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은 대충 사진 몇장 올리고 끝내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성곽과 다르게 잘 보존되고 방대하기도 하며 그 역사적 가치가 또 남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각 성문과 건축물을 중심으로 돌면서 가능한 다양한 모습의 성을 보기로 했다.
첫번째로 방화수류정을 시작으로 시계 방향으로 창룡문, 팔달문, 서장대, 화서문, 장안문을 향해 성을 한바퀴 돌아보겠다.
수원은 조선 태종때 도호부로 승격된 수원은 한성 4진의 하나였다. 한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방향인 광주, 강화, 수원, 개성에 진을 설치하여 수도 한양을 보위케 한것이다.
수원화성은 팔달산(143m)을 중심으로 쌓은 화성(사적 제3호)은 총길이가 5,700m에 달한다. 화성은 단순한 하나의 '성'이 아니다. 역사적 의미와 함께 건축학적으로도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화성의 축성은 정조의 한과 효심에서 비롯됐다. 1762년 영조 38년 윤 5월21일 사도세자 (장조:고종때 추존)는 당쟁으로 인하여 한여름 뒤주 속에 갇혀 8일만에 죽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당시 11세였다.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즉위 13년만에 부친의 고혼을 위로키 위해 묘를 양주 땅 배봉산(지금의 서울시 전농동)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수원을 자신이 이상으로 꿈꾸는 신도시로 건설하고자 정조 18년 정월부터 20년9월까지에 걸쳐 성곽을 축성하였다. 화성은 조선 성곽제도의 최고 완성형이다. 한국성곽 발달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 성은 석성과 토성의 장점만을 살려 축성됐다. 화성축성에 매달린 선조들은 한국성곽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과 서양의 축성술을 본뜨기도 했다. 이 성에 관련된 사항은 "화성 성역의궤"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성에는 성문을 비롯, 48개의 시설물이 있었지만 현재 복원된 것을 포함해 41개의 시설물이 남아 있다. 보물 제402호인 팔달문을 비롯해 팔달산을 둘러싼 시설 가운데 가장 높은 서장대, 화포를 감춰두고 적군에게 총을 쏘도록 축조된 남포루, 선조들의 정취가 가득한 방화수류정 등 200년전 건물엔 조선의 문화 향기가 가득하다. 화성은 1997년 12월4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창덕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水原 華城은 1963년 사적 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 화성은 한국 성의 구성 요소인 옹성, 성문, 암문, 산대, 체성, 치성, 적대, 포대, 봉수대등을 모두 갖추어 한국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된다.
조선 정조때인 1794년착공하여 1796년 10월10일(음력9월 10일)에 준공되었다. 기존에 화강암으로 쌓았던 방식을 버리고 벽돌로 쌓는 축성 공사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가 사용되었다. 정조가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에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록등 신기재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
주차는 수원화성 행궁옆에 주차장이 있으나 주말에는 혼잡해서 진입이 힘들 것이다. 그럴때는 장안문과 용연사이 임시 주차장도 있고 창룡문 옆에도 주차장이 있어 편한대로 이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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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수류정.
수원화성에 있는 각루(角樓)는 동북각루, 서북각루, 서남각루, 동남각루 등 넷이다. 서남각루는 화양루(華陽樓)라하고, 동북각루(東北角樓)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 한다. 방화수류정은 화성의 북수문인 화홍문(華虹門)의 동측 구릉 정상 즉 용연(龍淵) 남측에 불쑥 솟은 바위 언덕인 용두(龍頭) 위에 있다.(龍頭者卽淵上斗起之巖)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용연은 북성 밖에 있는데 반달처럼 생긴 못으로 둘레가 210보, 깊이 6척이며 못 가운데 작은 섬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못 위의 성 모서리에는 방화수류정이 있고, 못 서쪽에는 석각이두(石刻螭頭)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방화수류정은 조선 정조 18년(甲寅,1794) 9월 4일 진시(辰時)에 터다지기 공사에 착수하여 10월 4일 묘시(卯時)에 정초를 하고 기둥을 세웠고, 7일 오시(午時)에 상량(上樑)하였으며, 10월 19일 완공하였다. 방화수류정 건립에 참여한 각 공장(工匠)의 편수(邊手)는 석수(石手) 서울(京) 김차봉(金次奉), 한산 최기득(崔貴得)이며, 목수(木手) 서울 한천석(韓天石), 미장(泥匠) 서울 권옥(權玉), 개와장(蓋匠)은 서울 총융청 소속 이흥득(李興得) 이다.
