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보다 이별이 먼저 왔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단풍이 드는 곳은 내 마음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낙엽 지는 것은 내 사랑이었다.
나에게 이별이 왔다.
눈을 뜨자마자 세상의 어둠이라는 어둠 모두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
꿈도 아닌데 절벽의 낭떠러지에 위험하게 한 발이 미끄러질 듯 공포스럽고 홀로 세상의 끝에 와 있는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이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통절한 현실이 무서운 짐승에게 목을 물리는 일보다 더 두렵고 화살을 심장에 맞은 짐승처럼 처절하게 신음했다.
이별, 이처럼 가을과 어울리는 말이 또 있으려나~ 그래서 우리는 아픈 이별일수록, 그것이 비극적이면 비극적일수록 아름답게 바라보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가지로부터 떨어지는 꽃잎을 낭만적으로 바라보듯이.
그러나 이별은 가히 죽음을 준비하는 고문과 다를 바 없었다.
생각해보면 슬픔이라든가, 고통의 극치라든가, 죽음의 고통이란 말을 현실보다 비약해서 너무나 많이 써 버렸다.
모든 말들이 효과가 없는 약처럼, 약효가 다 떨어진 메마른 나무토막처럼 그 말들이 황량하고 공허하기만 하다.
슬프다고 아무리 말해도 내 슬픔의 반 절도 표현된 것 같지 않았고 말하면 말할수록 오히려 답답하고 허탈하기만 하다.
덜 아플 때 너무 강한 말들로 비약하고 과장해서 모두 표현해 버렸으므로, 정작 죽음에 이르는 정신적 고통을 앓고 있는데도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선암사에서 돌아오는 길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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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 7년인 529년에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절을 짓고 해천사(海川寺)라고 부른 것이 선암사의 기원이라고 전해진다. 남북국 시대에 와서 도선이 선암사를 창건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다. 고려 시대에 의천이 절을 크게 중창하고 천대종의 본거지로 번창했으나, 조선시대 때 정유재란으로 큰 피해를 입어 절이 거의 소실되었다. 복구도 늦어져 1660년에야 중창되었다.

선암사와 조계산 넘어 송광사의 차이점은 지눌 역시 선종과 교종을 합일하려는 일체화론자였지만, 의천과는 반대로 선종의 바탕에서 교종인 화엄학을 수용하려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창했다. 목표는 천태종과 같지만, 선을 우선으로 한 방법론에서는 반대였다. 마치 선암사와 송광사가 조계산을 주산으로 공유하는 입지는 같지만, 위치는 동서로 반대에 있는 것과 같이. 지눌이 조계산에 웅지를 튼 이유도 천태종의 중요 사찰인 선암사에 대한 무언의 선언이고 견제였을 것이다.
송광사와 선암사는 건축적인 면에서도 여러 가지 흥미로운 차이가 있다. 선종에 기반을 둔 송광사는 지극히 논리적인 화엄학의 영향을 받아, 마당 한가운데의 법왕문을 중심으로 기하학적으로 가람을 배치했다. 반면 교종에 가까운 선암사에서는 통일된 교리적 질서를 발견하기 어렵고, 오히려 고정된 형식을 부정하는 선불교적 정신을 강하게 읽을 수 있다. 건물들 또한 송광사의 것들이 기교적이고 형식적이라면, 선암사의 것들은 토속적이고 자유분방하다. 현재의 송광사 역시 1980년대의 대대적인 중창불사로 거대한 대웅전이 들어선 전혀 새로운 모습이지만, 선암사는 한 세기 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송광사에 관한 이야기는 이 블로그의 앞부분에 있다.
https://jail6039.tistory.com/entry/순천-송광사를-느릿하게-거닐다 [꿈꾸는 여행자]

소설가 조정래의 아버지가 이 곳의 스님이었다. 태고종은 대처승을 인정하기 때문에 결혼한 사람도 출가해 승려가 될 수 있다.
불교를 소재로 한 영화, 드라마에서 촬영지로 등장하기도 했다. 강수연이 출연한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촬영지가 선암사이다. 또한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경순공주가 삭발하고 출가하는 장면도 선암사에서 촬영했다. 이때 출연한 엑스트라들은 실제 선암사 승려들이며, 경순공주를 연기한 김나우는 이 연기를 위해 실제 삭발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2018년 6월 30일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이 신청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우리나라가 등재 신청한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이다.


현재는 승선교 오른편으로 새로운 도로를 놓아 이 다리를 건너는 것을 피하고 있다. 예전에는 선암사의 영역에 이르는 사람은 누구라도 이 다리를 건너야만 경내에 오를 수 있었다. 여기에는 고통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는 모든 중생들을 보호,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처럼 넓은 아치를 든 예가 없다. 돌로 이룬 인공적인 곡선미나 결구미가 빼어나다.
기저부에 별다른 시설물 없이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육중한 무게를 떠받치고 있다. 반원형의 아치지만 물에 비친 반원과 이어져 가득한 원을 이룬다. 요석(중심돌) 아래는 조그마한 석재를 빼내어 신기한 모습을 이루는데 마치 용의 모습 같다..


