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을 넘어 풍기에 이르면 왠지 부석사엘 한번은 들려봐야 할 것 같은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그 부석사 가는 길목에 소수서원과 소수 박물관 그리고 옆에 선비촌이 자리하고 있다. 풍기에서 931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된다.
소수서원이 위치한 자리는 원래 숙수사라는 이름의 사찰터로, 서원 입구에는 현재까지 4m 높이의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이 평소 자신이 흠모해 왔던 고려의 유학자 안향의 연고지인 이곳 풍기 땅에 부임한 것을 계기로 그의 향리에 안향의 사당을 세우고, 이듬해에는 사당 앞에 향교 건물을 옮겨다 재실을 마련하여 선비들의 배움터로 삼음으로써, 서원의 대체적인 골격이 이루어졌다. 서원의 시설을 정비한 주세붕은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채용해서 유생들에게 독서와 강학(講學)의 편의를 주었으며, 한양의 종갓집에서 안향의 영정을 이곳으로 옮겨와 봉안하고서 처음으로 이름을 백운동서당(白雲洞書堂)이라고 하였다가, 중종 40년(1545년)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補)의 영정도 함께 배향하면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부르게 되었다. 나아가 주세붕은 임백령이나 이언적 등의 도움을 받아 제향과 교육을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 서책을 사들여 서원 문고를 조성하였으며, 주세붕 자신도 종종 서원에 들러 고을 선비들과 함께 성리학 강론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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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붕이 처음 서원의 터를 닦은 뒤, 안향의 후손으로 경상감사로 부임한 안현은 경상도의 각 고을에 협조를 요청하여, 서원에서 일할 노비와 제수에 필요한 식량, 어염(魚鹽) 등을 확보하고, 서원의 관리와 운영을 위한 운영 규정을 정하여 서원의 원장 임명 문제와 원생의 정원수, 제향 절차 등을 상세하게 규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백운동 서원이 보유한 전답 30결(9만 평)에 어장과 염분 및 보미(寶米)도 운영하게 되면서 서원은 토대를 굳히게 되었고, 조선 명종 5년(1550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해 와서는 서원의 격을 높이고자 송(宋) 시대의 예를 언급하며 국가에서 서원에 대한 합법적인 인정과 정책적인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 마침내 당시의 국왕이었던 명종은 친필로 「소수 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篇額)을 서원에 하사하고 아울러 사서오경과 《성리대전》등의 서적, 노비도 내렸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데서 온 말이었다.
이것은 소위 사액서원의 시초였으며, 이로써 나라가 인정하는 사학(私學)이 되었다. 사액된 뒤 입학 정원도 10명에서 30명으로 늘어났으며, 또한 서원의 원생들이 배움에 충실하도록 이황은 서원에서의 학업 규칙도 정하여, 배움의 장으로서의 서원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데 힘썼다. 당시 입학 자격은 초시에 합격했거나 학문에 정진하는 자들이었고, 학문에 정진하지 않고 과거 시험에만 한눈을 팔거나 미풍양속을 어기는 경우 곧바로 퇴원당했다. 소수서원에서 공부한 유생은 4천 명에 달했으며, 그 중에는 임진왜란 때에 경상우병사로 진주성에서 전사한 김성일, 선조 때의 좌의정이었던 정탁도 있었다. 1633년(인조 11년)에는 주세붕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그 뒤 안향과 주자, 이원익, 허목 등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그리고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소수서원 들어가는 입구. 거리가 짧은게 아쉽다.
소수서원에 있는 당간지주, 서원에 왠 당간지주라 하겠지만 앞에서 설명되어진 바와 같이 이곳은 원래 숙수사라는 사찰터였단다. 당간지주에 대해선 앞에 부석사편에서 자세히 이야기 하였다.
입구에 경렴정(景濂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죽계 건너편 물가에는 취한대가 위치해있다.
경렴정(景濂亭)은 서원 담밖에 풍광이 수려한 곳에 위치한 이 건물은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로 1543년(중종 38년) 주세붕 선생이(1495~1554) 건립하였다.
정자의 이름은 북송 철학자 염계 주돈이를 경모한다는 뜻에서 그의 자호에서 따왔다. 정자안의 초서 현판은 퇴계이황 선생의 제자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 : 조선시대의 명필로 특히 초서로 유명함)의 글씨이다.
취한대. 물가 건너편에 있는 취한대(翠寒臺)는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1550년(명종 5년) 풍기군수 퇴계 이황이 세웠다.
취한이란 푸른솔, 맑은 내 등 자연경관에 도취되어 호연지기를 기른다는 뜻이다.
취한대 암벽 위에는 퇴계 이황이 여덟 그루의 백송을 심었는데 그중 네 그루는 고사((枯死 : 나무나 풀 따위가 말라 죽는 것)하고 나머지 네그루만이 살아 있어, 옛 선현들의 숨결을 지금도 느끼게 하고 있다.
