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이 여행의 목적지는 아니었다.
다만 청량산과 청량산성을 탐방하기 위해 가는 길목에 도산서원이 있어서 오다가다 산책겸 들리곤 했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걷다 보면 나름 선비가 된듯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선비처럼, 선비의 삶을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단지 이런 공기 좋은곳에 앉아 책이나 보라면 볼까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조선시대 사대부의 삶처럼 답답한 삶도 없을 것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야기 하겠지만 조선시대의 극심한 세력다툼 속에 그것이 당쟁으로 이어져 서로를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도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할 수 있는 즉, 벼슬자리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사회는 사대부가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가지 않으면 그야말로 할일이 하나도 없는 사회이기도 했다.
또 도산서원하면 퇴계 이황이 빠질 수 없고 퇴계를 이야기하자면 퇴계의 이기론, 사칠론은 물론이고 수양론과 궁리론을 통한 성리학의 개념적 분석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면 그야말로 머리에 쥐나기 시작한다.
나름 관심이 었었지만 그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저 아~하 그런 이야긴가 보다 하는데만 몇년은 걸렸을 것이다.
이왕 말 나온김에 퇴계의 사상에 대해 한번 짚고 넘어 갈까도 했는데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퇴계의 사상체계에 대한 책을 접한 이후 지금까지 딱한번 대학 4학년때 오다가다 만난 사학과 여학생의 논문을 대신 써주고 돈까스 하나 얻어 먹은 이후 살아가는데 쓸 일이 거의 없었다. 굳이 하나 더 이야기 한다면 도산서원의 옥진각이라 이름 지어진 퇴계선생의 유물 전시관에서 유물을 관람할때 “이게 그거구나”라며 고개가 끄덕여지긴 했다.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으로 경북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의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사실 이 간결, 검소의 개념도 지극히 사대부적 시각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로 이해한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와 부전교당속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도 함께 지어졌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 선생이 죽고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보물 제211호)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다. 2년 뒤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도산서원은 주교육시설을 중심으로 배향공간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교육시설은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과 중앙의 전교당(典敎堂)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서로 나누어진 광명실(光明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오늘날의 도서관에 해당한다. 동.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편 도산서당건물을 ‘박약재(博約齋)’와 서편 건물을 ‘홍의재(弘毅齋)’라 하는데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중앙의 전교당은 강학공간과 원장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재 뒤편으로는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자리하고 있다.
배향공간인 사당 건축물로는 위패를 모셔놓은 상덕사(尙德祠)와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이 있는데 삼문을 경계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부속건물로는 서원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상고직사(上庫直舍)가 있으며 이는 홍의재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 입구 왼쪽에는 1970년 설립된 유물전시관 ‘옥진각(玉振閣)’이 있는데, 퇴계선생이 직접 사용했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969년 본 서원을 중심으로 임야 및 전답 19필 324.945㎡이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증축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 되었다. 1977년 도산서원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관리운영조례를 제정 공포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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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앞에 있는 시사단.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3호. 안동댐으로 수몰되기 전에는 도산서원과 마주 보이는 강변의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비각이 세워져 있었는데, 1975년에 원위치에 10m 높이의 돌축대를 쌓아올린 뒤 원형대로 옮겨 지었다.
비각은 4면 1칸인 팔작지붕 건물로 비바람을 막기 위하여 중방(中枋) 밑에 판벽(板壁)을 둘렀으며, 추녀 네 곳에 모두 활주(活柱 : 추녀 뿌리를 받친 가는 기둥)를 받쳐 구조적 안전을 꾀하였다.
기둥 위 보 위에 올린 화반(花盤 : 초새김한 받침)과 공포(栱包)에 새겨진 초각(草刻)이 아름답다. 비각 안에는 1824년(순조 24) 비각을 다시 지을 때 새로 새겨 세운 비석이 있다.
이보다 앞서 1796년(정조 20)에는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이 도산별과(陶山別科)를 기념하려고 지은 글을 새긴 비석이 있었다.
즉 1792년 3월에 정조는 이조판서 이만수(李晩秀)에게 명을 내려서 이황(李滉)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별과를 신설하여 이 지방의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시행하고 기념하던 장소가 시사단이다. 참고로 도산별과는 급제(及第) 2인, 진사 2인, 초시(初試) 7인, 상격(賞格) 14인을 선발하는 특별시험이었다.
도산서원의 진입로.
도산서원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이 시사단이 눈에 들어온다.
도산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
앞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마당을 사이에 두고 도산서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서원 마당에 있는 보호수
서원 앞마당에 있는 우물.
이제 서원으로 들어가 보자.
서원 문을 들어서면 공간의 구분이 뚜렷함을 느낄 수 있다.
도산서당
도산서당은 선생이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1557년에 착공하여 1560년에 완공하였다.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가 직접 기본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서당은 一자 형태의 단정한 3칸 건물로 부엌, 온돌방, 마루로 되어 있다. 여기에 부엌 반 칸, 마루 1칸을 더 달아 내었고, 건물 3면에 퇴를 놓아낸 점이 특이하다. 덧지붕을 달고 마루를 연장하였으며, 방은 완락재(玩樂齋),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고 이름 붙였다.사색과 연구를 계속하며 제자를 교육하던 단칸방을 '완락재(玩樂齋)'라 하였으니 뜻은 '완상하여 즐기니 족히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이고, 제자를 가르치며 휴식을 취하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고 하는데,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해서 바위에 깃들어 조그마한 효험을 바란다.'라는 겸손의 뜻을 담고 있다.
