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는 경남 통영과 남해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도시중의 하나이다. 그렇다고 도심을 지나는 것은 아니지만 서부 경남의 중심지임은 분명한 듯 하다.
진주성은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진주 사람들에겐 자긍심 높은 성지가 아닌가 싶다.
진주성의 가치와 역사는 분명 임진왜란이 그 중요한 획을 그었을 것이며 지금까지 그 역사적 가치를 지닌채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오늘은 이 진주성을 천천히 거닐며 이땅에 살았고 이땅에서 나라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싸우다 죽어가야 했을 사람들의 그 치열했던 삶을 기리고 싶어진다.
진주성에는 공북문과 진주문화원 앞에 공영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으나 나는 나불천 복개도로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호국사방향으로 성을 올라 걸었다. 물론 복개천 주차장이라 주차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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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앞을 흐르는 남강과 그 남강을 내려다 보고 있는 촉석루.
진주성은 본래 삼국시대 백제에 의해 건립되었다. 백제 때는 거열성지였으며, 본래 토성이었던 것을 1379년 고려 우왕 5년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해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고려 말 공민왕 때 7차례 중수되었고 주로 왜구를 방어하는 기지로 사용하였다.
1591년(선조 24년) 7월 경상도 관찰사 김수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해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은 3,800명의 군사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을 대파하여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룬 곳이며,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는 진주목사 서예원 및 7만여명의 민관군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절한 곳이다. 이때 전사한 최경회의 후처이던, 논개도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그 의개를 떨쳤다. 진주성내 촉석루근처에는 한때 경상우병영과 경상도 관찰사가 경상북도 관찰사와 경상남도 관찰사로 나뉘자 경상남도 관찰사부의 부청 소재지였다. 1604년(선조 37년) 마산합포(合浦)에 있던 경상우병영이 진주성으로 옮겨진 뒤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1895년(고종 32년)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가 설치되고 1896년(건양 원년) 8월 경상남도관찰사 감영으로 정식 개정되었다. 이후 1925년까지는 촉석루 앞에 경상남도의 도청이 있었다. 촉석루 누각은 한국전쟁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 진주고적 보존회에서 재건하였고, 앞면 5칸·옆면 4칸이다.
1960년 촉석루 복원을 시작으로 1972년촉석문을 복원하였고, 1975년에는 공북문 복원 공사를 마치고, 현재의 모습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출처 다음 위키백과-
도심에 있는 성곽이 대부분 그렇지만 진주성 또한 성곽을 따라 걷기에 참 좋다.
진주성 포루.
북장대.
북장대(北將臺)는 진주성 북문의 지휘장대이다. 1983년 7월2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진주성 북문의 지휘장대로 임진왜란 때 군 지휘소로 사용되었으며, 그 당시 소실된 것을 1618년 광해군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중건한 건물이다. 그 후 여러 번의 중수(重修)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고, 현재의 건물은 1964년에 중수한 것이다. 내성 북쪽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성내와 성외의 포진까지 살피며 지휘할 수 있었던 곳으로 편액은 진남루(鎭南樓)라고 되어 있다.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락집형 건물이다. 건물 위에는 좌측으로 인사동이 보이고, 정면으로는 비봉산이 보이며, 오른 편으로는 진주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경절사
영남포정사 왼쪽 옆에 조선의 개국공신 하륜이 태어난 곳이라는 작은 비석이 보이는데, 맞은 편 대각선으로는 진양하씨의 시조이자 고려 시대 충절의 상징이었던 하공진 공을 모신 경절사가 있다.
경절사는 고려시대 1010년 강조의 변을 대의명분으로 침입해온 거란의 제2차 침입때 협상단을 자처해 스스로 볼모가 됨으로써 연경에서 죽어간 충절의 화신 하공진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자, 하공진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영남포정사
조선시대 관찰사 감영의 정문이다. 도문화재 자료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조에는 망미루라고 불렀고, 처음 창건은 광해군 10년 병사 남이홍이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집무청인 관덕당 내동문으로 건립하였고, 그 후로 경상도 우병영의 관문으로 활용되었다.
1895년 고종 32년에 8도제를 폐기하고 전국을 28부제로 시행함에 따라 이곳에는 진주부가 설영되어 진주관찰부의 선화당 관문이 되었다. 다음 해인 1896년 건양 원년에 다시 전국을 13도로 개편하자 경상남도가 설영되어 경상도 관찰사의 선화당 관문이 되었고, 1925년 도청이 부산부로 옮겨 갈 때까지 그 문루로 영남포정사라고 이름하였다. 창원시의 용지공원에 있는 영남포정사는 이 건물을 본 따 지은 것이다.
