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군에는 강화 나들길이 있다. 모두 21개코스로 이루어진 방대한 걷기 코스이다.
물론 이것을 다 걸어보는 것은 모험일 수는 있으나 그 내용과 여건을 고려해서 선택적으로 여행하는 것도 나름 의미는 있을 것이다.
이번에 간 코스는 강화나들길의 2코스 호국 돈대길이다. 오래전부터 강화는 나라의 안전을 지켜주는 소중한 터전이자 외국의 문화가 바닷길을 통해 육지로 들고 나던 관문이었다. 남과 북의 강물이 함께 흐르는 바다를 따라 걷다보면 외국과의 충돌에 대비하기 위해 섬을 빙둘러 만든 돈대를 만나게 된다. 몽골과의 항쟁에서부터 조선시대의 병인,신미양요에 이르는 국난극복의 의지가 서린 강화도의 전적지를 살펴보는 길이다. 호국돈대길은 강화대교를 건너 왼쪽에 위치한 갑곶돈대를 시작으로 염하를 따라 초지진까지 이어지는 15.4km의 해안길로서 2010년에 '해안누리길'로 선정된바 있다.
그러나 지금은 광성보에 대해서만 다루기로 한다.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조선 광해군 10년(1618년)에 고려시대의 외성을 보수하고, 1656년 광성보를 설치했는데, 이 보의 돈대는 1679년에 축조된 것이며 오두, 화도, 광성의 돈대와 오두정 포대가 이 보에 소속되었다. 1745년 완전한 석성으로 개축되어 당시 성문도 설치되었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당시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로서, 1871년 4월 24일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였을 때,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용사가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고 장렬히 순국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 후 성책과 문루가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7년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그리고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이 모두 보수 정화되었으며, 이 때 세운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가 용두돈대 위에 서 있다. 1998년에는 해변쪽으로 넓은 휴식공간을 조성하여 관광객들에게 이용 편의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광성보는 현재 사적 제 2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음력 4월 24일에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하여 장렬하게 전사한 무명용사들에 대한 광성제가 11:00부터 봉행된다. 이 광성보는 당시에 사용한 대포와 포대, 성이 잘 남아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답사 오기에 좋으며,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망과 돈대의 곡선 모양이 인상적이다.
아래를 클릭하면 함께 여행할 수 있답니다.
광성보. 저 문을 지나면 강화해협이다.
광성보를 보자니 신미양요를 다루지 않고 넘어가기가 어려울 것 같다. 신미양요를 알고 이 광성보를 보면 주변의 나무 한그루 성벽의 돌덩이 하나, 그리고 도도히 흘러가는 듯한 강화해협까지 가슴으로 의미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아, 그랬구나” 정도로만 이해를 해도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 믿는다.
신미양요는 한마디로 조선 왕조와 미국의 최초이자 마지막 전쟁이며 서구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킨 사건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측에서 이 신미양요를 보는 관점은 그때당시 그들의 신문에 난 제목이 “이교도와 우리의 작은 전쟁(Our little war with the heathen)”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신미양요를 바라보는 양국의 시각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신미양요는 이 사건이 일어나기 5년전인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제너널 셔먼호 사건은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 공격 및 만행을 저지르던 제너럴 셔먼호를 불살라 버린 사건으로 이에 대한 미국의 항의로 발생한 사건이 신미양요이다. 이때 미국은 은근슬쩍 강제 개항 의도를 가지고 1871년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이 때 미국은 남북전쟁의 진통을 겪고 있던 때라 5년의 시간차가 생기게 되었다)이 신미양요이다.
미국은 1871년 2월21일에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을 공동 조사하자는 의견을 피력한 바가 있다. 미국은 이미 흑선사건이라는 경험을 통해 포함외교(gunship diplomacy)에 맛을 들이고 있었고, 조선도 마찬가지로 수월하게 개항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판단에는 조선군의 전투력이 별 볼일 없으리라는 판단도 한몫 했는데, 대체로 맞는 사실이었으나 조선군의 전투 의지에서 만큼은 예측이 틀렸고, 이는 나중에 원정군을 이끄는 로저스 제독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때 조선은 청나라를 통해서 미국에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요약하면 "국적선 조난문제면 구호해서 해당 국가로 보낼 테니 걱정할 것도 없고, 교역 문제는 만들어낼 물건도 없고 팔 물건도 그렇게 넉넉지도 않고 그나마 우리 쓸 것도 많지 않으니 장사 못함다."란 얘기였다.
