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순국공원이라기 보다 그저 관음포에 가고 싶었다.
간김에 이순신 순국공원에 포함된 이순신 영상관을 비롯하여 한번 둘러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하여 그저 관음포의 끝에 있는 첨망대와 이순신 영상관만을 둘러보고 올 수밖에 없었다.
관음포는 노량해전으로 더 잘 알려진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로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곳이다.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南海 觀音浦 李忠武公 遺蹟)은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유적지이다. 1973년 6월 1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32호 관음포이충무공전몰유허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선조 31년(1598) 조선과 명나라의 수군이 도망가는 왜적들을 무찌르다 관음포 앞바다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은 적의 탄환에 맞아 최후를 마쳤다. 이에 관음포 앞바다는 이순신이 순국한 바다라는 뜻에서 '이락파(李落波)'라고도 부르며, 마주보는 해안에는 이락사가 있다. 그 후 순조 32년(1832)에 왕명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단과 비, 비각을 세웠다. 1965년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뜻인 '대성운해(大星殞海)'와 '이락사'라는 액자를 경내에 걸었다.
이락사와 관음포 앞바다는 임진왜란의 명장 이순신의 공로와 충의가 담긴 역사의 옛터일 뿐 아니라 전쟁극복의 현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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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락사가 보이고 옆으로 돌아서 가면 첨망대 가는 길이 있다.
노량해전(露梁海戰)은 정유재란 당시 1598년 12월16일(선조31년) 이순신을 포함한 조명 연합수군이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운 전투이다.
일본군은 행주산성에서의 패배와 수군의 잇다른 패배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명나라에 휴전을 제의하고 자국으로 철군하였다가 휴전 협상 조건이 서로 맞지 않아 결렬, 1597년 15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에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순신을 삼도수군 통제사에 다시 임명하여 전세를 가다듬은 조선 수군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도독 유정과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의 참전으로 남부 해상권이 조명 연합군에게 다시 넘어가게 되자, 해상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당한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다 이듬해인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사망하고,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조선 주둔 일본군의 수뇌부는 난관에 빠지게 된다.
계속되는 패전으로 병사들의 사기는 계속 저하되어 가고 있었고, 조선 수군에게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한 채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으며, 결국 일본군은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자국으로의 철군을 결정하고 순천, 사천, 울산 등지로 집결하며 철수를 서둘렀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명나라의 병력과 함께 순천왜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를 공격한다. 이것이 순천 왜교성 전투이다. 6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큰 전과를 세운 조선 수군은 일단 고금도로 귀환한 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유키나가의 병력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사천 선진리성에 주둔 중이던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성에 주둔 중이던 다치나바 시게토라, 남해에 주둔 중이던 소 요시토시 등은 고니시 군을 구출하고 본국으로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그해 12월15일(음력 11월 18일) 수군 6만여 명과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했다.
그러나 시마즈 함대가 노량을 통과할 것을 예측한 이순신은 명 수군 도독 진린으로 하여금 남해도 서북쪽 죽도 뒷편에서 일본 수군의 퇴로를 차단해줄 것을 요청하고, 자신의 조선 수군은 일단 봉쇄망을 푼 후,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오후 10시경 남해도 서북단인 관음포에 매복시켰다.
이튿날인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새벽 4시경, 요시히로 등이 이끄는 일본 함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해 있던 조선 함선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순신 함대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니 적은 이순신을 포위하려 했고, 이후 순천왜성 포구를 나선 유키나가의 일본 수군과 진린의 명 수군이 합세하여 4시간여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같은 날 오전 8시경,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고 이미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고 150여 척이 파손돼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잔선 15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조명 연합함대는 오후 12시경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추격을 계속하였다. 도주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으며, 가리포첨사 이영남·낙안군수 방덕룡·초계군수 이언량 흥양현감 고득장 등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 역시 추격 도중 전사하였다. 이 때 도주하던 150여 척의 일본 함선 중 100여 척을 나포하니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
결국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 군은 노량해전의 혼란을 틈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하여 시마즈 군과 함께 일단 부산에 집결, 그 즉시 퇴각하였으며 노량 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이 막을 내리고, 7년간의 긴 전쟁도 끝이 났다. -출처 다음 위키백과-
이순신 장군의 시신이 처음 묻혔다는 이락사.
첨망대 가는길,,, 산책겸 걷기 딱 좋다.
첨망대에서 보이는 관음포 앞바다.
첨망대에서 보이는 관음포 앞바다.
첨망대에서 보이는 관음포 앞바다.
이락사 옆에 있는 이순신장군 영상관.
영상관으로 들어가는길. 이제는 이순신 순국공원의 이름으로 30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영상관에서 보이는 관음포 앞바다.
이순신 순국공원은 충무공의 순국을 테마로 한 차별화된 역사공원이다.
이충무공의 탁월한 리더십과 순국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이충무공의 순국지점인 남해 관음포만 일대에 조성되었다.
남해군에 따르면 국비 140억원과 도비 42억원, 군비 98억원 등 총사업비 280억원을 투입되었다.
이순신 순국공원은 고현면 차면리 산 125번지 일원 98,869㎡의 부지에 관음포광장과 호국광장 두 개의 역사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관음포광장에는 리더십체험관과 거북분수공원, 이순신 인물체험공원, 이순신 밥상체험관, 대장경공원, 정지공원, 쌈지공연장 등이, 호국광장에는 바다광장과 각서공원, 노량해전 전몰 조명연합수군 위령탑, 오토캠핑장, 하늘바다휴게소 등이 마련되어 있다.
이순신 순국공원 내 모든 전시물들은 자료의 신뢰성 확보를 위해 임진왜란 연구 전문가들로 역사고증위원회를 구성하여 엄격한 역사고증 작업을 거쳐 학생들의 현장체험 학습장으로도 활용될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 공원의 건전한 운영과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비용 충당을 위해 기본구상 시 계획했던 주차료를 공원입장료로 변경했다.
공원입장료는 어른기준 3,000원, 영상관 관람료는 3,000원이다. 단체, 군민, 미취학 어린이와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장애인 등은 감면과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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