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은 경북 경주시 강동면에 있다. 행정구역상은 경주시에 속해 있지만 포항 쪽에 더 가까이에 있다. 그래서 가끔은 포항 쪽에서 보면 좀 아깝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럼에도 포항이 산업화의 상징이라면 경주가 또 전통과 문화의 이름값을 하니 어쩌면 경주에 속하는 것이 다행이며 맞다는 생각도 든다.
또한 경주와 포항을 잇는 7번 국도와 28번 국도에 가깝게 있다 보니 포항이나 경주에 출장 갈 일이 있거나 할 때 한 번씩 들려보곤 하던 곳이다.
양동마을은 여강 이씨와 월성 손씨의 대표적 동성취락 구조를 가지고 씨족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마을의 형성과정이나 이곳에서 배출된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역사적 가치와 지리적 환경에 대해 알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거 다 알거나 아님 그곳에 다녀왔다 해서 이런 거 다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있나!~
단지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양동마을이 보유한 역사적 건축물과 양식이다.
우리나라의 여러곳을 다녀보면 각 지역이 보유한 일정한 패턴과 구성요건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물론 내가 전문가는 아니기에 이런 부분까지 세세하게 논할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지만 양동마을을 천천히 돌다보면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중에 사진에서 이야기 하겠지만 마을에는 집 앞에 작은 텃밭이 전부이며 주요 생산품인 쌀을 생산하는 농경지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마을이 농경지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형성하여 주거 공간과 생산 공간을 분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주거공간인 마을에 살림집, 정자, 사당, 서원등 기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이러한 기반 시설이 역사적인 건축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양동마을에서 보물로 지정된 가옥은 향단, 관가정, 무첨당, 독락당이 있고, 민속자료로 지정된 건축물은 12점 이라고 한다. 또한 옥산 서원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물론 각 건축물이 지닌 명칭과 역사적 의미에 대해 다 알아야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제 막 발걸음을 들여놓는 가을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마을을 천천히 걷다보면 내가 정말 조선시대로 들어온 듯 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아니 적어도 우리내 부모님이 살았던 시대의 고향집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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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 앞에 있는 농지이다. 생산지와 생활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양동초등학교와 양동마을 입구이다.
조선의 풍수에서는 양동마을을 삼남의 사대길지라 했다. 이와 관련하여 양동마을의 지리적 형국이 물(勿)를 닮았는데 이 勿자의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하면 血자가 된다하여 일제가 계획한 마을 안으로의 철도(아래에 사진) 통과를 우회시켰고, 남향의 양동초등학교 건물을 동향으로 돌려 놨다고 한다.
마을 앞에 놓여있는 철도.
이제 마을로 들어가서 천천히 걷자.
중종 때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우재 손중돈(1463∼1529)의 옛집 관가정이다. 이 건축물의 내력이나 개요보단 관가정이 갖는 이름에 발걸음이 멈추어진 곳이다. 부산의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 보면 지금은 ILLUA 호텔로 바뀐 자리가 예전에 관가정 호텔이었다. 첫 직장을 다닐때 이 호텔에 3개월 동안이나 감금되어 모 프로젝트를 입안하며 지냈던 기억이 있다. 넓은 창에 그때는 전망이 너무 좋아 처음 며칠은 참 좋았었다. 그런 이유로 이 관가정 앞에 발걸음이 멈추어 지곤 한다.
영귀정이다. 영귀정(永歸亭)은 회재 이언적이 지은 정자였으나 이후 소실된 것을 정조 2년(1778)에 회재를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중건한 정자이다. 지금은 회재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문회(門會)를 하는 곳으로 활용하고 있다. 문중원들이 모두 모이는 총회 및 그 조직체를 문회(門會), 또는 화수회(花樹會)라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인데, 서쪽 2칸은 대청이고 동족 1칸은 온돌이다. 건물 정면과 대청 서쪽으로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조성하였고, 대청 뒤에서 건물로 출입이 가능하다. 수운정과 건축형식이 비슷하다. 다만 영귀정에는 관리사가 없고 대문채 좌우에 하인방과 창고를 두고 있다. -출처 여강 이씨 문중 홈페이지-
물드는 나뭇잎이 아니라 파랗고 파란 하늘에서 난 가을을 느낄때가 더 많다.