하지만 미국은 이에 대한 답신을 보내지 않았고, 1871년 4월 9일에 함대를 배치하고 편지를 보냈다.
서양 사람의 편지에서, ‘회답을 올립니다. 어제 영업선에서 편지를 받아보니, 「우리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여기에 온 것은 무슨 일 때문이냐?」고 하였고, 「여기로 온 경위를 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등의 내용이었는데, 이미 이 문제들을 우리 흠차대인(欽差大人)과 제독대인(提督大人)에게 편지로 알렸고, 회답을 해주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 배는 대아메리카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 즉 대미국(大美國)의 배이며 여기에 온 것은 우리 흠차대인이 조선의 높은 관리와 협상할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약을 체결하려면 아직도 날짜가 필요하므로 우리 배는 이 바다 한 지역에서 정박하고 있으면서 조약이 체결되기를 기다렸다가 돌아가겠습니다. 배에 머물러 있는 두 대인은 다 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미국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는 어전회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고종은 영의정 김병학에게 "미리견(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라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김병학은 "미리견이란 나라에는 작은 부락만 있으며, 화성돈(워싱턴)이란 촌장이 나와서 영길리(영국)와 교섭하면서 만든 촌락 정도의 나라"라면서 "바다를 왕래할 때 약탈하는 습성이 있는 해적과 다를 바 없는 이들"이라고 답하였다. 이에 고종은 "그렇다면 오랑캐와 통교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이 얼마나 세상과 단절되었는지 알 수있는 대목이다.
위와 같이 개항 요구가 끝내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은 로저스 제독을 지휘관으로 하는 원정대를 편성했으며, 프랑스에도 연합 제의를 했으나, 프랑스는 병인양요 당시 작성한 지도 정도만 넘겨주고 협력을 거부했다. 결국 미국 단독으로 5월 14일 나가사키에서 출항해 5월 21일 수원 인근에서 조선 측에 포착된다. 조선은 5월 31일에 문정관을 파견해 이들의 접근 의도를 추궁했으나, 미군은 문정관의 추궁에 딴청으로 일관하며 고위 관료를 만나게 해 달라는 요구만 반복한다. 조선 측은 협상을 하자면서 군대를 끌고 온 것은 무슨 도리이며 개항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고 이를 일축한다.
첫 접촉이 허사로 끝난 이후 미해군의 함대가 한강의 수심을 측정하면서 6월 1일 강화도와 본토 사이의 수로인 손돌목에 접근하여 오자, 강화도의 조선군이 경고 포격을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남북전쟁 참전자인 당시 함장들 중 한 사람이 남북전쟁 때도 이렇게 맹렬한 포화를 받은 적은 없었다고 술회할 정도로 치열한 화망사격으로, 공식 역사는 이 사건을 손돌목 포격사건이라고 부른다. 400문에 달하는 양측 화포가 불을 뿜었으나, 피해는 미군 부상 1, 조선군 전사 1명에 불과했다. 서로 그냥 맹목적으로 쏴댄 후 미군이 먼저 물러난 것으로 결말지어졌는데다가 조선군의 포가 워낙 낙후 되었기 때문이다.
한차례 교전을 벌인 미군은 대원군과 글을 주고 받는다.
