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 과학동산을 일부로 찾은 것은 아니다. 복천동 고분군과 복천 박물관을 관람하고 동래읍성으로 오르는 길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동래읍성 역사관을 보고 동래읍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어 따로 찾을 필요는 없다.
그동안 막연하게만 알았던 장영실과 그가 이루어낸 업적에 대해 살펴볼 좋은 기회이기도 했고 그 시대에 이런 과학적 지식과 결과물을 볼 수 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일부로라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주차는 물론 아래 복천 박물관에 하면 된다. 멀지 않다.
장영실이 만든 것을 비롯해 조선시대 천문기기 복원품 19점을 설치해 전시한다. 혼상과 석각 천상열차분야지도, 혼천의,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현주일구, 풍기대, 수표, 선화당, 관상감, 창덕궁 측우기 등 11종이 북두칠성 모양을 따라 배치됐다. 또 혼상 좌우에 동·서양 해시계 2종과 동래읍성 역사관에서 북문의 통행로 주변에 세종대왕 기념관 일구대, 평면 해시계, 신법지평일구 등 5종도 복원했다.
전시 복원품들은 전문가들에게 자문하고 현장조사를 거쳐 최대한 실물에 가깝게 제작됐으며, 동래구의 위도와 경도에 맞게 설치됐다. 이곳은 천문기기를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부산과학기술협의회 소속 과학문화해설사들이 있어 공원을 찾는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이들 기기의 원리와 의미에 대한 해설도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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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蔣英實, 1390년? ~ 1450년?)은 조선 전기의 관료이며 과학자, 기술자, 발명가이다. 경상남도 동래군 출생. 본관은 아산. 시조 장서의 9대손으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에선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는 원나라 유민으로 소주(蘇州, 쑤우저)·항주(杭州, 항저우) 출신이고,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 기생이었다. 장영실은 기술이 뛰어나 세종 임금이 필히 아끼었다고 설명한다.
생몰 연대는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아산 장씨 종친회의 주장에 따르면 대략 1385년경에서 1390년(우왕11년~공양왕 2년)경이다. 또한 장성휘는 시조 장서의 8세손으로 고려 말 전서(典書)였으며 어머니는 동래현 관기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어머니와 장영실은 조선 관노로 전락하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장영실의 영자는 종친회에서 주장하는 부친 장성휘의 성자 항렬의 다음 세대의 항렬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대로 단순히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의 자제라면 고대 중국식으로 외자로 이름을 짓고 자나 호를 짓거나, 아니면 평범한 이름으로 짓지, 당시의 아산 장씨 집안의 항렬에 맞게 짓고 족보에 올린다는 것은 유교적 정서에서 힘들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고 하며 사촌여동생이 당대의 천문학자 김담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장영실은 본래 동래현의 관노이나 발명가로서의 훌륭한 재주를 태종이 인정하여 발탁하였다. 세종은 실용주의로서 장영실의 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부왕의 뒤를 이어 중용하였다. 세종은 장영실을 1421년(세종 4년) 윤사웅(尹士雄), 최천구(崔天衢)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오도록 했다. 귀국 후 장영실 나이 약 34세 때인 1423년(세종 5년)에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면천되었고 다시 대신들의 의논을 거쳐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임명되었다. 1424년(세종6) 5월, 임금은 그를 정5품 행사직으로 승진시켰고 갱점지기(更点之器)를 만들라고 명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첫 물시계였다.
그 후, 세종의 명에 따라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이천(李蕆)의 책임하에 천문 기구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 수력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되는 물시계인 자격루(일명 보루각루, 1434년)와 옥루(일명 흠경각루, 1438년)를 만들어 세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이때 제작된 옥루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시간, 계절을 알 수 있고 천체의 시간,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장치로 흠경각(欽敬閣)을 새로 지어 그 안에 설치했다. 이때 만들어진 천문 기구에는 천문 관측을 위한 기본 기기인 대간의(大簡儀), 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방향을 가리키는 정남일구(定南日晷), 혜정교(惠政橋)와 종묘(宗廟) 앞에도 설치한 공중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규표(圭表) 등이 있다.
이러한 공으로 1433년(세종 15년)에는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하였다. 장영실은 대단한 업적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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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4년(세종 16년)에는 이천이 총책임자였던, 구리로 만든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하였다. 갑인자는 약 20여만 자에 달하며 하루에 40여 장을 찍을 수 있었다.
천문기구 제작이 끝난 후에도 장영실은 금속제련 전문가로 관료생활을 하다가 나이 약 53세였던 1442년 3월(세종24년), 세종이 온천욕을 위해 이천을 다녀오던 중 기술자로서 정3품 상호군(上護軍) 장영실이 책임을 지고 있던 세종대왕의 어가가 갑자기 부서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이를 장영실의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하고 의금부에서 책임을 물어 곤장 100대와 파직을 구형했으나, 임금이 2등을 감해 주었다고 한다. 사실 이 사건은 장영실의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 세종의 비대한 몸무게를 감안하지 않은 탓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위대한 과학자 장영실은 이후 역사에서 자취가 완전히 사라졌다.일설에는 삼사의 간언으로 사형당하였다는 설도 있다.
한편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 아산 장씨 시조인 장서의 묘 바로 아래에 장영실의 가묘가 있다.
장영실은 당시 세종대왕이 직접 재능이 뛰어나다고 극찬하였고, 수많은 기기를 제작하였다. 미천한 신분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종3품관 대호군(大護軍)에서 정3품관 상호군(上護軍) 이라는 관직까지 이르렀다. 장영실은 이순지와 이천등과 함께 조선 전기 당대의 훌륭한 최고의 과학자로 지금도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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