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은 지금 가야 한다.
바로 장마철에 물이 많고 사람이 없을 때 가야 하는 몇 군데 되지 않는 곳 중에 하나이다.
특히 한국 최고의 원림(園林)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소쇄원이지만 생각보다 별로라던 세간의 소리를 묵묵히 견뎌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마때가 되면 관광객의 잡담 소리가 끊기고 적막 속에서 오직 물이 끊겨 시름하던 십장 폭포가 살아나서 소리를 낸다.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소쇄원의 가치는 세상 밖으로 드러낸다.
필시 소쇄원의 가장 낮은 곳에 지어진 광풍각(光風閣)은 오직 너럭바위 위로 흘러 떨어지는 십장폭포를 감상하기 위해 지어졌을 것이다.
보는 즐거움이 아니라 듣는 즐거움까지 고려한 양산보의 안목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앞에서 담양의 관방제림에서는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준비하고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에서는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을 준비하면 더없이 좋은 여행이 될 것이라 했지만 이 소쇄원에서는 묵언속에서 귀를 열어 놓고 잠시 머물렀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쇄원은 휘익~ 둘러보고 가는 곳이 아니라 머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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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瀟灑園)은 전라남도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원이다. 조선 중종 때의 학자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화를 입자 시골로 은거하러 내려가 지은 별서정원(別墅庭園)으로, 자연미와 구도 면에서 조선시대 정원 중에서도 첫 손으로 꼽힌다. 1983년 7월 20일에 사적 제304호로 지정되었고, 2008년 5월 2일에 명승 제40호로 변경되었다.

소쇄원의 주차요금은 무료이고 입장료는 성인 2000원이다.

대숲 가운데 널찍한 길로 소쇄원에 들어서지만 예전에는 작은 사립문이 달려 있었다고 한다. 대숲은 자연 세속과 경계가 되어 말 그대로 맑고 깨끗하게 소쇄 (瀟灑)하여 세속을 벗어난다. 지금처럼 외길이 아니라 길이 두셋 더 있었다고 하니 세상과의 단절이 아닌 듯하다.


대숲을 벗어나면 흙돌담이 오른편 눈앞으로 길게 펼쳐지고 왼편으로 소쇄원 경내가 들어온다. 담장을 따라가면 고경명이 일산을 펴놓은 것 같다고 했던 정자가 나온다. '초정草亭' 혹은 '소정小亭'이라고 불리는 이 작은 정자는 양산보가 직접 쌓았다는 '대봉대待鳳臺' 위에 세워졌다. 소쇄원의 주인이 봉황인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다. 대봉대 옆에는 봉황이 둥지를 틀고 산다는 오동나무가 있다.

당시의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나 다시 복원, 중수하여 현재 2동이 남아 있다. 소쇄원은 조선 중기 호남 사림문화를 이끈 인물의 교류처 역할을 하였다. 면앙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사촌 김윤제,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이 드나들면서 정치, 학문, 사상 등을 논하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정원은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로 되어 있다. 4.060m2의 면적에 기능과 공간의 특성에 따라 애양단구역, 오곡문구역, 제월당구역, 광풍각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원 내에는 대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들로 된 숲이 있다. 주위에는 흙과 돌로 쌓은 자연스러운 담이 있는데 ‘애양단’, ‘오곡문’, ‘소쇄처사양공지려’의 석판과 목판글씨가 담벽에 박혀있다. 소쇄원 안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의 모습을 목판에 새긴 그림이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원이다.

담장을 돌면 '외나무다리(약작, 略彴)'가 계곡에 걸쳐 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산의 경사를 따라 층층 쌓은 흙돌담과 연결된 '오곡문五曲門'이 있다. 담벼락 매화나무 옆에는 오곡문이라는 글씨가 있다. 오곡은 무이구곡의 오곡을 말한다. 주자가 공부했던 무이정사가 있던 곳이 무이구곡 중 오곡이었다. 구곡 중 가장 중심 되는 곳이니 이 오곡문은 소쇄구곡의 중심인 것이다.

담장을 바라보면 '애양단愛陽檀'이라는 글씨가 있다. 담벼락에 글씨를 새긴 옛사람들의 우미한 풍류가 엿보인다. 예전에는 양산보의 사돈이자 둘째 아들 양자징의 장인인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 시가 걸려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운치 있었을까. 아쉽게도 담장이 홍수로 떠내려가면서 사라졌다.