“올봄에 북경(北京) 예부(禮部)에서 자문(咨文)을 보내어 귀국 사신의 편지를 전해왔기에 우리 조정에서는 이미 의논하고 회답 자문을 보낸 동시에 귀 대인에게 전해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 생각건대 귀국은 예의를 숭상하는 풍속이 본래 이름난 나라로 다른 나라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귀 대인은 아마도 사리에 밝아서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을 터인데, 이번에 어찌하여 멀리 바다를 건너와서 남의 나라에 깊이 들어왔습니까? 설사 서로 살해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지만 누구인들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요새지에 갑자기 외선(外船)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모든 나라의 일반적 규범으로써 처지를 바꾸어놓고 보아도 모두 그러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귀선(貴船)이 바닷가 요새지를 거슬러 올라와서 피차간에 대포를 쏘며 서로 경계하는 조치까지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미 호의로 대하자고 말하고서도 한바탕 이런 사단이 있게 되었으니 매우 개탄할 노릇입니다. 귀선이 오고부터 연해의 관리들과 무관들에게 절대로 사단을 일으켜 사이가 나빠지게 하지 말라고 경계하여 타일렀습니다. 그렇지만 귀선이 다른 나라의 규례를 아랑곳하지 않고 요새지 어구까지 깊이 들어온 이상 변경을 방비하는 신하들로 말하면 그 임무가 방어인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일에 대해 괴이하게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혹시 북경 예부에서 우리의 회답 자문을 미처 전하지 못하여 귀 대인이 우리나라의 제반 사정을 잘 알지 못하여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닙니까? 이제 회답 자문 부본을 보내니 한번 보게 되면 남김없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외국과 서로 교통(交通)하지 않는 것은 바로 500년 동안 조종(祖宗)이 지켜온 확고한 법으로서 천하가 다 아는 바이며, 청나라 황제도 옛 법을 파괴할 수는 없다는 데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귀국 사신이 협상하려고 하는 문제로 말하면 어떤 일이나 어떤 문제이거나를 막론하고 애초에 협상할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높은 관리와 서로 만날 것을 기다리겠습니까?
넓은 천지에서 만방의 생명들이 그 안에서 살면서 다 제대로 자기의 생활을 이루어가니 동방이나 서양은 각기 자기의 정치를 잘하고 자기의 백성들을 안정시켜 화목하게 살아가며 서로 침략하고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니, 이것은 바로 천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혹시 그렇지 못해서 위로 하늘을 노하게 한다면 더없이 상서롭지 못할 것입니다. 귀 대인이 어찌 이 이치를 모르겠습니까?
풍파만리에 고생하였으리라 생각하면서 변변치 못한 물품으로 여행의 음식물로 쓰도록 도와주는 것은 주인의 예절이니 거절하지 말고 받아주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대아메리카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 찬리(贊理) 흠차(欽差)인 영어, 한어 문건을 맡아보는 총판두(總辦杜)는【이름은 덕수(德綏), 중국인이다.】 회답합니다. 며칠 전에 군주가 파견한 우리나라 관리에게 보내온 공문과 대청(大淸) 나라 예부(禮部)에 회답한 자문 부본에 대해 다 같이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提憲)에게 전하였으며 명령을 받들어 이렇게 회답합니다. 당신들에게서 온 편지에서 언급한 내용에 의하면 귀 조정이 우리나라 군주가 파견한 관리와 그가 와서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의를 가지고 협상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이 매우 안타까워하는 문제입니다.
까닭 없이 공격한 문제에 대해서는 잘못을 책망하지 않고 도리어 비호하면서 변경을 책임진 신하의 직책으로서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제헌은 원래 포를 쏜 행위는 군사와 백성들의 망동에서 생긴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귀 조정에서 이것을 알고 꼭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높은 관리를 파견하여 협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서둘러 행동하지 않고 기일을 늦추어가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만일 귀 조정에서 3, 4일내에 만나서 협상할 의사가 없이 기한이 되기만 기다린다면 전적으로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이 처리하는 대로 할 것입니다. 기일이 매우 촉박하므로 대략 이와 같이 적습니다.
보내준 많은 진귀한 물건들을 받고 은혜와 사랑을 충분히 알 수 있으며 무엇이라 감사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보내온 예물을 돌려보냅니다. 이와 같이 회답합니다.”
