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중심인 동래에 위치한 복천동은 맛이 좋은 우물인 옥샘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시대 가야 무덤들이 자리한 복천동은 무덤의 존재가 잊혀진 채 오랜 세월 흘러오다가, 1950년 한국전쟁 피란민의 거주지로 변하였다.
이후 1969년 복천동 구릉 서편 경사면에 새 주택을 건립하기 위한 택지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렇게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복천동 1호분"은 복천동 고분군에서 조사된 최초의 무덤이자, 부산지역 가야사 연구의 신호탄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 후 1974년까지 이루어진 발굴조사는 주로 우연히 발견된 무덤에 대해서만 이루어졌다.
시민들에게 발굴조사라는 인식이 미미하고, 마냥 신기한 구경거리였던 시절, 부산지역 고대문화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 버릴 뻔한 우리의 역사를 되살리기 위한 불씨가 되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1980년 복천동 구릉에 대한 연립주택 건설 전 시굴조사와 제1차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결과 금동관, 철제 갑옷, 말갑옷, 화살통, 칠두령과 같은 구내 최초, 최고의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연일 신문지상을 뜨겁게 달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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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동 고분군의 확인과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은 우리나라 가야문화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의 암나일본 부설을 뒤집을 수 있는 자료가 되었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받은 복천동 고분군은 1981년 6월9일 사적 제273호로 지정되어 보존하게 되었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복천동 고분군의 정화 사업 및 박물관 건립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1996년 부산 광역시 시립박물관 복천분관(현 복천박물관)이 개관하였다.
복천동 고분군은 개발과 보존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우리나라 고고학 발굴 현장 역사에서 문화유산 척도를 세운 유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복천동고분군은 1981년 6월 9일 사적 제273호로 지정되었다.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삼국시대 고분군으로 3세기대에서 7세기대까지 조영되었으며 4∼5세기가 그 중심연대이다. 대규모의 고분군이 복천동 일대 대포산의 중앙부에서 서남쪽으로 뻗어나온 그리 높지 않은 구릉 위에 밀집 분포되어 있다. 이 고분군은 1969년 9월부터 1994년에 이르기까지 6차례에 걸쳐 동아대학교와 부산대학교박물관 및 부산시립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조사 결과 복천동고분군은 복천동 일대 지배집단의 묘역임이 확인되었고 무덤의 형식은 1981년까지 발굴된 40기의 고분 가운데 소형 덧널무덤〔土壙木槨墓〕8기, 딸린덧널〔副槨〕이 있는 대형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1기, 딸린덧널이 있는 대형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墓〕4기, 딸린덧널이 없는 대형 구덩식돌방무덤 4기, 소형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18기 등으로 다양하였다.
소형 덧널무덤은 길이 330∼410㎝, 너비 160∼210㎝ 정도이며, 내부에는 덧널을 설치하였고 바닥에 주검받침〔屍床〕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두 종류가 있다.
딸린덧널을 가진 고분은 모두 대형분으로 남쪽에 으뜸덧널이, 북쪽에 딸린덧널이 50∼60㎝ 간격으로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으뜸덧널이 대형의 덧널무덤 및 구덩식 돌방무덤인 경우에는 딸린덧널이 모두 대형 덧널무덤이고,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인 경우는 딸린덧널 역시 같은 돌무지덧널무덤이었다.
대개 무덤구덩이〔墓壙〕의 크기는 으뜸덧널은 길이 550∼450㎝ 내외, 깊이 2∼3m 내외이며, 딸린덧널은 길이 4∼6m, 너비 250∼450㎝, 깊이 2∼3m 내외이다. 무덤구덩이 내부에는 으뜸덧널의 경우 덧널 혹은 돌방을, 모든 딸린덧널에는 덧널을 각각 설치하였다. 구덩이가 깊기 때문에 유구(遺構)가 지하 깊숙히 설치된 것이 특징적이다.
