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시내를 역사유적지구라 부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나서 관광객들도 늘어나고 각종 편의 시설이나 유적지에 대한 보존과 관리 상태도 예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관광객이 늘어나고 있다고해서 무분별하게 상업적인 용도로 개발되고 있는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마음이 그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사실 경주 시내를 둘러보면서 어딜 먼저가고 늦게 가고의 차이는 별로 없다. 자신이 먼저 보고 싶은 곳을 먼저 찾아 둘러보면 그만이다.
그래도 역사 유적의 도시이니 만큼 예의상 국립박물관을 먼저 찾아보고 다른 곳을 둘러 보는 것도 괜찮다.
국립박물관이나 인근의 동궁과 월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반월성-계림-교동마을-첨성대-대릉원 그리고 야간의 동궁과 월지로 다시 돌아오는 방법도 괜찮고 반대로 대릉원부터 돌아봐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래도 야간 조명이 들어오는 첨성대와 동궁을 보기 위해서는 적절하게 시간을 안배해야 한다.
난 대릉원에 주차를 하고 첨성대 그리고 계림길을 따라 계림- 교동마을- 반월성 그리고 동궁과 월지를 둘러보았는데 다른 일이 있기도 해서 구석구석 둘러보진 않았지만 경주는 그 전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자주 찾게된다는 것을 아니까 딱히 아쉬울 것은 없다.
무엇보다 여행하면서 시간을 재고 시간 때문에 쫒기고 시간에 맞추고 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비추다.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자신이 머물고 싶은 곳이라면 언제까지라도 머물다 가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제 아무리 동궁의 야경이 멋있다한들 내가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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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직후인 문무왕(文武王) 14년(674년)에 황룡사 서남쪽 372m 지점에 조성되었다. 큰 연못 가운데 3개의 섬을 배치하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무산(巫山)을 나타내는 12개 봉우리로 구성된 산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동양의 신선 사상을 상징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섬과 봉우리에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동물을 길렀다는 가장 대표적인 신라의 원지(苑池)이다.왕궁에 딸린 연못으로 서쪽에 별궁인 임해전이 있으며, 동쪽과 북쪽은 굴곡이 심한 곡면을 이루고 있고, 연못 안에는 3개의 성(섬)이 있다. 별궁인 임해전과 여러 부속건물은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 곳을 바라보면서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던 곳이다.-출처 위키백과-
가을이 저물어 가는듯 하다. 첨성대에서 계림으로 가는 길 왼쪽으로 보면 나오는 그림이다.
첨성대는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월성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362개의 화강암 벽돌을 사용하여 원통형으로 축조하였다. 높이는 9.17미터. 돌로 27층을 쌓았으며, 꼭대기에는 다시 우물 정(井) 모양의 2층의 천장돌이 있다. 13층에서 15층에 이르기까지 정남향의 네모난 문이 있고, 이 문의 아래로 12층이 있고 위로 13층이 있으므로 첨성대 위아래의 중간에 문이 위치한다. 내부에는 12단까지 흙이 채워져 있고 여기에 사용된 돌의 수는 362개이다. 내부에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이 장대석을 이루고 있다. -출처 위키백과-
계림으로 가는 길~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校洞) 첨성대(瞻星臺)와 반월성(半月城) 사이에 있는 숲으로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에 있는 경주김씨(慶州金氏) 시조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김알지 탄생에 대한 비(碑)가 남아있다.
탈해왕 4년(60)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 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아기라는 뜻의 '알지'라는 이름을 주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알지는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그 후 알지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미추왕이다. 이후 내물왕부터 신라가 망할 때까지 김알지의 후손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계림은 신성스러운 곳으로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신라시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라 한다. 다음은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전해온다.65년 봄 3월에 탈해 이사금이 밤에 금성 서쪽의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신라 17대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이다.내물왕은 김씨 왕으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을 이루었다. 마립간이란 왕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중국 전진(前秦)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이 침입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도움을 요청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높이 5.3m, 지름 2.2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석을 돌렸다. 무덤 주변을 사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담장터 흔적이 있어 일찍부터 특별히 보호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무덤의 내부형태는 거대한 규모의 돌무지덧널무덤이나, 이 무덤은 규모가 작고 둘레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내물왕릉을 황남대총(98호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 위키백과-
내물왕릉에서 보이는 첨성대. 나무 사이로 첨성대가 보인다.
내물왕릉에서 바로 옆으로 오면 교동마을에 이르고 그 첫번째로 경주향교를 만나게 된다.
경주향교의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향교의 위치는 계림(鷄林) 서쪽, 문천(文川) 북쪽에 해당하는데, 신라의 국가 최고교육 기관인 국학(國學)이 있었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 신라 멸망 뒤에 서라벌이 경주로 개칭되면서 고려 조정에 의해 향학(鄕學)이라는 이름의 지방교육 기관으로 개편되었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원효(元曉)가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의 과부 공주를 만난 요석궁(瑤石宮)에 대해 "지금의 학원이 이곳이다"(今學院是也)라는 주석을 남기고 있다.
조선 개창 뒤에도 향교로써 지방교육 기관의 역할을 이어갔다. 성종(成宗) 23년(1492년) 경주부윤 최응현(崔應賢)에 의해 한양 성균관의 제도에 준하여 새로이 중수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宣祖) 33년(1600년) 대성전과 전사청을 중건하고, 4년 뒤에는 대성전의 동서 무(撫)를 중건하였다. 명륜당과 동서 재(齋) 등의 강학공간은 광해군(光海君) 6년(1614년)에 중건되었다.
