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北漢山)은 서울시 강북구와 도봉구 은평구 성북구 종로구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양주시 의정부시의 경계에 있는 높이 835.6m(2013년 6월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산으로, 이름은 조선 후기시대때 한성의 북쪽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1억 7천만년전에 형성되었으며, 이곳은 최초 백제땅으로 지역명으로 한산, 산의 명칭으로 31년 이후 횡악(橫嶽)이라고 하였다. 고구려가 475년 백제로 부터 이곳을 정벌하여 지역명으로 '북한산주'라 칭하고 산명은 그대로 횡악으로 불렀다.
신라가 이곳을 정벌하고(553년)난 후 557년에 북한산주(北漢山州)라 칭하였다. 신라는 횡악을 부아악으로 고쳐부르고, 이곳 북한산주 부아악에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졌다. 백제 초기에는 횡악(橫嶽), 신라때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진 이후 부아악(負兒岳)이라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초기에는 부아산이라 불렀고, 고려 시대에는 993년 이후 때 부아봉(현 인수봉 810.5m), 중봉(현 백운대 835.6m), 국망봉(현 만경대 800.6m, 국토지리정보원) 세 봉우리가 모여 있어 삼각(三角)처럼 보여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려왔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고려시대에 측성한 중흥산성을 보수축하여 북한산성을 축성(1711년)한 이후 한성의 북쪽이라는 의미에서 북한산(北漢山)이란 산명을 별칭으로 사용해 오다가, 일제 강점기 이후로 점차 북한산(北漢山)이란 산명을 정식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1983년에 대한민국의 국립공원 북한산으로 지정 되었고, 2010년에는 북한산 둘레길 코스가 개방되었다.
높이 836m. 인수봉(仁壽峰, 810.5m)·노적봉(露積峰, 716m) 등과 함께 북한산의 고봉을 이룬다. 이 일대는 추가령지구대의 서남단에 해당되는 곳으로, 중생대 쥐라기(Jura紀) 말에 있었던 조산운동 때 열선(裂線)을 따라 화강암이 대상(帶狀)으로 분출한 대보화강암(大寶花崗岩)지역이다.
이 일대의 지형은 화강암의 풍화에 의하여 형성된 화강암돔(granite dome) 지형의 대표적인 것으로, 험한 암벽을 노출하고 있다. 화강암돔에는 인수봉과 같이 암탑상(巖塔狀)의 것도 있고, 백운대와 같이 거대한 암반으로 노출되기도 한다.
이 곳의 정상은 수백 명 가량의 사람이 앉아서 주변의 풍경을 즐길 수 있을 만큼 넓다. 서울 근교에 있어 도시민들의 휴식공간을 제공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등산을 돕기 위한 철사다리가 놓여 있으며 기암괴석, 맑은 계류, 푸른 수림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백운대에서의 조망은 일품이고, 백운사지(白雲寺址)를 비롯, 최근에 신축된 절과 암자가 많다.
산 아래쪽에는 백운수(白雲水, 일명 萬水)라 불리는 약수가 솟는다. 백운대에 오르는 길목은 여럿이 있다. 우이동에서 도선사를 지나는 약 8㎞ 코스와 창의문(彰義門)과 세검정에서 오르는 약 12㎞ 코스, 정릉에서 오르는 약 10㎞ 코스 등이 있으며, 그밖에도 계곡과 능선을 따라 여러 방면으로 오를 수 있다.
이번엔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하여 용암사입구 대서문 무량사 보리사를 지나 봉암문을 통과해 백운대에 오른다음 만경대 노적봉으로 해서 중성문을 지나서 하산 하였다. 시간은 다니면서 딴짓을 많이 해서 좀 걸리긴 했지만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 주차장에 주차를 할 경우엔 시간을 좀 아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곳은 국립공원 주차장 가운데 변산 내소사와 더불어 시간당 주차요금을 받는 몇군데 중에 하나이다. 오래 지체하다간 주차요금의 압박으로 인해 억수 속이 쓰릴수도 있다.
이 구간은 전에 북한산성을 탐방할때 몇번 지났던 길이지만 이번엔 백운대 구간만을 이야기하고 이 구간안에 있는 대서문과 중성문만 다룬다. 물론 북한산을 탐방하면서 북한산성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지만 북한산성 종주는 그 다양성과 많은 성문을 다뤄야 하기에 다음에 다시 이야기 할 것이다.