딸린덧널이 없는 대형 구덩식돌방무덤은 길이 약 7m, 너비 150㎝이며, 소형 구덩식돌덧널무덤은 길이 2∼4m, 너비 1m 내외이다. 이들은 딸린덧널이 있는 돌방무덤에 비해 길이가 아주 길며 뚜껑돌이 거의 지상에 노출될 정도로 무덤구덩이가 얕은 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고분들 중에서 큰 것은 구릉의 중심부에, 작은 것은 구릉 주변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중심부의 대형고분은 구릉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면서 순차적으로 정연하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의 장축은 대부분이 구릉의 방향과 일치하는 남북향이고 머리의 방향은 남향이다. 일부 대형고분의 으뜸·딸린덧널 내에는 적어도 3인 이상의 순장자(殉葬者)가 같이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고분군에는 도굴되지 않은 큰 무덤이 많아 2,000여 점 이상의 비교적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굽다리접시〔高杯〕, 긴목항아리〔長頸壺〕, 바리모양그릇받침〔鉢形器臺〕, 원통모양그릇받침〔圓筒形器臺〕, 토제등잔(土製燈盞), 마두식뿔잔〔馬頭飾角杯〕, 소형광구원저장경호(小形廣口圓底長頸壺), 광구소호(廣口小壺), 오리토기, 그릇받침〔器臺〕, 손잡이달린작은항아리〔把手附小壺〕, 손잡이달린굽다리주발〔把手附臺附盌〕, 항아리〔壺〕등이 있다.
철제공구류는 도끼·손칼·끌·낫·철사(鐵絲)·찍개·망치·따비·보습 등이 있다. 무기류로는 화살촉·창·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유자이기(有刺利器)·화살통금구〔胡錄金具〕 등이 있다. 무장구(武裝具)로는 판갑옷〔板甲〕·비늘갑옷〔札甲〕등의 갑옷·투구·말투구 등이 있다. 마구류(馬具類)로는 말안장·발걸이〔鐙子〕·재갈〔銜〕·말띠드리개〔杏葉〕·말종방울·띠고리〔鉸具〕등이 있다.
그밖에 중요 유물로서 ‘출(出)’자형의 금동관·금제귀걸이·곱은옥〔曲玉〕·유리옥제목걸이·은제팔찌 등의 장신구류와 청동제칠두령(靑銅製七頭鈴)·꺾쇠·덩이쇠〔鐵鋌〕 등도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토기류·갑옷과 투구류·마구류, 그리고 덩이쇠이다.
토기류에는 4∼5세기대에 속하는 낙동강 하류지역의 특징적인 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그 결과 이 지역 토기의 세부적인 편년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으며, 또 5세기 중엽경으로 추정되는 토기에는 경주지역 토기의 영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갑옷과 투구류는 철제판갑옷 2벌, 철제투구〔鐵製胄〕5점, 철제괘갑(鐵製卦甲) 1벌, 철제경갑(鐵製頸甲) 1쌍 외에 괘갑 및 마갑(馬甲)일 것으로 추정되는 미늘〔小札〕등 여러 종류가 많이 발견되었다.
판갑옷은 장방형 철판을 세로로 잇대어 쇠못으로 이어붙인 것(제10호분 출토)과 삼각형 철판을 가죽끈으로 이어붙인 것(제4호분 출토)의 두 종류가 각 1점씩 출토되었다. 제10호분 출토 판갑옷은 목가리개가 부착되어 있는 특이한 형식이다. 이와 비슷한 것이 김해지방에서 1점 발견된 바 있다. 삼각형 철판을 가죽끈으로 이어 붙여 만든 제4호분 판갑옷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유일한 것이다.
투구는 모두 몽고바리모양〔蒙古鉢形〕이다. 1980년 발굴된 복천동 제10·11·21호분에서 각 1점, 1974년 발굴된 복천동 학소대 1구 제3호분에서 2점이 출토되었다. 이 중 제10호분 출토 1점만 복발(伏鉢)이 없고 나머지는 모두 투구 꼭대기에 복발이 덮여 있는 전형적인 형태이다. 투구는 딸린덧널이 있는 대형분에서만 출토되는데, 으뜸덧널의 형식이 모두 재래적인 덧널무덤이 아닌 구덩식돌방무덤 혹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한정되어 있다.
괘갑과 경갑은 소형 덧널무덤에서부터 대형 무덤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많이 출토되었다. 특히, 제11호분에서 출토된 괘갑은 경갑·견갑(肩甲)·경갑(脛甲) 등의 부속구까지 완전히 갖추어진 1벌이었다. 이와 같이, 괘갑 실물 1벌이 완전히 갖추어진 상태로 발견된 예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다.
