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여행은 백제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은근한 매력이 있다. 서두르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거닐다 보면 먼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곤 한다.
그렇게 느긋하게 걷다보면 그 옛날 나당 연합군에 쫒겨 길을 잃고 헤메이던 백제인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가도 쓰러져 가는 나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던 백마강의 소리없는 눈물이 그 험한 세월을 빠져나와 여전히 처량하게 흐르는 듯 하다.
부여여행에서 오늘은 먼저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낙화암과 유람선을 타고 구르레 나루터로 돌아 구드래 조각공원, 관북리 유적에 이르는 코스이다.
그런다음 궁남지, 백제문화단지, 정림사지5층석탑 등을 둘러 볼 예정이다.
부여에서는 또 7월 6일부터 15일까지 “부여서동연꽃축제가 부여의 궁남지를 비롯하여 부여 시내 곳곳에서 열리는 모양이니 참고 하면 좋을 것이고 필요하면 축제 홈페이지를 찾아보면 참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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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을 유유히 운항하는 나룻배 유람선.
부소산성의 입구이다. 조금 걸어 들어가면 부소산성 정문이 나오고 매표소가 있다. 입구 앞에 넓직한 주차장이 있고 무료이다.
부소산성의 정문.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중(二重)의 성벽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비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여름에도 그늘이 많고 시원하여 걸을만 하다.
산성 내에 있는 삼충사의 정문이다.
삼충사.
부소산성 정문인 사비문을 지나 조금 걸어올라가면 삼충사가 있다. 외삼문과 내삼문을 지나 사당에 들어서면 백제말 삼충신인 성충, 흥수,계백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제때 제향을 올리고 세분의 숭고한 구국충절을 기린다.
부소산성이라 해서 성이 어딨나 찾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보이는 것이 산성의 흔적이다. 부소산성은 토성이다.
조금만 걸으면 금강이 내려다 보인다. 부여인들은 백마강이라고도 한다.
잘 보일려나 모르겠지만 강건너 백제문화단지가 어렴풋이 보인다.
부여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은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자리이다.
조선 순조 24년(1824)에 군수 심노승이 임천군 군사리에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이었던 배산루를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 짓고는 사비루라 이름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 앞면에는 조선 후기 의친왕 이강이 쓴 '사비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 쪽으로는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사비루는 사방이 트여있는 높은 곳에 있어 부여의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누각이다.
건물을 옮겨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를 때 '정지원'이라는 이름을 새긴 백제시대 금동 석가여래 입상이 발견되어 더욱 주목받는 장소이다.
백화정.
낙화암 절벽위에 세워진 육각지붕의 정자가 백화정이다.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는 백화정은 백제멸망 당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숭고한 백제 여인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부풍시사(扶風詩社)라는 시모임에서 세웠다.
백화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금강(백마강).
백마강의 유람선. 낙화암을 제대로 보려면 한번쯤 타볼만 하다.
낙화암 인근을 한바퀴 돌고 구드래나루까지 운행한다.
멀리 백제문화단지가 보인다.
백마강에는 일반 유람선과 나룻배 유람선 두종류가 있는데 나룻배 유람선은 승객이 30명 정도 되어야 운행한다.
백화정에서 내려가 유람선 선착장으로 가면서~
고란사.
고란사 바로 위쪽으로 낙화암이 있다. 절 뒤의 바위틈에는 고란정이 있고, 그 위쪽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자라고 있다.
절의 연혁에 대해서는 백제 말기에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의 내불전이었다고도 전한다. 혹은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에서 사라져간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법당 건물은 1797년(조선 정조 21년)에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이다.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정조 21년(1797년)에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연화문을 새긴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조각 장식이 화려한 익공식 공포를 짜올렸다. 초석에 새견 연화문양은 고려시대의 기법으로 추정된다.
사찰의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낙화암에 얽힌 전설과 더불어 험준하며 기이한 바위, 고란초 등으로 유명하다.
고란사에서 내려오면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아래 유람선 선착장, 그리고 가운데 일부지만 고란사와 위에 백화정의 지붕이 보인다.
낙화암.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죽은 장소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절벽에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낙화암(落花岩)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낙화암의 기암절벽은 백마강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때 더 잘 보인다.
구드래 나루터.
구드래 나루터와 낙화암.
구드래 나루터에 내리면 장원 막국수 집이 있다. 나름 유명하다고 해서 가봤는데 항상 이야기 하듯 음식이나 맛집은 개인적 호불호가 갈리곤 한다.
두드래 나루터에서 내리면 구드레 조각공원이 있다.
1985년도에 국민관광단지로 조성된 구드래에는 옛 백제인의 조각 기술을 이어받은 지역 출신 유명 조각가 작품 30점과 1999년도 국제현대조각 심포지움에 참가한 국내·외 유명 조각가의 작품 29점 등 총 59점의 조각 작품으로 옛 정취와 함께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함께 갖춘 공원을 조성하여 관광객에게 상시 개방,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이 곳은 부여 사람들의 휴식처이기도 하며, "백마강과 물새가 울고, 일엽편주 돛단배를 홀로 저어가는 사공"으로 시작하여 널리 알려진 '백마강 달밤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구드래란 무슨 말인가?
백제시대 왕을 부를 때 지배족은 어라하(於羅瑕), 백성은 건길지라 하였다. 구드래는 '구ㄷ으래' 로 '구(大)'가 왕칭어인 어라하에 접두하고 두말사이에 지격촉음인 'ㄷ'이 끼어들어 '구ㄷ어라하' 가 되고 다시 줄어들어 '구ㄷ으래(구드래)'로 변천한 것으 로 볼 수 있다. 또한 '구드래'는 '大王'의 의미로 일본서기(서기 720년 편찬)에 백제를 '구다라'로 부른 대목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 '구다라' 도 大王國이란 뜻으로 높여 부른 것이라 할 수 있다. -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
관북리 유적지. 구드래 조각공원에서 조금 더 오면 관북리 유적이 있다. 구르래 나루터에서 관북리 유적지 앞에 보이는 거리에 부여의 토속음식점을 비롯하여 나름 유명하다는 맛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지만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개인적으로 유명하다는 맛집은 피하길 권장한다. 이름값을 못한다.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725번지에 위치한 이 유적은 현재 왕궁지로 알려져 있으며, 국립부여 문화재연구소 남쪽일대 184필지 95,048㎡(28,780평) 중 33필지 2,102㎡는 1983년 9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43호 전백제왕궁지(傳百濟王宮址)로 지정되어 있다. 1982년부터 이 일대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여 1983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方形石築蓮池)가 발견되었고, 1988년 발굴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北舍)라는 명문이 발견되었으며, 1992년 조사에서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남쪽 50m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도로유적과 배수시설이 드러났다. 삼국시대의 궁궐 중 고구려의 안학궁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신라와 백제의 왕궁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백제시대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의 일부 유적이 밝혀진 것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정림사지 5층석탑과 궁남지, 백제문화단지를 차례로 둘러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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