오른쪽으로는 수령이하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비가 새겨져 있고, 왼쪽 편으로는 문충공 하륜 선생이 태어난 곳임을 알리는 비가 서 있다. 이 문을 바로 통과하면 오른쪽으로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을 살신성인으로 물리친 하공진 장군을 모신 경절사가 나타난다.
앞에서 설명한 영남포정사의 앞.
진주성 비석군, 진주성 일대의 비석들을 모아 놓았다.
비석군들 뒤로 북장대가 있다.
공북문.
관찰사감영과 경상 우병영이 소재했던 진주성의 주요 통로로 사용된 문이다. 공북문을 들어서면, 김시민 장군의 동상이 있고, 위쪽으로 영남포정사가 보인다.
김시민 장군상.
김시민 장군 전공비(좌)와 촉석 정충단비
촉석광장 안의 정충단에 서 있는 비로,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충절을 다한 이들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비는 거북받침과 비몸을 하나의 돌로 조각하였으며, 그 위로 머릿돌을 얹어 마무리하였는데, 머릿돌이 유난히 커서 전체가 사다리꼴로 보인다. 머릿돌은 두 마리의 용이 구름속에서 여의주를 놓고 서로 다투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고, 그 밑면에 꽃을 조각하여 이채롭게 장식하였다.
비문은 아래쪽이 닳아서 그 부분만 판독하기가 힘들 뿐 대체로 양호하며, 『조선금석총람』에 그 기록이 실려있다. 주로 진주성에서 싸우다 숨진 이들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그들의 뜻을 기리고 있으며, 특히 3장사(三壯士)라 일컫는 김천일, 황진, 최경회 등을 그 대표적인 인물들로 꼽고 있다. 이외에도 여러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정충단은 이들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숙종 12년(1686)에 마련한 제단으로, 비도 이때 함께 건립되었다. 비문은 이민서가 글을 짓고, 신익상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김만중이 썼다. 비의 옆에는 제1차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장군 전공비(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호)가 함께 서 있다.
드뎌 촉석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촉석루는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8호로 남강가 의암바위 위에 장엄하게 솟아 있는 영남 제일의 누각이다. 1241년고려 고종 28년에 부사 김충광에 의해 창건되어 8차례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처음에는 장원루라고 부르다가 조선 초기 기록에 촉석루로 명명되게 된다. 촉석루는 본래 전쟁이 일어나면 유사시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 또는 경상우도 군사들을 지휘하는 지휘본부로서 사용하였다. 또한 평상시에는 과거 시험 또는 향시를 치루는 고시장으로도 쓰였다.
임진왜란중에서는 상시 지휘본부로 사용되었고, 1593년 7월29일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서예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그 후 1618년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이 재건했다.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에 불탄 것을 1959년에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복원하였다. 촉석루의 뒷쪽으로는 논개의 넋을 기리는 의기사가 있고 아래로 의암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촉석루로 들어가는 문.
촉석루 아래 남강이 흐른다.
촉석루에서 남강으로 내려오는 문.
진주성 아래의 남강
의암.
의암이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투신자살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첩인 논개가 기녀를 가장하여 일본군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빠져 죽은 바위로 도기념물 제235호로 지정되어 있다. 1593년 계사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일본군은 촉석루에서 전승을 기념하여 잔치를 벌였는데, 논개는 촉석루 아래의 이 바위로 적장을 유인하여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죽었다.
정문부는 논개의 의기를 기려 추모비를 세웠지만 후에 훼손되어 사라졌다. 1629년 인조 7년 정문부의 둘째 아들 정대륭이 부친의 유언에 따라 진주에 정착을 해서 바위의 서쪽 벽면에 ‘義巖’(의암)이라고 새겼고, 남쪽에는 한몽삼이 쓴 것으로 전하는 ‘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의암에서 올려다 본 촉석루.
촉석루에서 보이는 남강과 진주성.
의기사.
의기사는 임진왜란 당시(1593년)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논개는 진주성이 함락되자 성민과 나라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왜장을 촉석루 아래 의암으로 유인한 후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의기사는 그 의로운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 16년(1740년)에 경상우 병사 남덕하(1688~1744년)가 창건한 이래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열회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중건한 것이다.
