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이란 영화가 화재이다. 물론 나역시 개봉 첫날 관람을 했다.
예전부터 성에 대해 관심도 좀 많았고 어디에 뭔 성이 있다고 하면 애써 찾아다니곤 했다. 아직 본격적으로 올리지는 않았지만 오죽하면 카테고리에 ‘성을 찾아 떠난 여행’을 만들어 놨을까~
영화의 배경이 남한산성이기도 했고 역사물에 관심이 있다 보니 개봉 첫날 본 몇 개 안되는 영화가 되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 등장인물들 중에 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에 더 몰두하기도 했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 명분과 대의를 내세우며 죽음을 불사하고 결사항전을 외친 김상헌도 일단 화친을 통해 급한 불을 끄고 내실을 도모하면서 훗날을 기약하자고 주장한 최명길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의 논쟁과 무관하게 그저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이든 모색해야 했던 그 백성들 중 하나 였을것이다.
그 백성들의 삶에 나를 두고 영화를 보니 그렇게 굴욕적이고 비참한 역사였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는다.
영화의 위정자들처럼 그 치욕적인 눈물은 그들의 것이고 나와 같은 백성들은 여전히 그들과 다른 하루 안에서 삶을 지탱하고자 했을 것이며 그렇게 역사는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의 건물터도 확인되어 그때부터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긴 하지만 역시 조선시대에도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자리하였다.
원성에는 동·서·남·북 모두 4곳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 북문은 전승문(全勝門), 서문은 우익문(右翼門), 남문은 지화문(至和門)이라고 불렸습니다. 암문도 원성 11곳, 봉암성 4곳, 한봉성 1곳 등 16곳이 설치되어, 우리나라 산성 중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또한 7곳의 포루가 있는데, 제1남옹성 8곳, 제2남옹성 9곳, 제3남옹성 5곳, 장경사 부근 원성 2곳, 장경사 신지옹성 2곳, 연주봉 옹성과 봉암성 2곳 등이다. 장대는 원성 성벽의 동·서·남·북에 하나씩 설치 되었고, 봉암성에도 외동장대가 있다.『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남한산성 안에 125곳의 초소인 군포가 있었으며, 각 군포는 2∼3칸 정도의 규모였다고 하였는데, 실제 성 안에서 앞면 3칸, 옆면 1칸의 군포 건물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소금을 묻어두었던 매염처(埋鹽處), 숯을 묻어두었던 매탄처(埋炭處)도 있었다.
성 안에는 광주부의 읍치를 산성 안으로 옮겼기에 행궁과 함께 많은 관아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유사시에 국왕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은 154칸 정도이다.
궁실에 딸린 건물로는 1688년과 1711년에 건립한 좌덕당(左德堂)과 종묘 건물로 사용하기 위한 좌전(左殿)도 자리하였고, 남문 안에는 사직을 옮길 우실(右室)도 갖추었다.
1798년(정조 22)에는 한남루(漢南樓)가 건립되었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은 1829년(순조 29)에 수리되었다. 하궐 왼쪽에는 일장각과 군사를 조련하던 연무관이 있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비장청과 교련관청, 기패관청, 군관청, 별군관청, 서리청 등 많은 관아 건물이 자리하였다. 또한 행궁 및 관아의 소요 물품과 여러 가지 관수 물자를 비축하고 군량을 보관하기 위한 영고, 수창, 신풍창, 별창, 동창, 군기도 등 많은 창고도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산성 안에는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 옥정사, 남단사, 한흥사, 천주사, 동림사 등 여러 사찰이 있었는데, 이곳은 산성 축성에 동원된 8도 승군의 주석처이자 승군이 군기와 화약을 비축하고서 산성을 수비하는 곳이다.
