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 올린 청산도에 가길 위해 완도에 들렸다. 사실 완도,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옆에 있는 신지도에 사연이 있다.(사연 한 두개 없는 사람 없겠지만) 그런 까닭으로 완도를 통해 신지도를 몇번 찾긴 했으나 정작 완도를 둘러본 것은 처음이었다.
청산도에 들러가기 위해 배를 타야했고 그래서 하루전에 완도에 도착했다. 시간이 남아 이렇게 청해진 유적지도 돌아보고 완도타워에도 올라보는 호사를 누렸다. 앞에 청산도는 올렸고 이번에 청해진 유적지 그리고 다음에 완도타워를 올리겠다.
완도 청해진 유적(莞島 淸海鎭 遺蹟)은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734 장도(將島)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군진(軍鎭) 유적이다. 1984년 09월 01일 사적 제308호에 지정된 '완도 청해진 유적(莞島 淸海鎭 遺蹟)'은 완도에서 목교(木橋)로 이어진 장도라는 섬이다. 완도에서 장도까지의 거리는 약 180m 쯤 되고 하루 2차례씩 썰물 때는 바닥이 드러나 걸어갈 수도 있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무장 장보고 장군은 이곳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삼해(三海)의 해상권을 장악한 해상교역로의 본거지로서 중요한 역사적 유적이다.
완도 청해진 유적지는 발견전까지 인근 지역 주민들이 밭으로 사용하는 등 오랜 세월 땅 밑에 묻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1959년 태풍사라 이후에 드러난 목책(원목열)으로 인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1991년에서 2001년까지 10년에 걸쳐 국립문화재연구서의 철저한 발굴조사를 통해 성벽, 건물지 섬입구의 판축과 우물등 약 2000여점이 발굴되었으며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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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아래 바닷물이 들어와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아쉽다.
역시나 물이 들어와 있으면 그림이 훨 좋을뻔 했다.
장도(청해진 유적지의 모습)
이 다리를 건너 유적지로 들어간다. 다리 길이는 180m 라고 하며 인근에 주차장이 있다. 또한 입장료는 없다,
외성문과 내성문이 보인다.
신지대교와 멀리 완도타워가 보인다. 완도타워는 다음에 올릴까 한다.
청해진은 신라 하대 장보고(張保皐)가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 설치한 해군·무역 기지이다.
828년(흥덕왕 3)에 설치되었다가 851년(문성왕 13)에 철폐되었다. 완도는 당시 신라와 당나라·일본을 잇는 해상교통로의 요지였다.
당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해상교통로로는, 첫째 중국산둥 반도[山東半島]에서 황해안을 건너 랴오둥 반도[遼東半島] 연안을 돌아서 압록강 하구나 그 남쪽의 연안지역으로 이르는 항로, 둘째 산둥 반도에서 황해를 가로질러 강화도나 덕물도에 이르러 연안 각 하구로 통했던 항로가 있었다.
셋째로는, 중국의 양쯔강[揚子江] 하구와 주변지역의 명주(明州)·양주(楊州) 등지의 동북에서 황해를 건너오거나, 또는 산둥 성 등주(登州)에서 동남으로 순항하여 흑산도 근해에 이르러 다시 한반도 연안의 각 포구로 항행하거나, 더 나아가 대한해협을 거쳐 일본 서부지역에 도달하는 항로가 있었다.
이 중 첫째는 주로 당나라와 발해 간의 교통로였고, 둘째·셋째가 신라인들이 많이 이용하던 길이었다. 특히, 셋째는 신라·당나라·일본의 3국을 잇는 가장 중심이 되는 해상로였다. 완도는 이 세번째 항로의 길목을 누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당나라에 건너가 생활하는 동안 당나라 지방군벌의 상황과 당시의 국제무역에 대해 깊은 의식을 갖게 된 장보고는 이 완도의 지리적 위치를 이용하여 여기에 해군기지이자 무역 거점이 될 수 있는 청해진을 건설하였다. 그 위치는 지금의 완도읍 장좌리와 죽청리 일대에 해당된다.