취한대(翠寒臺) 암벽(岩壁)에는 퇴계 이황이 새긴 경자바위가 있는데, 지신(地神)을 진혼(鎭魂)하기 위하여 새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윗쪽에 새겨진 백운동(白雲洞)은 유서(由緖 : 어떤 대상이 긴 세월을 거쳐 오면서 가지게 된, 특별한 역사나 유래)를 전하기 위한 것으로 '신재문집(愼齋文集)'에 '마애제각백운명(磨崖題刻白雲命) 백일백운생백석(白日白雲生白石) 태수빈래애백운(太守頻來愛白雲) 백두여설안벽남(白頭如雪眼碧藍)'이란 시(詩)가 있다.
강학당
정면 4칸에 측면 3칸으로 장대석 바른층쌓기의 높은 기단 위에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평면구성은 마루방 3칸과 온돌방 1칸으로 사면에 폭이 좁은 쪽마루를 돌렸다.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 기둥 위에 주두를 놓고 쇠혀를 하나 내어 이들을 서로 결구한 굴도리 초익공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주두위에 놓인 대들보의 보뺄목은 일부에선 사면으로 끊겼으나 방을 둔 곳에서는 초각하여 둥글게 처리했다. 상부가구는 5량가이고 앞뒷면에 놓인 평주들의 간살은 통칸으로, 20여 척 이상이 되나 대들보를 전후 평주 위에 놓고 잘 치목한 대량 위에 주두와 초각 보아지를 끼운 동자주를 두어 종량과 중도리를 받쳤다. 종도리는 소로를 끼운 파련대공 위에 올려져 있다. 「백운동(白雲洞)」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동·서재
서원의 기숙사 구실을 하는 곳이다. 동·서재가 한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의 납도리 소로수장집이다. 평면구성은 가운데 2칸 마루방을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 2칸을 두고, 온돌방 앞에는 퇴를 깔아 헌함을 세웠다.
앞에서 설명한 취한대.
취한대로 건너가는 돌다리.
회헌(晦軒) 안향(安珦)(1243˜1306시호는 문성)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 학자로 문교진흥과 제자육성을 통해 유풍을 진작한 인물이다. 안향은 백이정과 함께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이를 내세워 고려문화를 혁신하고자 한 첫 세대였다.
고려후기의 학자로서 나라가 매우 어려운 시기에 사십여년 벼슬길에서 두 차례나 왕을 수행, 원나라에 다녀오는 등 국사에 이바지하고 ,문교와 유학 진흥에 크게 이바지했다. 당시에 불교신도의 그늘에 쇠잔해만 가는 유학을 일으킴에 힘써, 퇴락한 문묘를 수리, 중국에서 공자와 72제자의 상(像)을 그려다가 모셨고, 교육 재단인 섬학전을 마련했으며, 그리고 중국에서 정주학을 수입, 연구하여 펴고 장려하는 등으로, 시들었던 유학에 활력의 샘줄기를 터놓았다. -출처 다음위키백과-
주세붕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경유 , 호는 신재, 시호는 문민공이다. 신재 주세붕은 당대의 석학이며 도학자로, 선현 회헌을 우리나라 도학의 비조로 존경해 왔다.
주세붕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는 목민에 힘쓰는 동시에 도학을 강화하고 그 교육을 통해 백성을 교화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서원 창설이었다. 그는 향교를 옮겨 지음과 동시에 양반들에게 교육기관으로서 외면 당하던 향교대신 풍기지역의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한편 그가 안향을 봉사하는 사묘와 유생의 교육을 위한 서재를 세운 것은 선현을 존숭하려는 뜻도 있었지만 동시에 교육을 통해 유교적 윤리를 가르쳐 사람들을 교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배향된 선현이 풍기출신의 안향이고 교육 교화의 대상이 풍기의 사림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풍기사림의 교화가 주된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그는 인조(仁祖)11년(1633)에는 소수서원에 배향되었다.- 출처 다음 위키백과-
이 황(1501-1570) 호는 퇴계 시호는 문순공 성리학자이자 교육사상가이다. 퇴계는 풍기 군수로 부임하여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사액 받게 하였고, 이 서원에서 직접 제자를 가르칠 때 신분과 계급을 떠나 무쇠장이 배순을 제자로 삼은 일화가 전해온다. 또한 주세붕이 서원을 지워 회헌 안향을 높히자 퇴계는 안향의 수제자인 우탁과 역동을 기리고자 역동서원을 세워 안향의 인격과 학문을 진작시켰으며 성리학의 꽃을 피웠다. 이산서원에 초향되었고 도산서원에 주향되었다.- 출처 다음 위키백과-
소수서원 앞에 주차장은 넓어 주차의 어려움은 없다. 입장료는 어른이 3000원이고 청소년 2000원, 어린이는 1000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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