백운대에 오르려면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를 지나 제일 먼저 이 대서문을 통과해야 한다. 물론 북한산성 탐방을 위해서도 이 대서문을 지나 북한산에 들어갈 수 있다.
대서문(大西門)은 북한산성에 있는 성문이다. 조선시대단위로 높이 11척, 넓이 13척이며, 홍예문으로 만들었다.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그 중 대동문(현 대성문) 다음으로 규모가 큰 문이 대서문이다. 대서문은 의상봉과 수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성내부로 통하는 주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북한지’에 의하면 문은 홍예(虹蜺)로 만들어졌고, 초루가 설치되었다. 현재 성문의 육축부는 폭 19m, 높이 6m, 문지폭 7.9m이다. 타원형 홍예 출입구는 높이 4m, 폭 3.3m 이다. 홍예 양쪽에는 문루의 배수시설로 짐승의 얼굴을 형상화한 누혈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문의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비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육축은 3단의 기초석을 쌓아 평지를 조성한 후 8단을 석축하였으며, 그 위로 미석을 한줄로 놓고 여장을 설치하였다. 여장은 하나의 화강암을 깍아서 만들었으며, 그 가운데 20×30cm의 총안이 하나씩 뚫려있다. 육축부의 서쪽에는 성벽을 약간 밖으로 내어 쌓았다. 현재의 문루는 1950년대에 복원된 것이다.
대서문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왔다.
산을 오른다는게 늘 그렇지만 만만치는 않다. 특히 내같은 저질체력에는~
이런 이정표를 보면 내가 백운대를 가려는 것인지 아님 산성 탐방을 하려는 것인지 가끔 헷갈릴때가 있다. 사실 힘은 들었지만 산성(성문) 종주도 꽤나 유쾌하고 신나는 일이었다.
아무리 친해지려 해도 계단과는 쉽게 우정이 피어나질 않는다.
백운 봉암문까지 왔다. 하늘이 보인다는 것은 이제 거의 다 왔다는 것을 산에 몇번 다니다 보니 알게 되더라. 아닐때도 가끔 있지만~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의 크기는 높이 1.7m, 폭 1.9m(높이 6척 3촌(寸)) 가량이다.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든 비상출입구로 그 중 하나이다. 백운봉과 만경봉사이에 위치해있다. 일제시대 이후 위문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방형의 문으로 출입구는 높이 1.7m, 폭 1.9m 가량이다. 문 내부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비(門扉)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봉암문을 지나 바로 왼쪽으로 틀어 성벽을 따라 올라가면 백운대가 보인다.
봉암문의 바깥쪽이다.
산 가운데 사찰이 보이는데 노적사로 추정되긴 하는데 저길 가보질 않아 모르겠다.
철제 난간을 잡고 다시 계단을 타고 올라야 한다. 늘 그렇지만 이런 길은 조심해서 나쁠 것 없고 빨리간다고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니다.
앞머리에서 이야기 했지만 삼각산은 북한산의 다른 이름이다.
이 바위( 하도 커서 바위라 하기에 좀 민망하다)에 앉아 산을 제대로 즐기는 법을 배운 것 같다.
산 중간에 그어 놓은 금, 북한산성이다.
백운대 정상에 펄럭이는 태극기.
스타바위, 만경대, 뒤에 있는 것은 노적봉인지 용암봉인지 잘 모르겠다. 가보면 알겠지~
백운대 정상. 한쪽 귀퉁이에 아까 보았던 태극기가 살짝 보인다.
노적봉까지 왔다.
용암문 아까 보았던 봉암문과 비슷하다.
이런 성벽이나 성곽을 보면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따라가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애쓰곤 한다. 다음에 북한산성에 대해 다시 이야기 할 것이다.
산영루 산영루는 17C 전에 건축되어 몇 번의 중수를 거쳤으며 현재의 것은 1915년 대홍수 때 유실된 것을 2014년에 복원한 것이다.
앞에 대서문과 비슷해 보이지만 중성문이다.
중성문은 1712년 숙종이 북한산성에 행차하여 '서문 가장자리가 가장 낮으니 중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며 중성문을 쌓도록 명하여 축성되었으며 북한산성의 중성에 위치한 홍예문이다. 규모는 조선시대 단위로 높이가 11∼13척, 너비가 13∼14척이다.
아쉬움이 남아 다시한번 뒤돌아 보고~ 하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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