이곳은 삼면의 조망이 확 트이고 수심이 깊어 선박을 대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태풍을 피할 수도 있는 자연적 요새지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청해진의 군영본거지는 완도읍 장좌리 앞의 장군섬[將島이다. 이곳의 중앙에는 망대가 있어 멀리 남해안 일대와 해남·강진을 지나 당나라의 산둥 반도로 출입하는 해로를 감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장군섬의 둘레에는 10㎝ 간격으로 목책(木柵)을 박아 외부선박의 접근을 막도록 하였으며, 장군섬 자체를 외성과 내성으로 나누고 3중으로 축성하여 방어력을 높였다. 이러한 청해진의 건설은 장보고가 왕에게 청을 올려 그 승인하에 스스로 지방주민들을 규합하고 조직하여 이룩한 것이다.
따라서, 청해진은 그 출발에서부터 다분히 장보고 개인을 중심으로 한 독자성이 강하였다. 신라조정이 장보고에게 내린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라는 직함도 신라 관직체계에는 없는 별도의 것이었다. 청해진을 거점으로 하여 장보고는 황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권을 장악한 뒤, 국제무역을 활발히 벌였다.
당나라에 교관선(交關船)을 보내 교역하였고, 일본에는 회역사(廻易使)의 인솔하에 상선단을 보내 무역하였다. 당시 일본과 당나라를 잇는 국제항로는 장보고의 영향력 밑에 놓이게 되었다. 그에 따라 청해진은 국제무역의 중계기지로서 그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많은 수의 유민들과 골품제의 질곡하에서 입신의 길이 막혔던 유능한 인재들이 청해진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휘하에 1만 명 이상의 군졸을 거느렸고, 상선단도 소유하고 있었다. 청해진은 독자성을 띤 하나의 지방세력으로 되어갔다.
836년(희강왕 1) 수도에서 왕위계승분쟁에 패배한 김우징(金祐徵) 일파가 장보고에게 의탁해옴에 따라, 청해진은 신라의 정국을 결정하는 주요한 정치무대의 하나로 부각되었다. 838년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는 정변이 발생하자, 청해진에 있던 김우징 일파가 장보고 예하부대의 지원을 받아 경주로 진격하였다.
여기서 승리한 김우징이 신무왕으로 즉위하면서 장보고의 청해진 세력은 더욱 강성해졌고, 이에 중앙귀족들은 위협을 느꼈다. 마침내 딸의 왕비책봉문제를 둘러싸고 장보고와 중앙정부 간에 대립이 노골화되었다. 중앙정부는 청해진 세력이 강대하여 정면으로 공격하지는 못하고, 846년 자객 염장(閻長)을 보내 장보고를 암살하였다.
장보고의 죽음은 청해진 세력에 일대 타격이 되었으나, 그의 자제와 부장 이창진(李昌珍)의 주도하에 세력을 수습, 일본에 상선단을 보내는 등 해외무역을 계속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염장 등이 이끈 토벌군의 공격을 받아 마침내 청해진이 함락되었다. 염장은 이창진 등에 의해 파견되었던 무역선과 회역사의 반송을 일본에 요구하는 등 청해진에서 잔여세력의 소탕에 주력하였다.
나아가 중앙정부는 저항적인 이 지역의 세력을 근절하기 위해 851년에 청해진을 파하고 그 주민을 벽골군(碧骨郡 :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에 청해진은 해군기지로서, 그리고 무역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청해진은 사실상 장보고와 함께 운명을 같이한 셈이다. -네이버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성의 1차 방어시설인 외성문.
성에 들어서면서 보이는 우물터. 깊이가 5.8m이며 주름무늬편등 다량의 유물이 발견된 곳이란다.
외성에 들어서 보면 이렇게 다시 내성이 보인다.