측면에서 본 도산서당.
광명실
광명실은 서책을 보관하고 열람할 수 있는 오늘날의 도서관(藏書庫)인데 현판은 퇴계선생 친필이다. 진도문을 가운데 두고 동·서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습해(濕害)를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樓閣式)으로 지었다. 1819년(순조19)에 세워진 동광명실에는 역대 왕의 내사서적(內賜書籍)과 퇴계 선생이 친히 보시던 수택본(手澤本)을 보관하였다. 원래는 동광명실만 있었으며 서광명실은 근대 들어 증건(增建)하였다.
* 광명(光明)은 ‘만권서적(萬卷書籍) 혜아광명(惠我光明)', 즉 '수많은 책이 나에게 광명을 준다' 의미이다.
나란히 두개의 광명실이 있다.
진도문
도산서당의 위쪽으로 서원을 건립하면서 도산 서당과 농운 정사의 사이에 진입로가 만들어졌다. 진도문은 이 진입 공간을 따라 서원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아래쪽의 서당 영역과 서원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외부와 경계를 짓는 문으로 편액을 걸어 상징적인 예교(禮敎)의 의미를 갖게 하였다.
전교문을 들어서면 전교당이 보인다.
전교당
서원의 강학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이며 원장실과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를 높여 위엄을 살렸고 양쪽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성리학자들이 기피하는 짝수 칸의 구성이 특이하며, 서쪽 1칸만 온돌방이어서 비대칭을 이루고 있다. 온돌방은 원장의 거실로 명칭은 한존재(閑存齋)이다. 대청 전면 3칸은 문짝을 달지 않고 개방하였으나, 측면과 뒷면에는 각 칸마다 2짝의 여닫이 창호를 달았다.현재 모습은 1574년 처음 지은 것을 1969년 보수한 것이다. 전교당 정면의 현판은 조선 중기의 명필 한석봉(韓石峰)의 글씨로 1575년 선조로부터 사액(賜額)받은 것이다. 강당 벽면에는 원규(院規), 백록동규(白鹿洞規), 정조의 사제문(賜祭文), 국기안(國忌案), 사물잠(四勿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보물 제 210호로 지정되었다.
앞에서 보았던 광명실이다. 전교당의 마당에 있다.
서재인 홍의재(弘毅齋)는 동재인 박약재와 마찬가지로 원생의 기숙소이다. 강당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에 위치하며, 서쪽에 자리하고 있어 서재(西齋)라고도 한다. 동재에 기숙하는 원생이 서재의 원생보다 선배이지만 두 건물은 규모나 장식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동재와 서재 모두 3칸 집으로 전면의 반 칸을 내어 쪽마루를 달았다.* 홍의(弘毅) - 선비는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그 책임은 무겁고 도학의 길은 멀기 때문이다(士不可以不 弘毅 任重而道遠)
상덕사로 들어가는 사당문으로 내삼문(內三門)이라고도 불린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삼문 형식으로 상덕사와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계단 때문에 문 안쪽과 높낮이의 차이가 생겨 전면 기둥을 1단 낮은 자리에 세웠다. 이러한 이유로 기단 아래까지 기둥이 내려오는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역태극 문양에 단청을 하였다.
상덕사는 도산서원의 묘우(廟宇)로서 퇴계선생과 그의 제자인 월천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보물 제 211호이다. 일반적으로 사당 건물은 간결하고 근엄한 맞배지붕으로 구성하는데 도산서원의 사당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어 특징적이다. 전면 반칸은 퇴칸으로 개방하고 퇴칸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으며, 나머지 1칸 반은 전면에만 문을 달았다. 전면을 제외한 삼면은 벽으로 처리하고 내부는 하나의 통칸(通間)으로 하였다.월천은 선생 곁에서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였고 선생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는 스승을 대신하여 서원에서 제자들을 훈육하였으며 특히 청렴 강직함이 돋보인 수재(秀才)이다. 주향위(主享位)는 정면 중앙에서 남향으로 '退陶 李先生'을 모시고 종향위(從享位)는 동쪽벽에서 서향으로 '月川 趙公'을 모시고 있다.
전교당의 뒷편.
상고직사
서당 영역에서의 고직사와 구분하기 위해 서원의 고직사를 상고직사라고 한다. 상고직사는 서원의 관리와 식사 준비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노비들이 거처하던 곳인데 일반 살림집의 형태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남북으로 긴 'ㅁ' 자형을 이루며 온돌방 7칸에 창고, 부엌 등을 합쳐 총 21칸으로 되어 있다. 전사청과 연결되어 있는 동쪽 통로와 하고직사로 연결되는 남쪽 통로 옆에 각각 부엌을 배치하여 생활에 편리함을 더하였다.
하고직사
도산서당과 기숙사, 서재, 부속시설을 관리하고 식사 준비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노비들이 거처했다. 지금의 건물은 1932년 옮겨지은 것으로, 원래는 6칸의 'ㄷ' 자 건물이었는데 이건(移建)하면서 동서 날개부가 1칸씩 증축되었다. 처음에는 서당과 같은 공간에 있었으나 서원 건립으로 진입로가 놓인 까닭에 농운정사와 함께 서당에서 분리된 모습이 되었다.
서원을 나오면 들어갈때 보았던 우물과 보호수가 있다.
그리고 낙동강이 펼쳐진다.
다음 사진에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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