 보니 그 길이 “새재넘어 소조령길”이라는 이름으로 4개 코스에 걸쳐 이루어져 있다.
사실 그동안 여러번 이곳을 가보았지만 막상 관문 주변에 있는 주흘산이나 조령산은 바라 보기만 했지 거길 가보겠다는 생각은 왜 안했는지 모르겠다.
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매번 하는 이야기지만 본래 산을 좋아하지도 않고 어쩌면 타고난 저질체력 때문에 지레 주눅이 들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마음먹고 주흘산에 올랐다.
그래도 명색이 1000m가 넘으니 만만하게 볼 산은 아니다.
어느 산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지금까지 산을 오르면서 쉬엄쉬엄 오르고 또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메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오를리 없건마는” 이란 양사헌의 시를 한 대여섯 번 읊조리다 보면 어느덧 정상에 와 있긴 했다.
근데 이 주흘산은 한 참 올라서 보니 주봉이 있고 무슨 영봉이 있고 또 부봉이 있어서 아주 환장하는 줄 알았다.
살다 살다 이래 헷갈리는 산은 또 첨 보았다. 그리고 영봉이 젤 높은 거보니 거기가 정상이려니 한다.
聞慶새재(鳥嶺)는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과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사이에 있는 고개로, 백두대간에 있는 1,017m 높이의 조령산을 넘는 것이 고비다. 새재는 조령(鳥嶺)을 우리 말로 읽은 것으로, 나는 새도 넘기 힘든 고개란 의미이다.
지금도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도계이기도 하다. 현재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 험준함은 예로부터 유명해서, 삼국시대 때는 신라 초기에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을 막는 국경선이었고, 임진왜란 당시 파견 온 명나라 장군 이여송은 문경새재의 지형을 보고 "이 험준한 고개를 지킬 생각을 못 하다니 신 총병도 참 지략없는 사람이다."하고 신립을 비웃었다고 한다. 신립이 충주 탄금대가 아닌 이 곳에서 결진하여 매복했다면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카의 부대를 더 효과적으로 막았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한양과 동래를 연결하는 영남대로의 중추로 추풍령(좌로), 죽령(우로)과 함께 낙동강 유역(영남)과 한강 유역(기호)를 잇는 가장 중요한 경로였다. 특히 과거를 보러 가는 영남의 선비들이 그야말로 사랑해 마지않았는데, 죽령으로 가면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어가면 추풍 낙엽처럼 떨어지는 데 반해, 문경새재를 넘으면 말 그대로 경사를 전해듣고(聞慶) 새처럼 비상하리라 믿었다.
후삼국시대 견훤과 왕건의 격돌이 있었던 격전지 가운데 하나이며(929년 가은성 공방), 상기했듯 임진왜란에서는 신립이 여기를 내줬다가 충주탄금대에서 대패하였다. 지금도 복원이 잘 되어있어 괜찮은 트레킹 코스로 3개 관문(주흘, 조곡, 조령관)이 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이곳에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등 3개의 관문을 설치하였다.
문경읍에서 서북쪽으로 깊은 협곡을 따라 3.5km 가면 조선 숙종 34년 (1708년)에 쌓은 첫 번째 관문이 영남 제 1관문인 주흘관이며, 3km 더 가면 제 2관문인 조곡관, 이곳에서 3.5km 떨어진 곳에 제 3관문인 조령관이 있다.
문경의 3관문을 품고 있는 주흘산(1,106m)은 관문까지의 험한 계곡에 이루어져 있으며 여궁폭포, 혜국사, 용추, 원터, 교귀정 등의 명소가 있다.
우선은 1관문인 주흘관 바로 옆으로 난 길을 이용해 주흘산에 오르고 하산은 2관문인 조곡관 방향으로 잡았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영봉에서 이 2관문인 조곡관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무자니 길고 지루했다. 어쨌거나 조곡관으로 내려와서 3관문인 조령관까지 올라갔다가 출발했던 1관문까지 다시 돌아오는 코스이다. 주흘산을 넘어와서 다시 3관문인 조령관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오려면 잠시 다리가 후들 거릴 수도 있다. 그럴땐 그냥 1관문으로 바로 내려가도 누가 뭐라하는 사람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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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관문인 조곡관이다.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하였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은 영성(3관문)과 초곡성(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 곳에는 조동문을 설치하였다. 1907년 훼손되어 1978년에 복원하고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이라 개칭하였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가 있고 팔작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 3.6m, 길이 65.8m이다.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cm이다. 좌우의 석성 높이는 4,5m, 폭 3,3mm, 길이 73m이고, 좌우에 부속된 산성의 높이는 2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100m이다.