미국은 대원군의 주장에 포격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하면서 거듭 고위 관리를 보내서 협상할 것을 요구했지만 대원군은 당연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에 로저스 제독이 지휘하는 미 해군은 6월 10일에 상륙해 덕진진과 초지진을 점령, 이어 어재연이 지키던 광성보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과 미국의 전력 및 피해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미군
군함
- USS Colorado(1856년 건조/3425톤/10인치 포 2문, 9인치 포 28문, 8인치포 14문)
- USS Alaska(1868년 건조/2394톤/11인치 활강포 1문, 60파운드 포 1문, 20파운드 포 2문)
- USS Palos(1865년 건조/420톤/포 2문)
- USS Monocacy(1864년 건조/1370톤/13인치 구포 1문, 32파운드 포 2문)
- USS Benicia(1868년 건조/2400톤/11인치 활강포 1문, 9인치 활강포 10문, 60파운드 강선포 1문, 20파운드 후장식 강선포 1문)
병력
- 해군 및 해병대 1,230명, 12파운드 곡사포 85문
조선군
지상병력
- 500여명.주무장은 화승총
양측 피해
미군: 전사 3명, 부상 10명
조선군: 전사 243명, 익사 100여명, 포로 20명 초지진, 덕진진 및 광성보 시설 함락 및 조직적인 파괴와 요새 중장비 전량 노획 및 파괴, 수자기 약탈
강력한 근대식 신식 화기로 무장하고 인디언전쟁과 남북전쟁등을 거치며 단련된 미 해군에게 병력과 화력 모두 열세였던 조선군은 그야말로 참패했다.
조선군의 경우 미 해군의 상륙작전3일 전에야 가까스로 파견된 중앙군 3개 초(오늘날의 중대급)를 광성보에 집중 배치, 미군의 공격을 강화부에서 광성보로 유도하려 했다. 이를 위해 조선군은 미군 상륙 당일 지방군 소병력을 초지진 야습에 투입해서 미군의 반격을 유도했고, 이후 해안도로를 따라 북상하는 미군 앞에서 소규모 척후 병력을 수시로 투입해 미군의 관심을 광성보 쪽으로 돌리려는 두드러진 시도를 반복했다.
이후의 전투에서도 조선군은 예하 3개 초가 모두 타 군영 소속이어서 제대로 된 전투 조직을 구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여기에 이들은 지휘관 어재연을 제외하고는 강화도에 와 본 적이 아예 없어유리한 방어 위치가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말 그대로 눈뜬 장님 상태였다. 여기에 화력조차 열세인데다 화력 집중을 위한 훈련도감 기반의 기초 훈련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것이 19세기 후반 조선군의 현실이었던 탓에, 미군이 본격적으로 광성보를 공격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조선군은 조직적인 화망을 구성하지도 못했고 그저 개별적으로 총격을 가했기 때문에 미군에게 사실상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무려 200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천천히 전진하는 동안 조선군 200여 명에게 집중사격을 당했음에도, 총에 맞은 미군은 단 2명(해군 견습수병(Landsman)과 해병상병(Corporal) 제임스 도허티 포함 각 1명) 뿐이었다. 나머지 미군 사상자는 모두 성벽 위에 기어오른 뒤에야 발생했는데 미군 전사자 가운데 가장 계급이 높은 휴 맥키 해군 대위(추서 계급, 전사 당시 중위)는 다 죽어가던 조선군이 마지막 힘을 다하여 찌른 창에 배가 뚫려 치명상을 입고 후송되었다가 USS Monocacy 함에서 죽었다. 미군 측 기록에 의하면 다 죽어가던 조선군이 맥키를 찌르고 자신들을 노려보면서 그도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참패의 와중에서도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고 결사항전 했다. 패배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단 한 명의 탈영병도 없었고, 거의 학살 수준에 달한 광성보 전투에서도 미군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몰아붙여도 끝까지 싸웠고 무기가 없는 자는 돌을 던기거나 흙을 뿌려서 저항했다. 함락 직후 패잔병들에게 말을 걸려고 시도했으나, 바로 자살하는 이도 있었다. 미군들을 노려보며 투신 자살하거나 아니면 미군의 총검을 잡고 자기 목을 찌르라는 투로 대던 조선군도 있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피투성이 조선군을 고통없이 죽여주자던 미군도 있었을 지경이었다.