이씨 문중이 소유한 경산서당이다. 이 건물은 최근에 옮겨지은 것으로 강학당에 비해 역사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평가 받고 있는데 이런 것까지 어떻게 다 알고 다닐까 싶다. 나도 찾아보니 그렇게 나오니까 아는 것이지~ 여기 갔을 당시에도 몰랐다.
지붕위에 올라가 감따는 아저씨를 보니 그저 한가로운 시골 마을처럼 느껴진다.
이 집은 낙선당(樂善堂)으로 손중로 선생의 종가집으로 월성 손씨의 종가인 손동만 가옥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중종 35년(1540)에 지은 집으로 ‘낙선당(樂善堂)’이란 이름은 원래 사랑채의 이름이라한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 높이가 약 9m, 가슴높이의 둘레가 2.92m이고, 수관폭(樹冠幅)이 약 12m에 달하는 노거수(老巨樹)이다. 나무의 나이는 약 500년으로 추정된다.
이 나무는 원줄기는 지상 90㎝ 높이에서 동, 남, 북의 3방향으로 가지를 낸 뒤에 다시 꾸불꾸불 위로 자라서 세 가지를 내고 있으며 동으로 5m, 서로 7m, 남으로 6m, 북으로 6.4m로 널리 퍼져 수세(樹勢)가 왕성하여 마치 분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나무는 남부의 동해안과 울릉도에서만 자생하고 있을 뿐 그 밖의 지역의 것은 전부 인공적으로 심은 것들이다. 이 나무도 손소(孫昭)가 1457년(세조 2) 양동마을에 입향하여 종가집인 송첨(松詹)을 창건할 때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이 나무는 경상북도에 있는 향나무 중에서 6위로 큰 것이나 나무를 심은 사람과 그 연대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중요민속자료 제23호인 손동만(孫東滿)의 집 뜰에서 잘 보호되고 있어 기념물로 지정받게 되었다. 출처- 한국민속문화 대백과 사전-
이 가옥은 경주 손씨 대종가인 양민공 손소(1433∼1484)가 건립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우재 손중돈(1463~1529)과, 그의 외손이며 동방십팔현으로 문묘에 배향된 이언적(1491~1553)이 태어난 곳이라 한다. 일자형의 대문채는 안에 ㄱ자형의 안채가 있고, 사랑 후원 뒤쪽 높은 곳에는 신문과 사당이 배치되었다. 종가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춘 대가실이며, 사랑대청에서 바라보이는 후원의 경치 또한 가경이다. 이 집의 당호는 송청 또는 서백당이라 하며, 과거에는 이 가실(家屋)의 주위에 외거하인(外居下人)들이 거처하던 가랍집이 있었다 한다.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
내 관심은 단지 이 곳이 이언적이 태어난 곳이라는 것과 마루 밑에 있는 흰 고무신이었다.
우물과 펌프~ 한여름 저 펌프로 퍼올린 물로 등목욕을 하면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시원함은 느끼곤 했었다.
앞에 경산서당을 설명할때 나왔던 강학당이다. 여강 이씨 문중 서당으로 대사간을 지낸 지족당 이연상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친 곳이다. 이 마을에서 월성 손씨 문중 서당인 안락정과 쌍벽을 이루며 조선 고종 4년(1867)경 지었다고 한다. 심수정(중요민속자료 제81호) 서쪽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은 행랑채는 서당 동쪽 심수정 사이에 따로 지어 놓았다.
강학당은 'ㄱ'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는데 일반적인 '一'자형 서당건축 배치와는 다른 형식을 띠고 있다. 이것은 안방 아래로 마루와 책방을 덧붙이면서 변화한 것으로 짐작한다. 꺾이는 부분의 안방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2칸 대청과 건넌방을 꾸며 놓았다. 남부지방 소규모 민가의 기본형을 잘 따르고 있는 행랑채는 '一'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으며 방·방·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위키백과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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