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구곡은 화양동 계곡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으며 물이 맑고 공기가 좋아 여름 피서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화양구곡의 언저리에는 도명산, 낙영산, 가령산이 있다. 이 3개의 산은 모두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으며 오늘은 이 화양구곡으로 들어가 도명산과 낙영산 가령산을 지나 충북 자연학습원 방향으로 하산하여 다시 화양동 계곡을 따라 하산하는 코스를 잡았다.
도명산도 낙영산, 가령산등 이름이 낯설긴 하지만 화양동의 명성과 국립공원에 속해 있기에 믿고 탐방길에 올랐다.
화양구곡은 1975년에 속리산 국립공원에 포함되었으며 청주에서 동쪽으로 32km 지점에 있다. 조선 중기에 우암 송시열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화양동에 9곡(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을 이름지었다 한다. 화양동 계곡은 괴산 선유동 계곡과 7km거리에 있으며 푸른 산과 맑은 물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관광지이다.
아래를 클릭하면 함께 여행할 수 있답니다.
화양구곡에 있는 암서재.
조선 후기의 대학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선생이 정치를 그만 두고 은거할 때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화양구곡(華陽九曲) 제4곡 금사담(金沙潭) 물가의 큰 반석가에 있는 서재로,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인 송시열(宋時烈)이 정계에서 은퇴한 후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암서재(岩棲齋)는 대지 약 65m2 정도에 목조기와로 2칸은 방이고 1칸은 마루로 되어 있는데, 방 안에는 현판 5점이 걸려 있다. 앞에는 암반 사이에 일각문이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후손들이 수리하였고, 1970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암서재기(岩棲齋記)에 '우암선생어병오년간축정사어계남(尤庵先生於丙午年間築精舍於溪南)'이라고 씌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1666년(현종 7) 8월 암서재(岩棲齋)를 짓고 이곳에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암서재기(岩棲齋記)의 글씨는 문인 권상하(權尙夏)가 쓴 것이다. 화양구곡(華陽九曲) 곳곳에는 지금도 <비례부동(非禮不動)> 등 송시열(宋時烈)의 필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화양서원의 터도 이곳에 있다.
암서재(巖棲齋)는 1994년 1월 7일 충청북도의 유형 제175호로 지정되었다가, 1999년 12월 2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17호 ‘괴산 송시열 유적'에 포함됨에 따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고, 2014년 8월 28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110호 '괴산 화양구곡'에 포함됨에 따라 사적 '괴산 송시열 유적'의 보호구역에서 제외되었다.
화양구곡 정문 탐방안내소 주차를 하고 화양구곡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션하게 열려있다.
화양구곡의 2곡인 운영담이다. 경천에서 약 400m 북쪽의 계곡에 맑은 물이 모여 소를 이루고 있다.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하여 운영담이라고 한다.
화양구곡
* 화양 제1곡 경천벽(擎天壁)
기암이 가파르게 솟아 있어 그 형세가 자연의 신비라고나 할까 산이 길게 뻗히고 높이 솟은 것이 마치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하여 경천벽이라 한다. 이 바위에는 '華陽洞門(화양동문)'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 화양 제2곡 운영담(雲影潭)
경천에서 약 400m 북쪽의 계곡에 맑은 물이 모여 소를 이루고 있다.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하여 운영담이라고 한다.
* 화양 제3곡 읍궁암(泣弓巖)
운영담 남쪽에 희고 둥굴넓적한 바위가 있으니 우암 송시열이 제자였던 임금 효종이 죽자 매일 새벽마다 이 바위에 올라 엎드려 통곡하였다 하여 후일 사람들이 읍궁암이라 불렀다. 읍궁암 옆에는 친명 반청주의자였던 송시열이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을 해준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만동묘가 있다.
*화양 제4곡 금사담(金沙潭)
맑은 물 속에 보이는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하여 금사담이이라고 한다. 읍궁암 동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골짜기를 건너면 바로 금사담으로서 화양구곡의 중심이며 가족 단위의 물놀이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1666년 송시열이 바위 위에 암서재(巖棲齋)를 지어놓고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 화양 제5곡 첨성대(瞻星臺)
도명산 기슭에 층암이 얽혀 대를 이루었으니 제5곡이다. 경치도 좋을 뿐더러 우뚝 치솟은 높이가 수십 미터이고 그 아래 "비례부동"이란 의종의 어필이 새겨져 있으니 이름하여 첨성대라 했다. 또한 평평한 큰 바위가 첩첩이 겹치어 있고 그 위에서 성진을 관측할 수 있다하여 첨성대라 한다.
* 화양 제6곡 능운대(凌雲臺)
큰 바위가 시냇가에 우뚝 솟아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 듯하여 능운대라 한다.
* 화양 제7곡 와룡암(臥龍巖)
첨성대에서 동남쪽으로 1㎞ 지나면 이 바위가 있다. 궁석이 시내변에 옆으로 뻗혀 있어 전체 생감이 마치 용이 꿈틀 거리는 듯하고, 그 길이가 열길이나 되어 와룡암이다.
* 화양 제8곡 학소대(鶴巢臺)
와룡암 동쪽으로 조금지나면 학소대이다. 바위산 위에 낙낙장송이 오랜 성상의 옛일을 간직한채 여기저기서 있는데, 옛날에는 백학이 이곳에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 하여 이름을 학소대라 하였다.