일단 위의 전사자와 부상자 수 비교를 보면 저게 정상적인 전투에서 나올 수 있는 비율이 아니다. 공격 측에서 사람이란 사람은 다 죽일 각오로 하거나 방어 측에서 다 죽을 각오로 싸우지 않는 한 나올 수 없는 수치. 그 전에 저 정도 전사비 자체가 왠만한 전력 차이로는 불가능한 비율이기도 하다.
남북전쟁의 베테랑들도 독종같이 달라붙는데 질릴 대로 질린 모양이었다. 구식이고 낙후되었긴 해도 400여년간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굵직굵직한 전투를 벌이며 쌓아온 경험과 대원군 하에서 그럭저럭이나마 군사 기반을 갖추었던 중앙집권국가인 조선이기에 동양의 국가들과 제대로 된 전투를 치룬 경험이 없고, 그저 막연히 유색인종이기에 오합지졸일 것이라거나 신비주의로만 생각했던 미국의 입장에서, 패배하긴 했어도 무서울 정도로 처절했던 조선군의 저항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전투 개시 전, 조선군의 군가를 들은 한 미군 수병은 "무섭도록 구슬프고 장엄하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참고로 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도 로저스 제독이 손돌목 포격전에서 조선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돌아온 미군 장교에게 이게 뭐하는거냐며 강력히 질책하자 그 장교는 남북전쟁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렇게 강력한 포격전은 경험한 적이 없다고 보고한다. 그 말에 로저스 제독이 그걸 말이라고 하냐며 미국군 장교에게 분노하자 로우 공사가 나서서 말리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군인들의 기강 문제와는 별개로 전략적인 측면에선 시작부터 실패한 일이기도 했다.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최소한의 병력이라도 수습해서 후를 도모하는 것이 기본이므로 당시 조선군의 지휘 체계가 얼마나 망가져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투 중간에 지휘관 자리에 있는 어재연이 전사해 지도력의 부재가 있었고,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해군의 상륙을 허용해 왕실과 직접 연결된 기관인 외규장각이 털린 경험이 있는 조선 입장에서는 상륙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제1 방책이었을 테니 유연한 대처를 기대하기 어렵기도 했다.
조선군은 광성보가 함락된 후에도 초지진 등지에서 첨사 이렴의 지휘아래 야간기습을 가했고 미 해군 함정 한 척을 패퇴시키는데 성공한다. 미군은 악착같이 덤벼드는 조선군에게 질려버린데다가 한양까지 점령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광성보를 점령한 바로 다음날인 6월 11일에 철군해버렸고 조정은 3일 후인 6월 14일에 그것을 확인한다.
미국은 마지막으로 사로잡은 포로들로 협상을 시도하나, 조선 조정은 "수치스럽게 살아 포로로 잡힌 이들은 알 바 아니다"라고 딱 잘라 거절했고 미국은 별 수 없이 이들을 그냥 석방해 버렸다. 이들을 찍은 사진이 미국에 남아있다. 포로로 잡혔던 그들은 미군이 주는 밥을 내던지며 일절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저런 냉담한 말과는 달리 조선 조정은 정작 포로들이 귀환하자 치료와 구휼을 베푸는 등 잘 대해 주었다. 이로 보면 저 '수치스럽게 살아 포로로 잡힌' 운운은 오늘날의 '테러와의 협상은 없다'와 비슷한 발상에서 나온 뻗대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현대의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조선 조정의 반응이 너무 냉혹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미 해군이 철수한 이유는 다른 것도 있었는데 광성보를 공격하느라 탄약의 반 정도를 소모했고, 식수도 부족했으며, 풍토병이 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후 로저스 제독은 미국으로 귀환 후에 대체 그 비싼 원정비용 쓰고 얻은게 뭐냐고 크게 질책당했다. 불안정한 일본의 경우 신미양요와 같은 사건으로 정권이 붕괴할 가능성을 고려해 개항을 진행하였지만, 조선은 통치권이 아직 견고한 중앙 집권 상태였기 때문. 미군은 철수하면서 조선군 시신을 일부 수습해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장교진은 그대로 매장, 일부 조선병사들은 화장을 했는데 이후 시신 수습을 위해 도착한 강화도 진무사 정기원은 얼굴도 알아볼 수 없게 병사들을 불로 태워 화형시켰다며 분노하는 장계를 올리기도 했다.
