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쌓았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읍성이다.
삼한시대부터 동래에는 거칠산국, 내산국, 장산국, 독로국 등으로 불린 작은 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보이는 1021년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 처음이다. 조선시대에 동래부는 대일 외교상 중시되어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 정 3품의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이었다. 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진성과 함께 일본군의 1차 공격 목표가 되어 동래부사 송상현을 위시한 군·관·민의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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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후 부분 보수되었던 성을 1731년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그 규모를 훨씬 크게 고쳐 쌓았다.
이때의 성이 지금 흔적으로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의 둘레가 약 3.8km였다. 읍성에는 동·서·남·북문과 인생문 및 암문이 있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동문에는 지희루, 서문에는 심성루, 남문에는 무우루, 암문에는 은일루가 각각 있었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을 두었는데, 앞 쪽의 세병문과 뒤쪽의 주조문을 둔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시가지 정비계획 등으로 평지에 성은 철거되고, 산지에만 성곽 모습이 남았는데, 성내에 북문·인생문·동장대·서장대·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성벽도 부분적으로 복원·보수 중에 있다.
동래성 전투(東萊城戰鬪)는 1592년 5월25일(음력 4월 15일) 부산진 전투에 이어 일어난 임진왜란 두 번째 전투로 동래 부사 송상현이 2시간을 버티며 왜군을 끝까지 막아냈으나 결국 전사하고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동래 부사 송상현은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미리 대비하기 위해 동래성 주변에 나무를 최대한 많이 심어서 외부에서는 동래성을 관측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송상현 홀로 울산군수 이언성 등과 함께 전투를 치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새벽에 부산진성을 출발하여 오전 10시 동래성에 도착해 부대를 3개로 나누어 일대(一隊)는 황령산 기슭에, 다른 일대는 동래성 서편의 대로에, 마지막 일대는 취병장으로부터 남문을 향하도록 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무리한 전투를 피하기 위해 조선군과 협상을 위해 싸우겠다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는 패목을 세우게 했고, 송상현은 곧 거기에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회답하였다. 그리고 동래성 안에서는 백성들까지 수비에 가담하여 저항하여 한동안은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듯하였으나, 일본군은 성곽이 낮고 수비가 허술한 동문의 인생문(人生門)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방어선을 뚫는 데 성공하였다. 성이 뚫리고 동래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고 고향의 부모에게 보내는 시 한 수를 쓴 뒤 일본군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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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宋象賢, 1551년 2월12일(음력 1월8일)~ 1592년 5월25일(음력 4월15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이며 임진왜란 때의 장수이다. 임진왜란 초기 동래성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과 교전하다가 패전 살해되었다. 왜적은 그를 포로로 사로잡아 항복을 강요하였으나 항복하지 않자 처참하게 살해하였다.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한천(寒泉)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아버지는 평강, 용안 등에서 현감을 지낸 후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점에서 이미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고 있던 송복흥(宋復興)이고, 할아버지는 송전(宋琠)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송승은(宋承殷)이다. 부인은 성주이씨(星州李氏)로 기묘명현인 묵재 이문건(李文健)의 손녀다.
10여세에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면서 문장을 떨쳤고 사계 김장생과 우의를 맺었다.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입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6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보임되었으며, 다음해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 1579년 박사(博士)와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고, 다음해에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외직에 나가 유학을 진작시켰다. 1583년 사헌부지평으로 들어와 호조·예조·공조의 정랑(正郞), 공조좌랑과 군자감(軍資監)의 정(正) 등을 지냈다. 1584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시 지평이 되었다가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지평을 지내고 배천군수로 나갔다가 3년 만에 전직되어 경력(經歷), 집의, 사간과 사재감(司宰監), 군자감(軍資監)의 정(正)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년)에 집의(執義)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고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었다. 왜구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오는 가운데 임지에 도착하여 방비를 굳게 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5월 23일 (음력 4월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 다음날(음력 4월 14일)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이어 동래에 쳐들어온 왜병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 달라” 하자 이때 부사인 그는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했다.
송상현 부사는 군사를 이끌고 분전하였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갑옷 위에 관복을 입고 북쪽의 임금께 절을 올린 후 성문의 누각에 단정히 앉은채 왜병에게 피살되었다. 적장이 그의 충절에 탄복하여 송상현을 살해한 자기 부하를 잡아 죽이고, 일본장수인 소 요시토시 등이 그의 충렬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 지내 주었다 한다. 그의 첩인 금섬도 그를 따라 순절하였다.
그의 시신을 찾지 못했으므로 일각에서는 그가 정발과 함께 일본군에 투항하여 일본군장수가 되었다는 헛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그 후 조정에서 그 아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 주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동래성에 육박하자 항전했으나 함락되게 되자 조복(朝服)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은 채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의연함에 감동한 적장 중의 한 사람은 그가 죽은 뒤 시(詩)를 지어 제사지내 주었다. 사후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고,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에 제향되었다.
1595년 선조28년에 묘소를 청주로 이장하고 충신문을 세웠으며, 1610년 광해군 2년에 사당 동래부사 송상현 충렬사(東萊府使宋象賢忠烈祠)을 창건하였다.
1742년 영조 때 동래성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들을 추모하여, 송상현 장군이 순절한 정원루가 있던 곳에 송공단을 만들었으며, 매년 음력 4월 15일에 동래기영회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또한 동래 충렬사에서도 동래성 전투와 부산진성 전투 등 임진왜란에서 전사한 여러 사람들을 모시고 있다.
또, 황해도 개성 숭절사(崇節祠), 청주 상당구 용정동 신항서원(莘巷書院)과 흥덕구수의동 충렬사(忠烈祠), 전라북도 정읍 고부면 정충사(旌忠祠), 함경북도 경성(鏡城) 화곡서원(禾谷書院) 등에 제향되어 있다.
동래읍성 역사관은 동래의 역사, 풍경, 동래읍성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다양한 전시물을 마련해 놓았다. 특히 조선 후기 동래읍성의 축소 모형은 현재 상당 부분이 훼손되어 있는 동래읍성의 옛 모습을 짐작케 한다. 역사관의 가운데에는 동래읍성 모형도를 중심으로 동래와 동래읍성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또 벽면에는 동래읍성의 전투 이야기, 동래읍성의 장대(將臺)와 수구(水口)에 대한 설명, 동래읍성 성벽 구조와 문의 구조 등에 대한 설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역사관은 시민들에게 부산시 특히 동래 지역의 역사에 대한 배움의 장으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동래읍성 역사관에서 역사 해설 설명하시는 분들이 있다. 도움을 요청하면 이 그림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동래읍성과 동래성 전투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매우 친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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