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에 앞서 저 멀리부터 아픔이 먼저 찾아오고 떠올리기도 전에 이미 세상을 녹여버릴듯한 절망과 자학이 빠른 걸음으로 찾아와 이렇게 사람을 혼절부터 시키고 만다.
그날도 팽목항에는 유독 비가 많이 내렸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차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지만 단지 비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처음이 아니었다.
벌써 몇번째 이 팽목항을 찾아 왔지만 한번도 차에서 쉽게 내리질 못했다.
기록하나 남기겠다고 손에서 카메라를 만지작거렸지만 한번도 카메라를 들고 내린적이 없었다.
그저 이 아픔하나 담아낼 마음의 공간하나 장만하지 못하고 번번히 발길을 돌렸고 이번에도 그랬다. 그렇게 발길을 돌려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곳이 이 진도 석성이었다.
솔직히 이곳에 이런 성이 있는 줄 몰랐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흥분된 가슴으로 이 성을 바라 봤는지 모를 것이다. 어쩌면 몇번씩 헛걸음으로 돌아가는 나에 대한 선물이라 여기고 싶었다.
그래서 더 감사하고 남다른 감흥으로 이 진도 석성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진도석성은 팽목항에서 차를 남쪽으로 돌려 조금만 가면 남동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 감싸고 있다.
진도 석성은 사적 제127호. 둘레 54m, 지정면적 20,169㎡. 고려 원종 때 배중손(裵仲孫)이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로 남하하여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으면서 쌓은 성이라고 전한다. 진도군에는 백제시대에 이미 3개 고을이 있었는데, 그 중에 진도군에 속한 것이 도산현(徒山縣 : 지금의 嘉興)과 매구리현(買九里縣 : 지금의 臨准)으로, 매구리현의 중심이 구도포(九桃浦)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러한 고을들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3세기 초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가 연해지방을 노략질하므로 1350년(충정왕 2)에는 진도의 관부(官府)와 백성들이 세종 초까지 내륙지방으로 피하여 살다가 귀향하였다. 남도포(南桃浦)에 만호부(萬戶府)가 처음 생긴 것은 1438년(세종 20) 정월의 일로, 이로 미루어 보면 현존하는 성은 그 뒤에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남도포성은 동쪽에 있는 금갑보(金甲堡)와 더불어 명양(鳴洋)으로 돌아가는 바닷길의 요새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북상하는 위치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1555년(명종 10) 5월 서해안으로 북상하던 왜적들에게 남도포와 금갑보가 분탕질당한 경우도 있고, 또 이곳의 만호들이 그들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1683년(숙종 9) 6월에는 육군의 진관체제(鎭管體制)와 같은 수군진관(水軍鎭管)을 현재 전라남도의 위도(蝟島)와 가리포(加里浦)에 두었는데, 남도진(南桃鎭)은 가리포진관에 딸린 수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 남도 석성의 남다른 의미는 몽골의 침입에 끝까지 저항한 삼별초의 항몽의 근거지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삼별초는 고려 무신정권(武臣政權) 때의 특수군대로 대몽항쟁(對蒙抗爭)으로 이름을 떨쳤다. 1219년(고려 고종 6) 최충헌(崔忠獻)의 정권을 계승한 최우(崔瑀)가 방도(防盜) 등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비롯되었다. 별초란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그 뒤 야별초에 소속된 군대가 증가하자 이를 좌별초·우별초로 나누었다. 여기에다 몽골 병사와의 전투 중에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 이를 좌 ·우별초와 합하여 삼별초 조직을 만들었다.
삼별초는 몽골의 침입전까지는 전투와 경찰, 그리고 형옥(刑獄)의 임무를 맡았다. 당초 삼별초의 출발이 야별초에 있었고, 야별초의 출발이 도둑을 잡는 데 있었기 때문에, 삼별초가 도둑을 잡고 난폭(亂暴)을 금지하는 일은 삼별초의 경찰 직무를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그리하여 삼별초는 전국에 걸쳐 경찰권을 행사하였다. 형옥의 기능에 있어서는 죄인을 잡아서 가두기도 하고 죄를 심문하기도 했는데, 도둑뿐만 아니라 반역 죄인까지도 관할하였다. 군사 활동에 있어서는 수도경비대·친위대·특공대·경찰대·전위대(前衛隊)·편의대(便衣隊) 등의 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그리고 1254년 몽골의 차라대(車羅大)가 침입하자 경상도와 전라도의 야별초 각각 80명씩을 가려 도성(都城)을 수비하게 하였다. 특히 몽골과의 전투에서 처음에는 정부 정규군의 활동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1253년 무렵부터는 정부 정규군의 활동은 거의 없어지고 이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것은 병제(兵制)가 문란해 정부의 정규군이 무력해진 반면,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야별초 내지 삼별초를 강화한 데에 그 원인이 있었다.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몽골과 강화(講和)가 성립되고 고려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삼별초는 이에 반발하여 1270년(원종 11)에 반란을 일으켰다. 독자적으로 정부를 세우고 정부와 원에 대항하여 진도(珍島)를 본거지로 삼아 독자적으로 정부를 세우고 3년 동안 싸우다가, 1273년 고려·몽골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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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쪽 바다를 향해 있는 진도 석성의 남문. 아마도 성문 앞까지 바다 물길이 들어왔을 것이다.

석성 남문 앞의 옹성과 해자 위로 단홍교가 보인다.

진도석성 또한 방어에 충실하기 위해 어김없이 치가 있다.

진도 석성앞에는 두개의 다리가 있는데 이 단홍교와 쌍홍교가 있다.

남문앞의 옹성.


남문의 옹성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

진도석성의 남문,

석성 안의 관아건물. 지붕의 양식이 지금까지와 다른 모습이 특이하다.

성에 왔으니 성벽위를 한바퀴 돌아봐야겠다.



찾는 이가 많지 않으니 성안에 잡초가 무성하다.


관아 건물. 그래도 만호가 다스리던 성이었다. (만 채의 집을 다스리는 관리를 만호라 한다.)

잡초가 무성한 성내를 보니 마음이 아프다.











성 인근까지 바다 물길이 열려 있었을 것이다.






지붕의 건축양식이 특이하다.








아래 남문이 내려다 보인다.






남도석성의 만호비.



성문앞 이곳까지 바다 물길이 열려있어 들고 나기가 수월 했을 것이다.



진도를 나오기전 진도대교 아래 울돌목에 잠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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