1638년(인조 16)에는 온조왕묘를 건립하여 배향하였으며, 남단사 오른쪽에는 사직단, 북문 안의 동쪽 언덕에는 성황당, 서장대에는 기우제단을 두어 정기적으로 제의를 행하였다. 동문 안에는 1688년(숙종 14)에 유수 이세백이 병자호란 때 청의 침입에 끝까지 저항할 것을 주장한 척화파의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위패와 좌의정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의 위패를 배향한 한절사라는 사당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또한 남한산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돌을 쌓아 만든 산성으로, 능선의 흐름에 맞춰 산성의 모양도 자연스럽게 펼쳐져 더 없이 아름답다. 그래서 남한산성의 매력은 곡선미에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실 남한산성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산성 대부분이 그렇다. 나중에 올리겠지만 청주의 상당산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산성의 곡선미의 극치를 이루는 산성중에 하나이다.
특히 남한산성은 좌우에 조성된 울창한 수림들은 검은색 벽돌을 쌓아 만든 여장과 조화를 이루어 더없이 아름답다. 코스 중간 중간에 접할 수 있는 수어장대, 행궁, 4대문, 숭열전, 역사관등이 남한산성이 그동안 간직해온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렇지만 영화에서처럼 한겨울 눈이 소복하게 쌓인 남한산성의 그림이 없어 아쉽다. 그리고 올 겨울 눈이 영화에서처럼 소복이 내려 성을 덮게 되면 그때 꼭 다시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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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을 상징하는 지화문(남문)이다.
남문은 성의 서남쪽에 있는 문이다. 남문은 정조3년(1779년)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되어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 붙여졌다. 또 남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다른 문들처럼 문루와 홍예문으로 나뉜다. 남문의 홍예문은 높이 4.75m, 폭 3.35m, 길이 8.60m로 홍예기석 위에 홍예석 17개로 구성되어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동문보다 기둥높이는 낮으나 건물의 전체 높이는 조금 높다. 현재의 문루는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 올 때에도 이 문을 통해서 들어 왔다.
남문 밖에는 성남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한 약 350년된 느티나무가 있다. 남한산성 성곽 준공당시 성곽사면 토양유실 방지 및 차폐의 목적으로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남한산성 순환도로 터널이 개통된 후 폐도 부지가 된 남문 앞 느티나무 주변을 2006년 재정비 및 느티나무 생육환경개선 후 총 4주를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전승문
북문은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전승문(戰勝門)이라고 한다.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상사창동으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 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운반하였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면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1624년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1779년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이라 칭하였다. '전승문'이란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인데 현재 편액은 걸려있지 않다. 북문은 홍예식 문이며, 홍예기석 위에 10개의 홍예돌을 쌓아 구축하였다.