말투구는 제11호분의 딸린덧널인 제10호분에서 마구류 1벌과 함께 출토되었다. 얇은 철판을 쇠못으로 이어 붙여 만든 것이다. 얼굴덮개부·챙·볼가리개가 완전히 갖추어진 것으로 크기와 형태로 보아 실전용임이 확실한데, 실물로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다. 최근 합천 옥전고분(玉田古墳)에서 2점이 새롭게 조사되었고, 일본에서도 와카야마현〔和歌山縣〕의 오타니고분〔大谷古墳〕에서 출토된 것 1점뿐이다.
이상의 갑옷·투구류 중 판갑옷을 제외한 괘갑·몽고바리모양투구·경갑·말투구 등은 고구려의 여러 고분벽화에 정밀하게 그려져 있는 것과 같은 점으로 보아 모두 고구려계의 무장구임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발걸이와 재갈 등의 마구류도 고구려와 관계가 깊은 것들이다.
복천동고분은 출토된 유물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4세기대에서 5세기대까지 계속해서 축조된 유적이다. 그러나 4세기대의 고분은 아직 많이 조사되지 않아 불확실한 점이 많다. 반면, 5세기대의 것은 고분의 종류도 다양하고 유형별 묘제의 변화도 비교적 정연하게 나타나 있다.
대개 4세기에서 5세기 전반까지는 소형 덧널무덤과 딸린덧널이 있는 대형 덧널무덤이 유행한다. 5세기 중엽경부터 딸린덧널이 있는 대형 덧널무덤의 주광에 덧널 대신 돌방이 설치되는 새로운 형식의 묘제가 등장한다. 이것은 이 지방의 전통적인 묘제인 덧널무덤과 새로운 묘제인 구덩식돌방무덤이 결합하는 과도기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이와 함께 경주계 무덤인 돌무지덧널무덤도 부분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아직 덧널무덤적인 요소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 뒤 5세기 후엽이 되면 덧널무덤 혹은 그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무덤은 소멸되고, 그 대신에 딸린덧널이 없는 긴 장방형의 크고 작은 돌방 및 돌덧널무덤이 새로운 묘제로서 채용되었다.
이러한 묘제의 변화는 껴묻거리에서도 잘 반영되고 있다. 즉, 널무덤이 주된 묘제로 이용되던 초기단계에는 이 지역의 특징적인 토기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5세기 중엽경 덧널무덤과 구덩식돌방무덤이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묘제가 등장하면서부터 경주계 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후부터 이 지방 특유의 재래토기가 점점 소멸되어갔다.
또한 이러한 변화와 함께 이곳에서 갑옷과 투구류가 크게 유행하였고 동시에 마구류도 더욱 발달하였다. 그 뒤 5세기 후엽이 되면 구덩식돌방무덤이 일반화되고 토기류도 거의 완전히 경주토기화하였다.
이 고분군에서는 많은 양의 덩이쇠가 주로 4세기 전반대에서 6세기대에 걸쳐 축조된 대형묘에서 출토되었는데 으뜸덧널의 바닥에 1∼3열씩 깔아 널받침의 역할을 했음이 확인되었다.
부산 복천동 일대의 구릉 위에 있는 가야 때 무덤들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40여 기의 무덤이 확인되었으나, 대부분의 무덤은 아직도 땅 밑에 남아있다.
무덤의 형태는 땅을 파서 넓은 방을 만들고 나무관을 넣은 덧널무덤(토광목곽묘), 땅속에 네모난 돌로 벽을 쌓고 천장을 덮어 만든 구덩이식 돌방무덤(수혈식석실묘), 땅속에 시체를 바로 묻는 널무덤을 비롯해 여러 가지 형식의 무덤들이 있다. 이 무덤들에는 도굴되지 않은 큰 무덤이 많아 2000점 이상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굽다리접시(고배), 목항아리(장경호), 토제등잔을 비롯한 토기류는 4∼5세기 낙동강 하류지역의 특징적인 토기들이다. 철제 갑옷·투구류도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특히 4호 무덤에서 나온 단갑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갑옷이다. 11호에서 출토된 괘갑은 부속장식까지 완전하게 갖춘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이런 완제품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되는 것이다. 10호 무덤에서 발견된 말갖춤(마구)는 완전히 갖추어진 실전용으로 처음 발견되었다. 이러한 갑옷·투구류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것과 같다.