방화수류정의 원래의 편액은 전 참판 조윤형(호 松下翁 曺允亨1725~1799)의 글씨이며, 현재 방화수류정에 걸려 있는 편액은 서예가 김기승(호 原谷 金基昇 : 1909~2000)이 1956년(丙申)에 쓴 것이다.방화수류정은 송대 정명도(程明道)의 시(詩) "운담풍경오천(雲淡風經午天), 방화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다고 한다.
화성성역의궤 연설(筵說)의 기록에는 정조 19년(1795) 2월 14일에 화홍문을 경유하여 방화수류정에 임금과 신하가 거동한 기록이 있고, 정조 21년(1797) 1월 29일에는 방화수류정에서 임금과 신하가 활을 쏘았다는 기록이 있다.
수원부계록(1848.6.10)에 방화수류정, 팔달문, 장안문 등은 헌종 14년(1848)에 중수되었으며, 1913년 방화수류정 보수, 1918년 방화수류정 개축, 1929~1934년 등 일제강점기에 여러 차례 수리되었다.
광복 후의 수리는 1968년 방화수류정 보수, 1973년 방화수류정 단청, 1975년 방화수류정 보수, 1988년 방화수류정 툇마루 밑 난간보수, 가칠단청, 1993년 방화수류정 기단 강회다짐, 마루 및 난간보 수, 1998년 방화수류정 기와 고르기 및 단청, 1999년 방화수류정 단청 및 전벽돌 교체 등 방화수류정 보존을 위한 수리가 이루어져 왔다.
방화수류정에 관한 도면 자료는 화성성역의궤에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외도1(外圖一)과 외도2(外圖二), 동북각루내도(內圖)가 수록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는 1934년에 작성된 방화수류정의 평면도, 정면도, 단면도, 측면도 등이 소장되어 있다. 1980년에 발간된 수원성복원정화지에도 방화수류정의 평면도, 입면도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2010년에 발간된 김주태 기증 전통건축설계도면집에는 방화수류정 측담 관련 도면이 수록되어 있다.
높은 지형에 조영되어 있는 방화수류정은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성의 서북각루인 전시용(戰時用)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고려하여 조영된 건물이다. 방화수류정은 초익공 소로수장에 굴도리를 사용한 오량집이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지붕상부에는 세 마디의 절병통을 세우고 용마루와 내림마루를 설치하였다. 지붕형태는 대부분 팔작지붕이고,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북측 용연측과 동측으로 돌출되게 하여 툇마루를 두는 특이한 평면이다. 방화수류정의 평면은 “ㄱ”자형을 기본으로 북측 용연측과 동측은 凸형으로 돌출, 튀어나오게 조영하여 사방을 볼 수 있도록 꾸몄다.
방화수류정의 남측 초석은 방형(하부 50cm, 상부 40cm)의 민흘림 장초석(높이 1.55m) 위에 하부(높이 90cm)는 원주(직경 30cm)로 가공하였고 그 상부는 각주로 가공하였다. 북측면은 높이 20cm 기단 위에 1.08m 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남측 전면의 흙마당에 설치된 다섯단의 돌계단(石階)을 오르면 방형의 대(臺)가 형성되어 있다. 남동측은 높은 대위에 상층으로 오르는 목조계단이 있다. 다섯단으로 된 나무계단(木階, 하부 폭 86.5cm, 상부 폭 85cm, 디딤 폭 24cm, 높이 28cm)을 오르면 누마루가 된다. 하층바닥에서 상층바닥까지의 높이는 2.60m정도이고, 동남측 기단에서 상층바닥까지는 1.36m, 기단높이는 1.23m 정도 이다. 마루는 우물마루로 깔았으며 북측의 용연쪽은 평란(平欄)을 둘렀고, 그 외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다. 계자난간은 위부분에 하엽(荷葉)을 두르고, 아래에는 구름무늬를 두어 채색하였다.
방화수류정의 서쪽 하방담은 전돌로 쌓았으며 전돌 사이사이에는 “+”자형으로 비워 “+”자형의 삼화토 벽돌을 제작하여 넣어서 조화롭게 쌓은 화담은 성곽의 전시용 건물 같지 않은 아름다운 하방담으로 꾸몄다.
화성성역의궤 동북각루내도와 1907년 독일인 '헤르만 산더'가 촬영한 그림에는 방화수류정에 오르는 계단이 2개소이나 현재는 1개소로 되어 있는 것 외에는 대체로 원래의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출처 위키백과-
위에서 이야기 하듯 편액은 참판 조윤형의 글씨란다.
동북포루 쪽에서 본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 아래 용연에서 바라본 동북포루와 방화수류정.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왼쪽의 건축물은 동북포루이다.
용연에서 본 동북포루.
9월의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에서 내려다 본 용연.
12월1일의 방화수류정.
지도에서 보듯 방화수류정을 보았고 다음에 화홍문을 본다음 동북포루 방향으로 성을 돌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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