사찰의 출입용 문루(門樓) 역할을 하는 팔작지붕의 중층 누각이다. 강선루는 주 진입도로를 가로지르는 계곡 위에 서 있다. 대들보 위에는 낮은 동자기둥(童子柱)을 세우고 중보(中-)를 얹었고 그 위에는 다시 판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걸쳐 5량 가구 형식을 하고 있다. 합각지붕의 가구를 위해 충량(衝樑)과 선자(扇子) 서까래가 설치되었는데 충량의 모습이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일반적인 사찰에서는 일주문을 지나야 누문이 있는데 선암사에는 누문이 일주문 밖에 있어 이채롭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46호. 장변과 단변이 2.2:1의 비를 갖는 기다란 계란 모양의 연못 속에, 장변 11m, 단변 7m의 크기를 갖는 계란 모양의 섬이 저부(底部) 가까이 4m의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는 중도형(中島形) 타원형 연못이다.
이와 같은 특이한 양식의 연못 형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찾기 힘든 것이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정원에서는 직선적인 방지중도형(方池中島形)의 연못 양식이 지배적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 앞의 구품연지(九品蓮池)는 정타원형 못이다.
통도사의 구룡지(九龍池)는 구품연지와 비슷한 타원형 연못이기는 하나 모두 정형적인 정타원형 윤곽선을 가지고 있으며, 중앙에 가로지른 다리가 놓여 있는 것이다.
이상의 점에서 볼 때 선암사의 삼인당은 조선시대의 양식으로 보기는 어렵고, 조성연대는 훨씬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까 추정된다.
선암사의 사적에 의하면, 이 연못은 신라 경문왕 2년(862)에 도선국사가 축조한 것이며, 연못의 장타원형의 안에 있는 섬은 ‘自利利他(자리이타)’, 밖의 장타원형은 ‘自覺覺他(자각각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불교의 대의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三印’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을 뜻한 것으로, 이 연못은 불교의 이상을 배경으로 한 ‘삼인당’이라는 명칭과 독특한 양식 등이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출처 한국 민속문화 대백과사전-



전성기 시절에는 65동의 건물이 있었지만 6·25전쟁으로 꽤 많이 소실되어 지금은 20여 동의 건물만이 남아 있다.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7호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 6월 30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게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선암사로 들어가 조계산을 넘어 송광사로 넘어오는 길이 최상의 코스이긴 하다.
특히 한 겨울 눈 쌓인 조계산을 넘어오는 맛과 중간 휴게소에서 먹는 컵라면의 맛이 남다르다.











선암사의 가람 배치 형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한 영역과 축선이다. 경내를 잘 들여다보면 여느 다른 사찰과 다른 3무(3無)가 있다는 것이다.
선암사의 진입공간은 다소 완만한 경사를 이루지만 첫 건물은 강선루에서부터는 가파른 지형이다.
급한 경사지를 여러 단으로 깎고 그 단부에 축대를 쌓아 점차적으로 오르면서 각각의 단에 평평한 대지를 조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선암사의 건물들이 좌우 방향으로는 다소 넓으나 전후 방향으로 조밀한 것은 그 까닭이다.
이러한 단들은 공간을 오르는 방향으로 분절하여 위계성을 주며 시각적으로 전개되고 폐쇄적 효과를 연출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찰의 공간을 인위적으로 구분하고자 할 때 공간의 순서에 의미를 부여하여 진입공간, 과정적 공간, 청정공간, 매개공간, 주공간, 부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선암사는 다른 사찰과 다르게 이러한 공간의 고려가 아주 우수한 사찰로 꼽힌다.
앞에서 이야기한 선암사 사찰의 삼무는
하나는, 다른 사찰과 다르게 선암사에는 사천왕문이 없다. 그 이유는 조계산의 주봉이 장군봉이라 장군이 지켜주기 때문에 불법의 호법신인 사천왕상을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되었다.
둘째는, 협시보살상이 없다는 것이다. 대웅전 석가모니 부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지만 탐진치 삼독을 멸하고 마구니에게 항복받았으며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어서 협시 보살상을 두지 않았다.
셋째는, 어간문이 없는데 어간문이란 대웅정의 정중앙에 있는 문으로 다른 사찰에서는 정중앙의 문에도 사람의 출입이 가능하지만 선암사에는 부처처럼 깨달은 사람만이 이 어간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하여 어간문을 두지 않았다.



