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은 북으로는 영암의 월출산을 그리고 해남과 장흥을 사이에 두고 있다.
그래서 강진은 완도와 해남, 장흥을 방문할때면 한번씩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옛날 여러 왕족과 양반들이 귀향을 갈때면 많이 거쳐야 하는 곳이고 이런 왕족과 양반들을 따라서 내려온 가솔들에 의해 강진의 한정식이 발달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몇번에 걸쳐서 한 기억이 있다.
茶山草堂은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위치한 문화재이며 사적 107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강진만과 바다건너 천관산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이름의 초당(草堂)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는 작은 초가집이었으나, 복원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현대의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집으로 중건하였다. 강진군에서는 다시 이를 초가집으로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이다.
정약용은 여유당(與猶堂), 다산(茶山)등의 여러 호를 가지고 있으며, 천주교 이름으로는 요한(Johan)이라 하였다.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정약용이 1801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여 동안 적거하면서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등 5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했다.
그리하여 이를 총정리한 『여유당전서』는 ‘철학’, ‘법제’, ‘종교’, ‘악경’, ‘의술’, ‘천문’,‘측량’, ‘건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장래에 도움이 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학술적 연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벼슬을 하던 양반이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으며 그가 겪어야했던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 그리고 그 힘겨움은 오늘날의 기준으로봐도 상상을 초월했을 정도로 힘겨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 힘겨운 시간이 아마도 정약용으로 하여금 방대한 책을 저술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도록 하였는지도 모른다.
다산 정약용은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업적은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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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山草堂
앞에 이야기했듯이 정약용이 처음부터 이곳에서 18년간 강진의 유배 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처음엔 강진 읍내의 주막인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에서 주모의 호의로 4년간 생활하였는데 정약용은 이 주막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야사로 이 주모의 딸이 정약용을 흠모한 끝에 정약용과 '통'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사의재는 2007년에 복원해서 문화관광 해설을 제공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다.
초당 뒤 언덕 암석에는 다산이 직접 깎은 ‘정석(丁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초당 왼쪽으로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앞 뜰에는 차를 달였다는 ‘청석’이 있고, 한 켠에는 ‘약천(藥泉)’이라는 약수터가 있어 당시 다산의 유배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다산초당 올라가는 길
이 계단을 모르긴 몰라도 정약용은 수없이 많이 오르 내렸을 것이다.
초당 가는 길에 만난 다람쥐가 반갑다.
얼마 오르지 않아 초당이 보인다.
제자들이 기거하였던 서암. 초당 바로 앞에 있다.
茶山草堂
유배에서 풀려 정약용이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폐허로 방치되어 있다가, 1958년 강진 지역민들의 주도로 집을 고치고 그 해에 사적 제107호로 지정받았다.
그러나 위에서도 이야기했듯 초당이란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초가 였던 것을 기와로 복원한 것은 잘못된 것이며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이런 기와에서 귀양살이를 했을 것이란 오해를 낳을 수도 있다. 귀양와서 기와에 살았던 양반이나 귀족은 거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송풍루라고도 하며 동암은 다산이 저술이 필요한 2천여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천일각에서 보이는 강진만, 위에 천일각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이곳에서 귀양살이의 시름을 달래고 가족을 그리워 했을 것이라 한다.
물론 정약용이 귀양살이 할때는 이 자리에 이런 정자는 없었고 다만 그 터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렇게 정자가 없는 곳에서 강진만을 바라 보았을 것이다. 앞에 죽도와 멀리 천관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천일각의 외관.
茶山草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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