* 화양 제9곡 파천(巴串)
개울 복판에 흰 바위가 펼쳐 있으니 티 없는 옥반과 같아서 산수경관을 찾아 이곳에 오는 관광객은 누구나 이 넓은 반석 위에 거치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학소대 북쪽으로 조금 지나면 이 반석이 오랜 풍상을 겪는 사이에 씻기고 갈리어 많은 세월을 새기고 있다.
우암 송시열 유적 안내.
송시열(宋時烈, 1607년12월30일(음력 11월12일) ~ 1689년 7월19일(음력 6월3일)은 조선의 문신·성리학자이다. 주자학의 대가이자 당색으로는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이언적, 이이, 이황, 김집, 박세채와 함께 인신(人臣)으로서 최고 영예인 문묘와 종묘 종사를 동시에 이룬 6현 중 하나다.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성뢰(聖賚), 성래(聖來),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교산노부(橋山老夫)·남간노수(南澗老叟)·화양동주(華陽洞主)·화양부자(華陽夫子),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의 왕자 시절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별칭은 대로(大老),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이다. 1633년(인조 10) 경릉참봉으로 출사하여 대군사부, 진선, 장령, 찬선, 세자사부, 이조판서, 의정부 좌의정, 우위정,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행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에 이르렀다.
예송논쟁 때 그는 주자가례에 의하여 효종이 인조의 차남이었으므로, 계모인 자의대비는 차남의 예에 따라 상복은 기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하였다가, 남인과 오래 시비가 붙게 되었다. 당초 1차 예송에서는 허목과 윤휴의 3년복설을 이견으로 받아들이다가 윤선도가 그의 본심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의도라 비난하고, 허목이 그의 사형을 주장하면서 남인과 적대하게 된다. 그는 윤선도와 함께 효종, 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이는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예송논쟁 당시 송준길, 김수항과 함께 서인의 영수였으며, 기사환국으로 덕원부, 거제도 등의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됐으나 숙종 때 장희빈의 아들 원자 균을 세자로 지정하는 문제를 반대하다가 숙종의 진노와 남인의 사주로 국문을 받으러 오던 중 전라북도 정읍에서 사사된다. 1756년(영조 32년) 증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그를 평소 존경하던 정조(正祖)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추숭되어 송자, 송부자(宋夫子)로 격상되고,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되었다.
서인 성리학파의 종주로 송시열 역시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여 이단하, 윤증, 민정중, 민유중, 김기하, 권상하 이여, 정호 등을 길러냈으나, 이 중 윤증과는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절교하였다. 윤선거, 윤선도, 윤휴등과 친구가 되어 교류하였으나 예송 논쟁 이후 모두 적대적 관계로 변한다. 노론의 정신적 지주로서 정조 때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스승인 송자로 격상되고 유고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간행된다.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로, 이는 1787년(정조 11년) 조선 정조가 《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이로써 송자는 동양 철학의 본류인 유학의 시조인 공자와 유학을 새롭게 해석한 주자를 계승하여 조선 유학을 집대성 했음은 물론 심오한 동양 철학의 체계를 최종적으로 정립한 역사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회 이상 등장한 조선이 배출한 최고의 대학자로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이 이를 극복하고 조선 고유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진경시대를 여는데 이론적 배경과 방향타를 제시한 주자학의 대가로 조선의 정치사상계를 통일하여 지배원리를 제공한 조선의 가장 영향력있는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송이창,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의 문인이다.
앞에서 이야기 한 암서재.
평탄한 산행은 아니다. 이 철재 난간은 그나마 좀 낫다. 좀 가다보면 밧줄이 널려 있다.
멀리 보이는 암서재.
계단도 많고 그 경사가 만만치 않다. 조심해야 한다.
이런 밧줄이 가다보면 아주 자주 나온다.
심심치 않는 산행이다. 이런 길도 있다.
참 난해한 계단이지만 이거라도 없었으면 우짤까 싶었다.
도명산 정상에 도착하였다. 오르는 길이 계단과 밧줄까지 좀 위험하긴 했어도 고도가 높지 않아 오를만 하다.
낙영산 정상 표지석.
낙영산에서 보이는 공림사.
다시 밧줄의 압박이 시작된다.
무영봉 정상인데 아직 가령산까진 갈길이 멀다.
가령산 정상 표지석.
낙영산까지의 거리가 산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꽤나 멀다.
산아래 충북 자연학습원이 보인다. 이곳으로 하산해서 화양동 계곡을 따라 돌아갈 것이다.
무영봉까지 합치면 하루에 산을 4개를 타고 넘었다. 다리도 아프고 힘은 좀 들었는데 돌아오는 길이 화양동 계곡을 따라 내려오니 한결 몸이 가벼운 듯 하다.
'산에 오르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비스런 봉우리 월악산 영봉 (0) | 2018.06.05 |
---|---|
설악산 울산바위 (1) | 2018.06.04 |
비단 장막속을 거니는 소백산 죽령코스 (2) | 2018.06.01 |
27년만에 열린 월출산 산성대 코스 (6) | 2018.05.25 |
자연의 속살 주왕산 절골계곡 (2) | 2018.0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