진주성내에 있는 우물터
진주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은 많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 임란 때의 논개의 순국,1862년 전국적인 농민항쟁의 시발점이 된 진주농민항쟁 등 큰 사건만 해도 부지기수이다.
진주성은 삼국시대 거열성(居列城), 고려시대 촉석성 (矗石城)으로 불렀던 것으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진주성으로 개칭되었다. 석축 된 성의 둘레가 약 1,760m(4,359척), 높이는 약 5~8m(15척)이며, 성 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3개 있고,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선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하륜(河崙)(1347~1416년)의 성문기(城門記)에 보면 성이 옛터만 남아 언제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는데,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고려 우왕 5년(1379년)에 진주목사 김중광에게 석축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 때 성의 둘레는 800보이고, 성의 높이는 세길을 넘으며 의정문(서쪽), 지제문(북쪽), 예화문 (남쪽)이 있고, 성 밖은 서쪽으로 청천(靑川)이 남쪽에는 긴강(남강)이 흘렀으며, 북쪽에는 못이 있는데 성과 못 사이에는 참호를 팠다고 했다.
이처럼 고려 말에 왜구방어의 보루로 고쳐 쌓은 이 성은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막는 관문이 되었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제1차 진주성싸움을 드는 것은 3,800여명의 군사로 10배에 가까운 왜적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이 성을 지킴으로써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1593년 제2차 진주성싸움에는 민.관.군 7만여명이 왜군 10만여명을 맞아 11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모두 순의하였고, 이 때 논개가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충절을 다한 곳이기도 하다. 성내는 촉석루, 김시민 전성각적비, 의기사, 서장대, 북장대, 창열사, 국립진주박물관, 호국사, 야외공연장 등이 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쌍충사적비는 1972년 2월1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임진왜란 의병장 제말의 기념비로 촉석루 뒤편 의기사 옆에 자리하고 있다. 1792년 정조 16년에 의병장으로 활약한 제말諸沫) 장군과 그 조카 제홍록(諸弘祿)의 공을 기리기 위해 쌍충각을 짓고 비를 세웠다. 일제 시대에 일본 관헌들에 의해 비각이 훼손되어 비가 방치되어 있다가 1961년에 지금의 의기사 옆 자리에 다시 세우게 되었다. 제말 장군은 칠원 제씨의 시조로 경상도 고성 사람으로 의병을 모아 김해, 웅천, 정암, 의령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서 공을 세워 곽재우 장군과 함께 공적이 조정에 장계되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임명되었지만 1592년 선조 25년 성주대첩에서 전사했다. 정조는 그 싸움을 《성주대첩》이라고 표현하였으며, 그 공이 이순신장군의 노량대첩에 비해 적지 않다는 평을 내렸다. 제말은 정조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그의 조카 제홍록도 숙부를 따라 의병활동을 한 이후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활동을 하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를 했으며, 정조는 선무공신에 추증하였고 같이 비를 세웠다. 촉석루 앞에 있는 의암사적비와는 떨어져 있다.
-출처 다음 위키백과-
촉석루.
공북문으로 통하는 길
진주성내에 국립진주박물관이 있다. 보는 바와 같이 무료이다.
서장대.
진주성 서문의 목조팔작 기와건물 지휘장대로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주성에는 서쪽과 북쪽 그리고 남쪽에 외침을 감시하고 지휘하기 위한 지휘장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서쪽의 서장대, 북쪽의 북장대, 남쪽의 남장대로는 촉석루가 있다. 남강을 따라 절벽 위에 쌓은 진주성의 서쪽 벼랑 끝에 지어져 있으며, 여지도서(與地圖書)에는 회룡루(回龍樓)로 명명되어 있고, 규모는 작지만, 남장대인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이었다고 전한다.
현재의 건물은 소실된 것을 1934년 독지가 서상필에 의해 중건되었고, 현판은 1979년 은초 정명수가 다시 글씨를 다시 썼다. 정면으로 3칸, 측면 2칸의 팔자형 팔작 지붕을 올린 목조기와집이다.
진주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진주교.
앞에서 설명되어진 서장대.
진주성의 정문 입구로 왼쪽 편 남강쪽으로는 시인 변영로의 논개 헌시가 있고, 입구를 통과하면 정면으로 바로 촉석루가 가장 먼저 보인다. 오른쪽 편으로는 호국의 종과 더불어 1592년 진주대첩의 승전과 1593년 전몰한 7만 민관군의 넋을 기리기 위한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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