역사적 결과
미국
미군 전사자는 불과 3명 뿐이었지만, 전사자 수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미국의 목표는 최소한의 피해로, 단기간에, 조선을 개항시키려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 프레드릭 로우는 이같은 목표에 충실하게 움직여, 무력 충돌 전후에 조선과 대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군사적인 이득이나 피해와는 상관없이 결과는 조선의 개항 거부였다. 따라서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다음 두가지 중 하나였다. 본격적으로 침략하거나, 그냥 포기하고 물러서거나.
결과적으로 미국은 이 이상의 출혈을 감수하여 침략할만한 가치는 없다고 생각하여 한반도를 포기하게 된다.
미국 입장에선 남북전쟁이 끝난 지도 얼마 안 되어서 더이상 외부에서 전쟁을 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한번 건드려 봤는데 예상보다 저항이 심각하고, 자기들의 병력과 식량도 부족한 상태여서 더이상 뭘 할 수가 없었다.
조선
전투 이후 대원군은 지지세력의 결속을 위해 척화 전쟁의 승리를 선전하고, 척화비를 전국에 세운다. 덤으로 기세를 몰아 대원군은 전국적으로 서원철폐도 단행한다.
문제는, 조선인들도 바보는 아니었다는 것. 미국이 물러가긴 했지만 조선군 전멸이라는 결과는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박규수를 비롯한 개화파는 통상 거부 정책의 한계성을 재인식했고, 위정척사파는 위정척사파대로 흥선군의 개혁 정치 및 남인 등용으로는 양이의 군대를 막아낼 수 없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결국 단기적으로 신미양요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 힘을 실어주었으나, 내적으로 쌓이는 반발과 불안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사건 불과 2년 뒤, 대원군은 최익현의 탄핵으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하게 된다.
그런데 정작 집권한 고종은 개국, 개화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신미양요가 일어난지 불과 4년 뒤, 일본이 미국을 흉내내어 운요호를 보내자, 별다른 충돌없이 냅다 개국해버린다.
신미양요는 면제배갑이 활용된 전투이기도 하다. 의외로 총검이 면제배갑을 잘 뚫지 못해 미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미군은 이걸 노획해서 전시하기도 했다. 현재 단 1개만 남았는데, 한동안 미국에 있었다가 임대형식으로 반환받았다. ( 면제배갑 1866년 병인양요에서 프랑스와 전투를 치른 조선은 서양의 무력도발에 경각심을 갖게 되었고 앞으로의 도발에 준비하게 된다. 특히 서양의 총기류의 우수함에 주목한 조선 조정은 총기공격을 무력화시키기기 위한 방도를 찾기 시작했고, 이에 흥선대원군은 서양의 총탄을 막아낼 갑옷을 제조하도록 명한다. 당시 무기제조자였던 김기두와 안윤 (또는 강윤)은 조정의 명에 따라 면갑과 철갑 등으로 실험을 거듭한 결과, 면 12겹에 총탄이 뚫리지 않음을 확인, 면 13겹으로 만든 면갑을 만들어 내게 된다. 병인양요 직후에 만들어진 이 면갑은 곧 조선병사에 배포 되었고, 1871년 신미양요 때 실제로 사용된다. 면제배갑은 실제 총탄을 막아내기는 하였으나, 한여름에 착용하기는 너무 더웠고, 또한 불에 약하여 쉽게 불타버리는 약점이 있었다. 1871년 여름, 강화도를 침공한 미군은 총알세례에도 용맹하게 달려드는 조선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적고 있으며, 대포 공격으로 파편에 맞아 불에 붙은 조선군을 보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미군은 그 중 한 점을 노획해 미국으로 가져갔다. 최근까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보관되어왔던 것이 세상에 알려져, 이 방탄조끼의 존재가 한국에 알려졌다.)
참고로, 이 당시 남북전쟁을 겪었던 미 해군 베테랑들에게도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던 조선군의 끈질김은 겨우 4년 후에 벌어진 운요호사건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상대는 미군 해군의 군함도 아니고 무장상선에 불과했고 숫자도 훨씬 적었는데 말이다. 이유는 군수품 문제. 그 당시 고종이 일대 군영의 주요 수입원이던 경강수세를 갑자기 혁파하는 병크를 저질러서, 몇달씩이나 군수 지원이 끊겼었다.