숙종(肅宗) 31년(1705년) 부윤 여필용(呂必容)이 경상관찰사 김연(金演)의 협조를 얻어 향교를 중수하였다. 고종(高宗) 17년(1880년) 부윤 민치서(閔致序)가, 22년(1885년) 부윤 민영규(閔泳奎)가 향교를 중수하였으며, 중수 당시에 경주의 유림 손상규(孫相奎)와 최세학(崔世鶴)이 지은 기문(記文)이 남아 있다(두 사람 모두 월성 즉 경주를 본관으로 삼는 경주 유림이었다). 동왕 광무(光武) 3년(1899년) 다시 유림의 지원으로 향교를 중수하였을 때는 군수 조의현(趙儀顯)이 몸소 기문을 지었다. 1919년 유림들이 모성계(慕聖契)를 결성해 성금을 모아 향교를 중수하였다. 그러나 해방 뒤 6.25 전쟁으로 향교는 관리되지 못하고 방치되었고, 서재와 전교실이 무너지기까지 하였다. 1956년에야 지방 유림들이 다시 모성계를 결성, 향교를 중수하고 전교실을 복원하였다. 1978년 담장을 다시 쌓았다. 2011년 12월 7일 경주향교 대성전이 대한민국 보물 제1727호로 지정되었다. 향교 안에는 선조 34년(1601년) 당시 제독관 손기양(孫起陽)이 흩어져 있던 각종 학규(學規)를 엮어서 작성한 《경주향교학령》(慶州鄕校學令)이 남아 전하고 있는데, 일종의 교내 학칙으로써 이는 조선 전기 향교 교육의 실태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 중 하나이다.-출처 위키백과-
교동마을에서 나와 다시 계림을 따라 월성으로 향한다. 교동마을에서는 먹고 노르라 찍은 사진이 별로 없다.ㅜㅜ
길이 참 예쁘다.
올해의 마지막 단풍이 아닐까 한다.
월성에 올라오면 넓은 평지가 나타난다.
경주 월성(慶州 月城)은 신라시대에 궁궐이 있었던 곳의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 또는 월성이라 불렀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고도, 재성(在城)은 조선시대부터 반월성이라고 불려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6호로 지정되었다.월성은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이다.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하여 반월성·신월성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한다.『삼국사기』에 의하면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전한다. 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안압지·임해전·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되었다.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탈해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성의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경주 동궁과 월지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있다. 성 안에 많은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석빙고가 있다.-출처 위키백과-
월성에서 동궁쪽으로 가다보면 나타나는 그림이다.
월성에서 왼쪽으로 보면 첨성대가 이렇게 보인다.
월성에 있는 석빙고.
얼음을 저장하기 위하여 만든 석조 창고로서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였다가 여름에 사용하였다. 경주시 인왕동(仁旺洞) 월성(月城)의 북쪽 축조되었으며, 길이는 18.8m, 홍예(紅霓) 높이는 4.97m, 너비는 5.94m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66호로 지정되었다.
남북으로 길게 조영하고, 출입구는 남쪽에 있는데 너비는 2.01m, 높이는 1.78m이다. 여기에서 계단을 따라 실내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빙실의 밑면도 외부의 형태와 같은 직사각형으로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갈 수록 밑바닥은 경사져 있으며, 바닥 중앙에 배수구가 있어 내부의 물이 이 경사를 따라 외부로 배출된다. 내부는 연석(鍊石)으로 5개의 홍예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에 길쭉한 네모 돌을 얹어 천장을 삼았다. 벽은 직사각형의 작은 석재로 정연하게 쌓아올렸고, 밑부분은 장대석을 연결하여 지대석(址臺石)을 삼아 견실하게 축조하였다. 천장에는 3곳에 환기 구멍을 마련하여 외기와 통하게 하였는데, 조각한 돌로 구멍을 덮어 비와 이슬을 막고 있어 다른 석빙고와는 달리 정연한 양식과 축조를 보여 준다. 환기 구멍은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입구가 남쪽에 있으므로 안으로 내려가는 층계가 몇단 있어서 그만큼 자리[房]를 차지하고 얼음창고의 주실(主室)은 좀 더 깊이 들어간 내부의 북쪽에 있는 까닭이다. 조선 후기에 몇몇 석빙고를 축조하였으나, 그 규모나 기법에서 경주석빙고가 가장 정연한 걸작으로 꼽힌다.-출처 위키백과-
해가 지기 전에 동궁과 월지에 들어 왔는데 곧 해가 지고 야간 조명이 들어올 것이다.
이곳에 대한 이야기는 첫 장에 했으므로 그냥 그림만 보고 넘어 간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동궁에서 주차장이 있는 대릉원까지 오면서 다시 만난 첨성대의 야경이다.
작년 지진에도 또 올해 포항 지진에도 큰 피해가 없이 이렇게 묵묵히 안전하게 서 있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처음에 시작했던 역사 유적지구 표지석까지 돌아왔다. 이 인근에 지진이 잦아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곳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제일 걱정이지만 이 인근에 산재한 원전과 또 우리의 역사 문화유적이 훼손되지 않고 오래도록 잘 보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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