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중원문화길은 2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1코스는 남한강을 중심으로한 생태탐방길이고, 2코스는 역사문화길이다.
오늘은 중추 중앙탑을 중심으로 2코스 역사 문화길을 이야기한다.
중원문화의 고장임을 알 수 있는 코스로 중앙탑, 충주 박물관, 충주관광 안내소에서 시작하여 중원고구려비 전시관에서 중원 고구려비를 만나게 된다. 장미산성까지는 등산로를 걷게되는데 중반에 경사가 있어 조금 힘든 것은 둘째치고 관리가 되질 않았는지 길을 잃어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수많은 길을 다녀봤지만 길을 잃기는 이곳 중원 문화길에서 첨이었다. 일반 길도 아니고 산에서 길을 잃으면 대략 난감한 정도를 넘어서 하루 일정이 흐트러지게 된다.
그래도 충주 중앙탑이 주는 은근한 카리스마와 남한강의 푸르른 흐름이 있어서 그나마 용서가 됨은 물론 한번쯤 시간을 내서라도 방문해 보길 권장한다. 옆에 탄금호 국제조정경기장도 있고 가볍게 산책을 즐기기에도 좋다. 또한 장미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한강 장관이 일품이라는데 꼭 보고 싶은 분들은 기를 쓰고 길을 찾아 다녀오면 된다.
중앙탑 ~ (2.9km)충주고구려비 ~ (2.9km)장미산성 ~ (0.1km)하강서원 ~ (2.0km)모현정 ~ (3.5km)두무소 ~ (0.5km)목계나루까지 중앙 문화길 2코스 역사 문화길은 11.9km에 시간은 대략 4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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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중앙탑. 아래에서 다시 설명이 될 것이다.
충주 박물관앞에 있는 사적공원의 조형물.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忠州 塔坪里 七層石塔)은 남북국시대(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으로 원성왕 12년에 건립되었다. 국보 제6호로서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에 있는, 남한강 상류의 강가 높은 토단 위에 건립되었다. 이중기단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규모가 커서 기단과 하층부는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여 있으나 체감률(각 층의 옥개석이 상부로 갈수록 작아지는 비율)이 좋고 옥개석 귀마루 부분이 살짝 치켜 올라가서 경쾌한 느낌을 준다.
일명 '중앙탑'이라 부르며, 이 이름으로 인하여 1024년 1월 1일부터 본래의 가금면이 중앙탑면으로 개칭되는 계기를 맞이했다. -출처 위키백과-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 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있어, 일제당시 보수하면서 일부 변형되었다는 논란이 있다. -출처 위키백과-
충주박물관.
남한강변을 따라 걷기 된다. 그늘이 없어 그렇지 걷긴 좋다. 한여름엔 어떻게 걸을지 나는 모르겠다.
탄금호 철새 조망대.
남한강옆 하구암천에 있는 낚시터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들어가 보길 권한다.
전시관의 내부.
가만보믄 고구려군이 은근히 카리스마 있다. 쫌 쎄보이고~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 또는 중원 고구려비(中原 高句麗碑)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로 5세기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의 높이는 2.03 m, 폭은 55 cm, 두께는 33 cm이고,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소재한다.] 1981년 3월 18일 대한민국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충주 고구려비는 1979년 4월 8일 단국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발굴,조사되어 고구려 시대의 석비로 판명됐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견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
충주 고구려비의 시기에 관해선 5세기 전반 광개토왕 때의 학설부터 6세기 평원왕 때의 학설까지 다양한 학설이 있으나, 449년 장수왕 때 축조됐다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충주시는 고구려 시기에는 국원성(國原城)이었으며, 신라가 이곳을 빼앗은 뒤 중원경으로 개칭했다. 충주가 충주시와 중원군으로 분리되어 있던 시기(1956년 - 1994년)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흔히 '중원 고구려비'라고도 한다.
비석이 발견된 1979년 당시에도 마모가 심하게 진행되어 많은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형태는 넓적한 돌기둥처럼 보이며 자연석을 그대로 비석으로 활용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비의 사면에 예서체 글씨가 1행 23자꼴로 528자 새겨져 있다.
마모가 심해 비문의 내용은 알아 볼 수 없지만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표현을 통해 충주 고구려비를 만들 당시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했으며 고구려가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를 이(夷)라고 칭하는 부분에서 고구려의 독자적 천하관을 확인할 수 있으며 충주에 고구려비가 세워진 것을 통해 고구려의 남쪽 국경이 중원(현재의 충주)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충주 고구려비가 있던 자리에는 전시관이 설립되면서 원본도 전시관 내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저 가다가 어리버리하게 길을 잃었다. 관리가 되질 않았던 것인지 탐방객이 없어 길이 묻힌 것인지 알 수 없다.
눈물을 머금고 출발했던 충주 중앙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거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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