위에 아리랑비와 옛길 박물관.
제 1관문인 주흘관. 사적 제147호로 지정된 문경 조령 관문(聞慶 鳥嶺 關門) 중 첫 번째 관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관문 설치의 필요성에 따라 많은 논란 끝에 1708년(숙종 34년)에 석성과 함께 세워졌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이며 좌우에 협문이 각각 1개씩 있습니다. 중앙에 높이 3.6m, 너비 3.4m 개울물을 흘려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뒤편에는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3개의 관문 중 가장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출처 두산백과에서 참고 -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좌측으로 드라마 촬영장이 있고 제 2관문인 조곡관이 나온다.
이제 1관문인 주흘관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주흘산으로 올라간다.
여궁폭포
늘 그렇지만 계단 앞에만 서면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짐을 느낀다. 하늘도 노랗구~ 그래도 한가지 희망은 이 계단만 오르면 다왔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오르긴 하는데 그 기대감대로 다 온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같다.
주흘산, 다 왔다. 근데 아니란다. 이게 주봉이고 옆에 영봉이라 조금 더 높은게 있단다. ㅜㅜ
주흘영봉에 도착.
산의 정상치곤 참 고적하다.
드디어 제 2관문인 조곡관에 도착하였다. 조곡관 잠시 둘러보고 3관문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올 것이다.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에 있는 문경 조령 관문(聞慶 鳥嶺 關門. 사적 제147호) 중 두 번째 관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관문 설치의 필요성이 논의되던 중, 1594년(선조 27년)에 충주사람 신충원(辛忠元)이 조정의 결정에 앞서 축조한 것으로 중성(中城)이라고도 한다. 주흘관이나 조령관이 있는 자리에 비해 계곡이 좁고 주변의 산세가 험하다.
숙종 때에 성을 개축하고 관방을 설치하면서 주흘관과 조령관에만 관방을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을 설치하였다.
그 후 불에 타 홍예문만 남은 것을 1978년에 복원하면서 조곡관이라 개칭하였다.
주흘관에서 북쪽으로 약 3km 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령관 보다는 남쪽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이며 좌우에 협문이 1개씩 있다.
중앙의 홍예문은 높이 3.6m, 길이 65.8m이고, 좌우에 높이 4.5m, 폭 3.3m, 길이 73m의 석성을 축조하였다. 문루 뒤쪽에는 영남제2관(嶺南第二關)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출처 다음 두산백과-
조곡관의 뒷편.
옛과거길이라 한다. 걸어보자.
한시의 매력이 한껏 풍겨난다.
일제의 수탈 현장이란다. 나무의 송진을 체취한 흔적.
낙동강 발원지라니 놀랍다.
이곳이 낙동강 발원지란다.
드디어 제 3관문인 조령관에 도착하였다.
제 3관문은 새재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북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선조 때 공사를 시작하여 숙종 때 중창한 3관문은 고려 초부터 조령이라 불리면서 중요한 교통로의 역할을 하였다. 문루는 1907년 훼손되어 불에 탔고, 홍예문과 누각, 좌우의 석성 135m는 1976년 복원하였다. -출처 다음 두산백과-
이제 다시 원점으로 내려간다.
교귀정.
조선시대 새로 부임하는 경상감사가 전임 감사로부터 업무와 관인(官印)을 인수인계 받던 교인처(交印處)이다.
조선시대 신임감사의 인수인계는 도 경계 지점에서 실시하였으며 이 지점을 교귀라 한다.
1470년(성종 초) 경에 건립되어 사용되어 오다가 1896년 의병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어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99년 6월 복원하였다.
건물의 양식은 팔작지붕에 이익공(二翼工),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처 다음 두산 백과-
참 의미있는 비석이라 생각해서 마지막에 올렸다. 산불됴심!!! 정말 산불조심해서 이 아름다운 산과 길을 오래도록 잘 보존하였으면 좋겠다. 조령산불됴심표석(경북문화재자료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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