지금은 문 없이 트여 있지만 <소쇄원도>를 보면 작은 일각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곡문 옆 담장이 특이하다. 흐르는 계곡물에 천연덕스럽게 발을 담그고 있는 담장 굄돌支石은 소쇄원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구조물이다. 원규투류垣窺透流, 신선 동굴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에 발을 담근 담. 흐르는 자연에 최소한의 인위를 가한 절묘한 장면이다.

계곡물을 건너면 '매대梅臺'이다. 제월당 좌우로 매화와 파초가 심겨 있는데, 매대는 매화가 심어져 매대라 불렸다. 매대 뒤쪽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소쇄처사 양공지려瀟灑處士 梁公之慮'가 하얀 벽에 검은 글씨로 걸려 있다. 양산보의 5대손 양택지가 송시열에게서 제월당, 광풍각 글씨와 함께 받아온 것이라고 한다.

소쇄원의 맨 위에 '제월당霽月堂'이 우뚝하다. 주인이 거처하며 조용히 책을 봤던 곳으로 그 이름은 송나라 황정견이 주무숙의 사람됨을'흉회쇄락여광풍제월胸懷灑落如光風霽月'이라고 비유한 데서 따왔다.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비 갠 뒤 부는 청량한 바람과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 같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소쇄원 경내가 한눈에 보이는 이곳에 이르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걸음을 멈춘다. 마루에 걸터앉아 사람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제월당(霽月堂)-광풍각이 사랑방 노릇을 했다면 제월당은 주인의 독서를 비롯한 사생활이 이뤄지는 폐쇄적인 공간이다. 현판 글씨는 역시 우암 송시열이 썼다. 정면 3칸, 측면 1칸 팔작지붕으로 왼쪽 한 칸에 방이 있으며 함실아궁이를 설치했다.
높다랗게 우뚝 솟은 제월당에 오르면 소쇄원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제월당은 소쇄원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정자 마루에서 보면 광풍각과 대봉대가 내려다 보이고 애양단과 오곡문 대나무 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양산보는 소쇄원 전체를 관조하는 자리에서 봄에는 매화와 복사꽃을, 여름에는 목백일홍을 즐기며 가슴속에 품은 한을 계곡물에 실어 내리면서 마음속의 불덩어리를 지워갔을 것이다.

제월당이라고 한 것은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춘릉春陵의 주무숙(1017~1073)의 인물됨을 얘기할 때 ‘가슴에 품은 뜻을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라고 한 데서 따온 이름이다. 어찌 보면 처사로서 양산보의 삶이 마음에 맑고 깨끗함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고경명의 『유서석록』에서 계류 가에 있는 문방을 ‘마치 화방畵舫(채색치장을 한 유람선)과 같다’라고 하고 했던 것은 「무이도갯의 세 번째 노래에서 가학선架壑船(절벽에 걸친 배)에 비유하면 그렇게 묘사한 것은 아닐까 추정된다.
즉 ‘가학선’은 상상컨대 옛날 큰 홍수로 배가 높은 곳에서 떠내려와서 물이 빠지자 땅에 닿았으며, 세월이 흘러 썩어서 허물어졌는데 마침 산곡에 이것이 있는 까닭으로 해서 ‘상전해수’라는 말을 썼다는 것이다.







제월당 마당 끝으로 난 일각문을 내려서면 담으로 둘러싸인 정적인 공간이 있고 그 아래로 돌층계가 이어진다. 돌층계를 하나하나 내려서다 보면 어느새 세속의 혼탁함은 사라지고 고요한 선계가 펼쳐진다.


제월당 담장 너머 서쪽에는 공터가 있다. '고암정사鼓巖精舍'와 '부훤당負暄堂'이 있던 자리다. 고암정사는 양산보의 둘째 아들인 고암 양자징이, 부훤당은 셋째 아들인 지암 양자정이 1570년경에 세운 서재이다.

층계를 내려 도달한 곳은 '광풍각光風閣'. 고경명이 물 위에 뜬 배와 같다고 한 광풍각은 소쇄원 원림의 한복판에 있다. 손님을 접대하던 사랑방으로 옛날에는 손님을 맞고 보내는 버드나무가 서 있었다.