복천동 무덤에서 보이는 새로운 무덤양식은 무덤의 변천과 흐름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복천동고분군은 우리나라 고대사 해명에 필요한 여러가지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는 유적이다. 묘제상으로는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새로운 묘제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다양한 묘제가 확인되어 이 지역 묘제의 변천과 그 계보연구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 고분군에서 출토된 갑옷·투구류와 마구류는 단일 고분군으로서 가장 많은 출토량을 보였다. 또한 고구려계 영향으로 생각되는 유물과 이 지역 특유의 토기와 함께 신라계 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4∼5세기대의 가야와 신라사 복원은 물론, 당시의 국내외 관계사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시신을 처리한 것은 구석기시대에도 존재하였으나 본격적으로 무덤을 만들고 매장의례를 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이다. 신석기시대의 무덤은 청동기시대에 비해 규모도 작고 종류도 단순한 편이다. 무덤의 형태는 움무덤(토광묘), 독널무덤(옹관묘) 등이 있으며, 무덤 속에는 장신구를 비롯한 토기, 석기 등의 생활도구가 부장되기도 한다.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청동기시대가 되면 지역에 따라 돌널무덤(석관묘), 움무덤(토광묘), 돌덧널무덤(석곽묘), 독널무덤(옹관묘)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만들어지고 특히 고인돌(지석묘)와 같은 거석기념물이 한반도 전역에서 축조된다. 껴묻거리로는 피장자의 사회적 지위를 알수 있는 청동칼·청동도끼·돌칼·돌화살촉·장신구 등이 부장된다.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보급되면서 각지에서 국(國)이 등장한다. 북쪽에는 부여·고구려·동예·옥저가 자리 잡고 중부 이남에는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이 각각 백제·신라·가야로 성장한다. 삼한·삼국시대에는 정치체가 등장하고 고대국가가 성립하면서 나라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구조를 갖는 무덤이 축조된다. 특히 무덤에는 피장자의 사회적 지위가 반영되고, 최고 권력자를 상징하는 고총고분(古塚 古墳)이 만들어진다. 삼한 전기에는 널무덤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분묘가 축조되며, 후기에는 무덤의 규모가 커지면서 많은 유물을 부장한 덧널무덤이 유행한다. 삼국시대에는 나라마다 다른 형식의 무덤이 축조되는데,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돌무지무덤(적석총)과 벽돌무덤(전축분), 신라와 가야에서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과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문화가 발달하면서 거대한 무덤은 사라지게 되고 불교식 화장묘(火葬墓)가 널리 유행한다.
부산지역의 고분은 주로 수영강 수계를 중심으로 한 회동천과 온천천 주변의 동래분지에 집중 분포하며, 그 밖에 괴정동과 당감동, 녹산동 일대에 소규모 분묘가 위치한다. 고대의 동래지역은 철을 매개로 활발한 대외 교역과 막강한 군사력을 구비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4세기 전반, 동래 복천동고분군에서는 무덤의 규모가 커지고 유물이 다량으로 부장된 대형분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5세기 무렵에는 절정에 이른다. 문화적으로는 신라와 금관가야의 양 지역의 문화를 흡수하면서도 이 지역 나름의 독자적인 색채를 띤다. 그러나 5세기 중반 이후, 신라의 세력이 전 영남지역으로 확대되면서 부산지역은 이전 시기의 독자성을 잃고 신라문화에 흡수된다.
복천동고분군은 동래 마안산에서 남쪽으로 뻗어져 나온 구릉 전체에 조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삼국시대 무덤유적이다. 정상부에는 딸린 덧널을 갖춘 대형무덤이, 구릉 경사면과 주변지역에는 중소형 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고분군은 2세기부터 7세기까지 구릉 남쪽에서 점차 북쪽으로 옮겨가며 만들어졌으며 191기의 무덤과 토기·철기 등 12,00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1969년부터 2008년까지 8차례에 걸쳐 발굴된 복천동고분은 그동안 불투명했던 부산의 고대역사와 문화적 정체성을 밝히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가야의 우수한 철기문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복천동고분군에서는 굽다리 접시, 그릇받침, 목항아리 등 다양한 종류의 도질토기가 출토되었다. 도질토기는 1000℃이상의 고온에서 환원염 소성으로 만들어지며 흡수성이 거의 없는 토기이다. 4세기대의 토기들은 앞 시기의 후기 와질토기와 이때부터 새롭게 만들어지는 도질토기가 공존하는 특징을 나타내며, 이 때부터 삼국시대의 토기문화가 시작된다. 4세기 초에서 5세기 후반까지 만들어진 복천동고분군 토기류의 변천은 이를 잘 말해준다.