선암사에는 조선시대에 주조된 범종이 다섯 개나 있다.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과 함께 불전사물(佛殿四物)에 포함되는 범종은 그 소리가 바로 부처님의 진리를 설파하는 원만한 음성이라 할 수 있다.
강희 39년 명 범종은 범종루에 있으며 높이 122.6센티미터의 대종(大鐘)이다. 숙종 26년(1700)에 주조되었으며, 유곽과 유곽 사이에 보살입상이 3구만 있고 나머지 한 자리에 위패문(位牌文)이 조각되어 매우 특이한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선암사 동·서 삼층석탑(順天 仙巖寺 東·西 三層石塔)은 절 안의 승선교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대웅전 앞에 좌우로 서 있는 2기의 삼층석탑으로 보물 제395호이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규모와 수법이 서로 같아서 같은 사람의 솜씨로 동시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암사의 대웅전 앞마당에는 동서 양쪽에 보물 제395호로 지정된 3층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두 개의 석탑은 겉으로 보기에 크기와 양식이 서로 비슷하여 동시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세히 보면 약간씩 다른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섵압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서탑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서3층석탑의 지대석은 거의 정방형으로 6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으나 석재의 크기는 각각 다르다. 하대 기단(基壇)은 저석과 중석이 같은 돌인데 5매의 석재로 구성되었다. 중석의 양쪽에는 모서리 기둥과 하나의 버팀 기둥이 있다. 하대 기단 갑석은 2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고 그 윗면을 경사지게 하여 네 모서리에서 합각선이 나타나고 상층 기단 받침이 각 · 호 · 각형(角 · 弧 · 角形) 으로 조각되었다.
기단부에서 특이할 만한 것은 상 · 하 기단의 갑석 윗면 모서리에 가벼운 반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경상남도 합천군의 청량사 3층석탑과 순천 금둔사 3층석탑에서 뚜렷이 나타나지만 보통의 석탑 기단부에서는 보기 어려운 형식이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1기로 이루어졌는데, 탑신에는 양쪽으로 모서리 기둥이 있고 옥개석에는 4단 받침이 있으며 윗면에 호와각형으로 된 특이한 형식의 2단 탑신받침이 있다. 옥개석의 반전이 심하여 날카로울 뿐만 아니라 모서리에는 풍경을 달았던 듯 구멍이 한 모서리에 여덟 개씩 뚫려 있는데 지금도 구멍 속에 금속질이 남아 있다.
상륜부에는 모서리 기둥과 부연이 표시된 노반이 있고, 죽절형 위에는 복련판에 싸인 1기의 보주가 조식된 통형의 석재로 만들어졌다.
선암사 탑은 1986년 해체 복원되었는데 이때 동탑의 1층 탑신에서 사리 장치가 발견되었다.

이 사찰의 주불전으로 일주문과 범종루를 잇는 중심축에 위치한다. 대웅전은 정유재란으로 인하여 모두 불에 탄 뒤 현종 원년(1660)에 경잠, 경준, 문정 세 대사가 주축이 되어 현재의 대웅전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모습은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다포 양식의 팔작집으로 장엄하고 화려하다. 높직한 다듬은돌 기단 위에 주좌가 뚜렷한 원형주초를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대웅전에는 주불인 석가모니불을 모셨고 후불탱화에도 석가모니불을 그렸다. 기단은 일부가 파손되고 석재가 황색으로 변모되었는데 이는 과거에 불탄 흔적이라 여겨진다. 기단은 지대석을 놓고 우주와 탱주를 세워 면석을 짜 맞춘 다음 기단갑석을 얹은 전형적인 가구식 기단형식을 하고 있다.
대웅전 앞에는 동서 양탑이 있고 강당인 만세루, 좌우측에 요사인 설선당과 심검당이 중정을 에워싸고 있어 사찰의 중심 공간을 이룬다.









각종 경전을 보관하는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 팔작기와집으로 대웅전의 북서쪽에 위치한다. 잘 다듬은 장대석을 사용하여 정면은 세벌대, 측면은 외벌대로 기단을 쌓았다. 특히 어간 부분의 계단은 소맷돌 부분이 해태와 사자 모양을 하여 흥미롭다.
주좌와 운두(雲頭)가 뚜렷한 원형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선암사 대부분의 건물이 그러한 것처럼 기둥머리에는 창방을 걸치고 그 주위에 주두를 얹어 주심포 형식을 하면서도 익공 형식을 가미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조선 후기의 목조 건축에서 흔히 나타나는데 주심포와 익공 형식의 전형적인 모습을 혼합한 것이다.















선암사의 역사적 가치는 불교 수도원에 필요한 기능들은 참선수행을 위한 선원, 교학 강론을 위한 강원, 취사와 세탁 등을 위한 후원, 그리고 일반 신도들을 위한 종무소, 원로 스님들의 노전, 그리고 주지실 등이 필요하다. 이들을 모두 갖춘 사찰을 보통 총림(叢林)이라 부른다. 선암사는 태고종 제일의 총림이다. 선암사는 마치 각자가 하나의 독립 사찰인 것 같은 건물군들이 모여 있는 단순 집합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의 선암사는 비록 많은 독자적 부분들이 존재하지만, 그들은 다시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거대한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이 전체성이야말로 선암사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일 것이다. 선암사의 부분들을 전체로 묶어주는 요소들은 길과 물이다.
종단 분단 이후 조계종은 조계종대로, 태고종은 태고종대로 안정과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가시적인 발전이란 대대적인 새로운 불사를 의미하고, 기존 질서의 파괴를 담보로 삼게 되었다. 남한의 큰절 가운데 선암사만이 거의 유일하게 ‘개발 불사’에 휩싸이지 않고, 한 세기 전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복잡한 소유관계 때문이다. 최후로 남은 고찰,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최고의 사찰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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