다른 국가와 비교해보자면,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때 에도막부가 데꿀멍해서 전쟁은 피했다. 베트남은 프랑스의 선교사 살해를 명분으로 한 침공에 어설프게 전쟁을 벌였다가 국가적으로 망했다. 하지만 10여년 전 벌어진 사쓰에이 전쟁 시모노세키 전쟁과 함께 비교하면(...)그 밖에도 무수한 나라들이 서구 열강들에게 비슷하게 밀렸다.
신미양요 당시 미 해군에게 빼앗긴 어재연 수자기는 2007년부터 '10년 대여' 조건으로 국내에 들어와 있다. 이 유물은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 시대 실물 군기유물이라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조선시대의 군기는 프랑스 성 루이 성당에 있는 깃발을 비롯해서 여러 개가 남아있다. '10년'이라는 기간제한과 '대여'라는 표현에 피약탈국으로서 반감이 드는 건 어쩔수 없겠지만, 약탈문화재의 세계에서는 10년 대여 조건도 결코 박하다고 할 수 없으니(오히려 후한 조건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달갑지 않으나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열악하기 그지없는 한국의 군사유물 보존 실태를 고려하면 냉정하게 말해 저 깃발은 미군이 가져가서 잘 보존해준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 안 그랬으면 우리는 수자기를 영영 그림으로나 봤을 것이다. 게다가 전시 교전으로 인해 얻은 정당한 노획품(민간에서 약탈한 물건이 아닌 병기나 군 피복, 서류 등 군사 및 정부 물품들.)은 국제법상 따로 조약으로 규정하지 않는 이상 상대국에 반납할 의무도 없다.
그리고 내용을 읽어봤으면 알겠지만, 병인양오와 함께 국사와 한국 근현대사교육 과정을 비판할 때 빠지지 않는 사례이기도 하다. 서술 자체가 상세내용을 생략한 채 거의 승전처럼 되어 있으니. 물론 서술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닌 게 어찌되었건 미국측이 자신들의 목표인 조선의 개항을 이루지 못했다.일단 정치적으로 미국이 원하는 것을 하나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으니 완벽한 승리는 아니다. 정리하자면 미국이 조선을 군사적으로는 압승을 거두었으나 조선의 개항이라는 정치적 목표의 달성에는 실패했다. -출처 위키위키-
신미양요를 알고 보니 우째 쫌 달라 보이나 모르겠다.
* 오른쪽이 홍이포 - 포구장전식 화포로서 사정거리 700m이며 조선영조때 부터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나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이 약하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격할때 나온 그 홍이포이다.
* 중간 소포 - 장전후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로 사정거리 300m 우리나라 재래식 화포중 가장 발달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 왼쪽 작은 포가 불랑기 - 불랑기는 프랑스군이 사용하던 것으로 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화승포로서 포1문에 다섯개에서 아홉개의 자포를 결합하여 연속 사격 할 수 있는 발달된 화기이다.
* 광성 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나로서 숙종5년(1679)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하였다 한다. 1977년 포좌 4개소와 포 3문이 복원 설치되었다.
저 강화 해협에 미군의 군함이 있었을 것이고 이 성문을 밀고 미군이 들어왔을 것이다.
해협쪽에서 본 광성보.
마치 강이 흐르는 것 같다. 강화해협의 조류에 얼음조각들이 떠가고 있다.
해협쪽으로 난 포대.
무심하게 얼음조각들만이 떠가고 있다.
대명포구에서 바라본 강화도.
'걷기 좋은길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학사상의 고향 안동 도산서원 (0) | 2018.01.06 |
---|---|
진안 고원길 1구간 마이산을 걷다 (2) | 2018.01.04 |
대부도 해솔길 1코스 (1) | 2017.12.14 |
인천 둘레길 13코스 월미도를 걷다. (0) | 2017.12.08 |
인천 소래습지 생태공원의 아침 (0) | 2017.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