청해진성은 이시대의 대부분의 성이 그렇듯 토성이다. 판축공법으로 축성된 성으로 판축공법은 판으로 틀을 만들어 그안에 흙을 넣고 다짐 방망이 등으로 다져 찌어서 단단하게 쌓아 올리는 방법으로 청해진 성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능선을 따라 축조하였다. 성의 둘레 길이는 890m이다.
뒤로 고금도와 신지도를 잇는 장보고대교가 건설중이다.
신지대교.
고대.
내성문.
내성문에서 바라본 외성문과 다리.
내성문.
장보고의 출생과 계통은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는 본명을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라고만 적고 있다.
일찍부터 친구 정연(鄭年, 정년)과 함께 당의 서주(徐州)로 건너가그는에서 승마와 창술에 특출난 재주를 보이며 군인으로서 출사해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의 직책을 받게 되었다. 흥덕왕3년(828년) 초에 신라로 돌아온 그는 왕에게 신라인들이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리는 참상을 전하며, 완도에 군사 거점을 세워줄 것을 청했다. 마침내 승인을 얻어 1만여 명의 군대를 확보한 그는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세우고 대사(大使)가 되었다. 그의 활약으로 827년~835년 이후로 해상에서 신라 노예를 매매하는 일이 사라졌다고 《삼국사기》는 평가하고 있다.
해적 토벌에서 그치지 않고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과 일본뿐 아니라 남방, 서역 여러 나라와의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취하였으며, 아울러 큰 세력을 이루었다. 신라인들이 많이 이주한 산동성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신라인들이 법화원(法華院)을 건립하려 하자 그는 이를 적극 지원하였다. 또한 신라인 출신 노예들을 사들이거나 주인에게서 되돌려받아 석방시켰으며, 이들은 신라 출신 이민자들이 건너간 산동 주변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법화원은 상주하는 승려가 30여 명 이상이 되었으며, 토지를 기부하여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장전(莊田)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 신라인의 정신적인 중심지로 성장했고, 법회를 열 때 200~400명까지 인파가 몰려들었다. 골품제와 같은 기존의 신분제에 구애됨이 없이 유능한 인재들을 널리 받아들였고, 또 자신의 진영에 환대하여 신분을 따지지 않고 실력에 따라 대우하여 그들의 능력을 적극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빈민들을 규합하고, 새로운 활동 무대를 찾아 모여든 인재들을 포용하여, 8세기 이래 왕성하였던 신라인의 해상활동 능력을 적극 활용, 이것들을 묶어 조직화하였다.
흥덕왕이 재위 11년만에 죽고, 신라에서 일어난 왕위 다툼에서 김제륭(희강왕)에게 패하고 피살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피신해 오자 장보고는 그를 숨겨주었다. 그러나 김제륭도 재위 3년만인 939년 김명이 일으킨 정변으로 피살되고 김명(민애왕)이 스스로 즉위하자, 예전 김균정의 편에 섰다가 패하고 달아난 김양(金陽)이 군사를 모아 청해진으로 찾아와서 김우징을 만나고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나를 도와준다면 내가 왕위에 오른 뒤 당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에 동의한 장보고는 친구 정년에게 청해진의 군사 5천을 내주어 김양과 함께 왕경으로 진격하게 했다. 장보고와 정년이 이끄는 청해진 군사는 무주와 대구를 거쳐 왕경에 입성, 왕경군을 격퇴한 뒤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신무왕)을 추대한다. 이 공으로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책과 식읍 2,000호를 하사받았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이 즉위한 뒤에는 진해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문성왕 2년(840년) 일본에 무역 사절을 파견하고 당에도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는 등 삼각무역을 실시했다.
846년 장보고는 신라 왕실의 명을 받은 자객 염장에게 살해되었다. 문성왕 13년(851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주민을 벽골군(碧骨郡,지금의 김제)으로 옮겼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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