남한산성의 전승문(북문)이다. 성내 주차장에서 접근성이 좋은 것 같아 북문에서부터 서문쪽을 향해 걷는다.


드디어 곡선의 시작이다. 우리나라의 성채, 특히 산성을 바라보고 있으면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그 곡선의 미학에 감탄이 절로 나오곤 한다.

암문은 남한산성에 16개가 있으며, 남한산성은 한국 성곽 중에서 가장 많은 암문을 가지고 있다. 암문은 적이 관측하기 어려운 곳에 만든 성루가 없는 성문이다. 원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있고 형식은 평거식과 홍예식으로 구분된다. 암문은 은밀하게 식량과 무기를 운반하거나 원군이나 척후병이 출입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크기가 작고 장식이 없다. 암문의 안쪽에 쌓은 옹벽이나 흙은 유사시에 무너뜨려서 암문을 폐쇄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연주봉의 옹성이다. 성에서 암문을 타고 길게 뻗어 주변을 탐색하기 좋게 만들어져 있다. 이 암문에 대한 설명은 저 밑에 사진에도 있다.



치라고 한다~ 성벽에서 돌출되어 방어에 유리하게끔 지어져 있다.





뿌연 안개사이로 제2롯데월드 타워가 보이고 이 근방이 인조가 청태종에서 항복했던 삼전도라 추정된다. 뒤에가면 늦가을의 높고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

송파쪽으로 나 있는 우익문(서문).
서문은 산성 북동쪽에 있는 문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우익문(右翼門)이라 한다. 광나루나 송파나루에서 가장 가깝지만, 경사가 급하여 당시 물자를 수송하던 우마차 등은 이 문으로 드나들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의 폭은 1.46m이고, 높이는 2.1m다. 동문처럼 홍예식으로, 장방형 홍예기석 위에 5 매의 홍예석을 올려놓았다. 안쪽에는 2짝의 목재 판문을 설치하였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인조가 세자 등과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러 삼전도로 나갈 때, 이 문을 지났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하나이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臺)를 말한다.
수어장대는 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어서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은 병자호란(1636) 때 인조(재위 1623∼1649)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청나라 태종의 군대와 45일간 대항하여 싸운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에 이기진이 왕의 명령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은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2층 4면의 바깥기둥은 1층의 높은 기둥이 연장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금 있는 건물은 1896년에 유수 박기수가 다시 고쳐 세운 것으로 인조 2년(1624)에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또한 동·서·남·북의 4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대로 산성 내의 최고봉인 일장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어 성 내부와 인근의 양주·양평·용인·고양·서울·인천까지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전면에서 볼 때 크고 작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기둥을 세우고 내부에는 널마루를 설치하여 단조로운 난간을 둘렀다. 내부 천정에는 장반자를 귀틀 위에 깔아 단청으로 시문하였고 툇간 위의 반자는 연등천정이다. 내진과 외진 사이 바닥에는 전을 깔고 한쪽에 계단을 설치하여 2층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2층은 1층과 달리 변주에 판문을 달아 열고 닫을 수 있게 되어 있고, 바닥에는 마루가 깔려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수어장대의 목부에는 모로단청을 시문하여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그저 산 중간에 흰색으로 선하나 그어놓은 것 외엔 별다른 것이 없어 보이지만 왜 난 이 선이 그토록 아름답고 감동으로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전승문(북문)에서 출발하여 우익문(서문) 그리고 이제 지화문(남문)까지 왔으니 성을 반바퀴 돈 셈이다.





















성을 한반퀴 돌았으니 좀 지겨울만도 하다. 이제 늦가을의 남한산성 모습이다.



늘 출발점은 이 전승문(북문)이었다.



남한산성에서 보이는 하남방향.












앞에서 잠시 이야기했듯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했던 삼전도라 불리던 롯데월드타워 인근. 사실 이 땅에 보여지는 건물들의 조망보단 한없이 맑고 푸른 우리나라의 가을하늘에 숨이 멎는 듯 하다.


늦가을의 우익문(서문).









수어장대 오르는 길.















지화문(남문)의 늦은가을.



제2남 옹성치















제11암문(시구문)
동문(좌익문)에 인접한 제11암문(시구문)은 폭이 2.86m, 높이가 3.07m, 길이는 5.6m에 달해 가장 규모가 크다. 동문에는 계단이 있어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였으므로, 수레나 일반인들의 통행은 주로 이 암문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말 신유(1801) 기해(1839) 병인(1866)년 천주교 박해 때 희생당한 순교자 한덕운(토마스), 김덕심(아우구스티노), 정은(바오로) 등 300여 분의 시신이 이 문을 통해 버려져 천주교인의 성지순례 장소이기도 하다.










보기에 따라선 하나의 건축물이고 군사시설이며 단순히 돌들을 쌓아 만든 보호시설이라 여길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돌 하나가 가벼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돌을 쌓아 올려야 했던 이땅의 사람들 때문이다.
그들은 누군가의 부모이고 누군가의 자식이며 누군가의 형, 동생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보통 우리는 백성이라 한다. 그 백성들, 이 나라를 지탱하고 이 나라를 지키며 싸워왔고 끊임없는 투쟁 속에 살아야 했던 그 백성들의 피와 땀이 저 성벽의 돌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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