특히 신발모양토기.오리모양토기.말머리모양뿔잔 등의 이형토기는 뛰어난 조형미를 보여줄 뿐 아니라 당시의 의식과 죽은 자에 대한 영혼사상을 알 수 있게 한다. 동물모양 토기는 그 동물이 가지는 속성에 대한 숭배신앙과 결부되어 제작되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새가 죽은 자의 영혼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날라다 준다고 생각하여 오리모양토기를 만들었으며, 무덤 안에 새의 깃털을 넣는 풍습도 있었다고 한다.
삼국시대에 철은 농공구, 무기, 갑옷의 소재로써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외교류의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복천동고분군에서는 철기의 재료가 되는 덩이쇠가 단일 유적으로는 가장 많이 출토되었으며 철기 제작시 사용한 숫돌, 망치, 집게 등이 일부 분묘에서 출토되었다. 철기로는 칼, 화살촉, 쇠창 등 무기류, 집게, 손칼, 보습, 따비, 쇠스랑, 쇠낫, 쇠도끼 등 농공구류가 다수를 이룬다. 이외에도 철판의 양측을 잘라 미늘을 만든 미늘쇠, 끝부분을 둥글게 감아 만든 굽은 손칼 등 특이한 철기도 있는데 신분을 상징하거나 매장의례시 사용되었던 물건이다.
복천동고분군은 단일 고분군으로서는 갑옷과 투구가 가장 많이 나왔다. 갑옷은 전사가 가장 치명상을 입기 쉬운 가슴과 등을 보호하고, 한편으로는 그 본래의 용도를 벗어나 권력의 상징물로도 이용되었다. 갑옷에는 판갑과 찰갑이 있다. 판갑은 삼각형 또는 사각형 모양의 철판을 구부려 가죽끈이나 못으로 연결하여 만든 것이다. 찰갑은 작은 철판들을 가죽끈으로 연결하여 만든 것이다. 투구는 전사의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착용하는 것으로 복천동에서는 휘어진 긴 철판을 이어 만든 투구가 주로 제작되었다. 이외에 몸의 일부를 보호하기 위해 목가리개·어깨가리개·정강이가리개·팔가리개가 제작되었다.
복천동고분군에서는 2점의 금동관과 귀걸이·팔찌·유리옥으로 만든 목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이들은 미적인 장식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권력이나 신분의 상징물로써 애용되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복천동고분군에서 가장 많이 나온 장신구는 유리옥으로 만든 목걸이다. 유리옥은 중국의 영향으로 삼한시대부터 장신구의 재료로 널리 이용하다가,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그 제작기법이 더욱 발달하여 다양한 모양의 구슬을 만들었다. 금동관은 1호묘와 11호묘에서 출토되었는데, 그 중 1호묘에서 나온 금동관은 경주나 대구, 창녕 등지의 출토품과 비슷한 형태의 출자(出字)장식이 되어있다. 그리고 나뭇가지 장식이 특이한 11호묘 금동관은 한강이남지역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걸이는 금제와 금동제가 있으며, 대부분이 달개를 달지 않고 작은 고리만 있는 간단한 형태이다.
말갖춤새는 재갈, 발걸이, 안장과 고들개, 말의 장식에 쓰인 띠끝꾸미개, 말띠드리개, 말방울, 기꽂이, 말을 보호하는 말갑옷, 말머리 가리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복천동고분군에서는 이러한 말갖춤새들이 거의 종류별로 모두 나와서, 가야집단이 일찍부터 뛰어난 기마문화를 누리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복천동고분군에서 실용의 말갖춤새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서기 4세기대부터이다. 이 시기의 말갖춤새는 주로 재갈, 발걸이, 말띠드리개가 출토되었는데 무덤의 길이가 5m가 넘는 대형의 무덤에 부장되었다. 5세기에 접어들면서 말갖춤새는 안장, 장식을 위한 띠끝꾸미개, 말띠드리개, 말방울 등 다른 부속구도 많이 만들어진다.
제 2전시실 내에는 역사체험코너 및 영상코너 등을 설치하였다. 역사체험코너에는 고대 복식, 금동관, 갑옷, 투구 복제품을 마련하여 직접 착용하여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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