광풍각 아래 계곡에는 대나무로 만든 다리가 걸쳐 있다. 투죽위교透竹危橋, 이 다리를 건너려면 몸과 마음이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계곡을 건너면 '상지上池'와 '하지下池', 두 개의 네모난 연못이 보인다. 계곡물을 나무 홈과 바위 홈으로 끌어왔다. 옛날에는 두 연못 사이에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한다.

아직은 물이 많지 않으나 장마철에는 쏟아지는 폭포수가 천둥소리를 내며 계곡을 가로지르는데 장관이다. 마루에서 보면 외나무다리가 보이고 다리 너머로 '오곡문'이라는 글자가 쓰인 담장이 보인다. 계곡 건너 동북쪽으로는 봉황을 기다린다는 '대봉대'가 눈에 들어온다. 조성 당시 계곡 암반에 석가산이 있었고 뒤쪽에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복사 동산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소쇄원에 가야 하는 것이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보면 계류가 흐르는 골짜기 양쪽 언덕으로 소쇄원이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곡문 담장 아래를 흘러 외나무다리를 지난 계류는 암반에서 십장폭포十丈瀑布라고 하는 폭포수가 되어 떨어진다. 그 아래 푹 팬 웅덩이는 조담槽潭이고, 계류는 지석천支石川인데 증암천으로 흘러간다. 계곡의 좌우에는 달구경하던 너럭바위 광석廣石, 바둑을 두던 평상바위 상암床巖, 자연 속에서 사색하거나 지인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던 걸상바위 탑암榻巖 등이 있다.

광풍각(光風閣)의 '광풍'은 송나라 황정견이 주돈이라는 사람의 인물됨을 가리켜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밝음은 마치 비 갠 날 청량하게 부는 바람과 같고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과 같다'라는 데서 비롯됐다. 이 시구 중 '광풍제월'에서 따왔다. 비 오는 날 청량하게 부는 바람이라는 뜻이다.

소쇄원에서 사랑방 구실을 하는 광풍각은 조선시대 정자의 참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574년에 쓰인 『유서석록』에는 광풍각이라는 명칭은 쓰여지지 않고 ‘소재小齋’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1614년에 양천운이 쓴「소쇄원계당중 수상량문」에는 계당溪堂을 ‘침계문방’ 혹은 ‘광풍각’이라고 같이 쓰고 있어 광풍각이 바로 ‘침계문방’ 임을 알 수 있다. 제월당이 주인을 위한 집 이라면 광풍각은 객을 위한 사랑방이라 할 수 있다. 이 상량문에 의하면 광풍각은 1597년 불에 타버리고 1614년 4월에 중수하였다. 또한 ‘계당’은 광풍각의 별칭으로 또 다른 시기에는 침계헌, 침계방, 수함水檻, 소함小檻 등으로 부르는 별칭이 있다.


광풍각 옆에는 돌을 쌓고 화초와 나무를 심은 아름다운 석가산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볼 수 없다. 이 계곡 가에는 나무가 14종, 화초가 15종이 있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건 소쇄원에 왜철쭉이 있었다는 것. 양산보는 소쇄원에서 기른 왜철쭉을 김인후에게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왜철쭉은 당시 꽃 가운데 최고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 정면 세칸, 측면 세칸 규모의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한 칸이 방이고 뒤쪽에는 함실 항아리가 있다. 방이 있는 뒤쪽을 제외한 세 방향에는 삼분합의 들어열개문이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분합문을 들어 바깥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이고 가을이 되면 함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봄을 기약하며 책을 읽고 시를 썼을 것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는 1519년(중종 14) 음력 11월에 조선에서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김전(金詮), 중종(中宗) 등이 조광조(趙光祖), 김식 등 신진사림의 핵심인물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혹은 귀양보낸 사건이다. 조광조 등의 세력 확장과 위훈 삭제에 대한 불만이 원인 중 하나였다. 신진 사림파의 급진적인 개혁정책 역시 그들을 지지하던 정광필, 안당 등의 반감을 사면서 지원받지 못하였다. 남곤, 심정, 김전, 홍경주, 고형산 등은 후궁과 궐내 세력을 이용하여 조광조일파의 제거 여론을 조성하여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희생된 인물들은 후일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부른다.
중종은 당시 승지들도 모르게 대소 신려들에게 갑자기 입궐 명령을 내렸고, 홍경주, 김전, 남곤, 심정, 정광필, 안당 등은 갑자기 소환 명령을 받고 경복궁의 북쪽 문이었던 신무문을 통해 들어와 승지들 모르게 회의를 열었다. 일명 북문지화(北門之禍)라고도 부른다.
연산군 때의 무오·갑자사화로 김종직(金宗直) 일파의 신진 학자들은 거의 몰살당하여 유학은 쇠퇴하고 기강도 문란해졌는데,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惡政)을 개혁함과 동시에 중종반정 이후 무한대로 축재와 권력남용을 하는 공신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연산군 때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하고, 대의명분과 오륜(五倫)의 도를 가장 존중하는 성리학을 크게 장려하였다.
이때 조광조 등 젊은 선비들이 대거 등용되었다. 조광조는 김종직의 제자 중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가장 깊었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 한국 성리학의 정통(正統)을 계승한 사람이었다. 1515년(중종 10년)에 성균관 유생 2백여 명이 연명(連名)하여 그를 천거하였고, 이조판서 안당(安塘)도 그를 추천하였으므로 곧장 6품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 뒤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전후 5년간에 걸쳐 정계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敎化)의 근본을 삼아 삼대(三代)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김종직이 출사 한 이래 계속 중앙으로의 진출을 꾀하던 사림파의 뜻과도 부합되었으므로 이들은 중종의 영입 노력을 적극 수용하였다.
중종반정으로 공신이 된 박원종, 유자광, 유순정, 성희안, 홍경주 등은 권력을 장악하여 세력을 확장했고, 이들 공신들의 권력 남용은 왕권을 넘보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왕권까지 우습게 보는 도를 넘어선 훈구파 공신들의 월권행위에 제동을 할 필요성을 느꼈던 중종은 새로운 대안 세력을 모색하게 된다. 또, 중종 반정 이후 신료들 사이에 왕을 선택할 수 있다(택군)는 사상이 은연중에 조성되어 중종 등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사림파가 성리학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고려 이래 수 백 년간 장려하여 온 사장(詞章)의 학을 배척하자 남곤·이행(李荇) 등의 사장파(詞章派)와 서로 대립하게 되었으며, 또한 현실을 돌보지 않고 주자학에 따라 종전의 제도를 급진적으로 혁파하려 하였고, 풍속·습관까지 바꾸려 했기 때문에 남곤, 심정, 정광필(鄭光弼) 등 보수파의 훈구 재상과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정광필, 안당 등은 사림파에 대단히 우호적이었고 사림파 발탁에 힘을 기울였지만 사림 인사들의 지나친 공세로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또한 같은 사림으로 김종직의 문인의 한 사람이었던 남곤 역시 이들의 과격한 급진 개혁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의 훈구 재상으로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모두 세력을 잃고 불평을 품게 되었다. 특히 조광조 등이 정국공신(靖國功臣) 가운데는 공신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니 이들의 공신호를 박탈하자고 건의하여, 마침내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공신호를 박탈하자 이에 놀란 훈신(勳臣)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모략·중상에 나섰으니, 이것이 조광조 일파의 젊은 선비들이 화를 당하게 된 직접적 원인의 하나였다.
그 위에 처음에는 중종도 조광조 등의 혁신적인 정치를 후원하였으나 조광조의 정치가 혁신성을 잃고 도학적(道學的) 언행만을 되풀이하자 점차 총애를 거두었다. 실록을 따르면 이미 기묘사화 일이 년 전부터 이미 중종의 총애가 조광조로부터 떠나고 있었으며 조광조는 중종이라는 후원자가 없자 점차 정계에서 고립되고 있었다.
불평이 많은 훈구파의 홍경주, 김전, 고형산 등과 심정, 남곤 등은 연합하여 조광조 일파를 타도할 계획을 세운다. 홍경주는 그 자신의 딸이 희빈(熙嬪)으로 중종을 모시고 있는 것을 이용하고, 심정, 남곤 등은 경빈 박씨 등과 친분이 있는 것을 이용, 이들 후궁들에게 호소하여 조광조 타도에 발 벗고 나섰다.
희빈 홍씨와 경빈 박씨 등은 나인들을 시켜 궁궐 안팎의 나뭇잎에 꿀을 발라서 벌레들이 파먹게 한다. 희빈 등은 천하의 인심이 조광조를 지지하니 조광조는 공신들을 제거한 후에 스스로 임금 될 꿈을 꾸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동시에 대궐 안의 나뭇잎에 꿀로 “走肖爲王”(주초위왕)이라는 4자를 써서 벌레가 파먹게 하고, 이것이 묘하게 글자로 남은 것을 임금에게 보여 큰 충격을 주었다. 이때 “走肖”는 “趙”(조)의 파자에 해당하며, 이는 은연중에 조광조가 왕위에 오른다는 참언이었다.
한편 북문으로 조정에 들어온 고관들은 비밀리에 회의를 진행한다. 남양군 홍경주와 예조판서 남곤, 공조판서 김전, 호조판서 고형산(高荊山), 도총관 심정 등은 비밀리에 모의한 끝에 홍경주가 일당을 대표하여 조광조 등이 당파를 만들어 과격한 일을 자행하고 정치를 어지럽히니 처벌해야 한다고 임금 중종에게 밀고하였다.
마침내 중종은 대사헌 조광조와 우참찬 이자(李耔), 도승지 유인숙(柳仁淑), 좌부승지(左副承旨) 박세희(朴世熹), 우부승지(右副承旨) 홍언필(洪彦弼)을 비롯하여 조광조파로 지목되는 많은 사람을 잡아 가두게 하였다.
홍경주, 김전, 심정 등은 당장 이들을 때려죽이려 하였으나 병조판서 이장곤(李長坤)과 좌의정 안당이 임금께 간절히 말렸고, 영의정 정광필은 “젊은 선비들이 현실을 모르고 옛날 제도를 그대로 인용하여 실시하고자 한 것”이라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말렸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남곤은 유배나 파면 선에서 해결하면 될 것이라고 의견을 피력했지만 역시 거절당한다. 이후 이장곤과 안당은 이로 인하여 옥에 갇혔다.
이날 성균관의 유생 천여 명이 달려와서 광화문 밖에 모여 조광조 등의 억울함을 울며 호소하니 주모자 이약수(李若水) 등 몇 명을 체포하자 모두 자진 포승을 지고 들어가 감옥은 가득차 있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회의에 참여한 신하들에게 서훈을 내렸지만 남곤 등은 상훈을 거절하고, 관직 사퇴를 청하기도 한다.
조광조는 능주(綾州)에 귀양 갔다가 곧 사약(賜藥)을 받고 죽었으며, 김정(金淨)과 기준(奇遵), 한충(韓忠), 김식(金湜)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살, 김구(金絿), 박세희, 박훈 등은 귀양을 갔는데 모두 30대의 청년이었다.
또 그들을 옹호하던 안당과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형제와 김세필(金世弼)은 파면되었다.
뒤이어 김전은 영의정, 남곤은 좌의정이 되고, 이유청(李惟淸)은 우의정이 되었고 현량과도 곧 폐지되었다. 이 옥사가 기묘년(己卯年)에 일어났으므로 기묘사화라 하며, 이때 죽은 사람들을 후에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하였다.
한편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훈구파와 함께 조광조 일파의 숙청에 가담했던 남곤은 후배 사림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간사한 인물로 매도되었다.
이를 계기로 사림들의 정치적 진출이 막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성리학의 학문적 발전이 이루어지는 계기도 되었다.
-출처 다음 위키백과-

조광조(趙光祖, 1482년 8월 23일/음력 8월 10일 ~ 1520년 1월 10일/1519년 음력 12월 20일)는 조선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다.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유숭 조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하였다. 중종의 훈구파 견제 정책에 의해 후원을 받아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언관 활동을 하였고, 성리학 이론서 보급과 소격서 철폐 등을 단행하였다. 성리학적 도학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 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실패한다. 1519년 반정공신들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에 의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역모로 몰려 전라남도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된다. 후에 기묘명현(己卯名賢 ) 중 한 사람이다. 개혁 정책을 펼치다가 희생된 개혁가라는 시각과 급진적이고 극단적이라는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관직은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겸 동지경연성균관사에 이르렀고, 사후 인종 때 복관되고 명종 때에 몇 번의 논란이 일다가 선조 초에 기대승 등의 상소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한때 그와 가까웠으나 뒤에 그의 정적이 된 남곤과, 그의 정적 중 한사람이기도 했던 김전 역시 김종직 학파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그의 문하생 백인걸을 통해 율곡 이이에게 전해졌으며, 명종 말엽에 사림파는 훈구파를 몰락시키고 집권에 성공하면서 성인화, 성역화된다.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1등관에 추서되었다.
-출처 다음 위키백과, 경북일보 굿데이 굿뉴스에서 참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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