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다니다 보면 어느 곳에서는 정말 혼자 보기 아깝다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 있다. 아마도 이 금성 산성이 그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이 찾았다가 그 다음에 또 가보고 싶은 곳으로 머리속에 아주 오래도록 기억되며 어느순간 특별한 곳으로 기억되는 그런 곳이며 해마다 가을이 오면 마음은 벌써 이 금성산성과 강천산을 찾아갈 준비로 분주하다.
금성산성은 산의 능선과 자연의 절벽을 활용 골짜기를 따라 축조된 포곡식 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모두 7.3㎞. 노적봉, 철마봉, 연대봉, 운대봉 등의 봉우리도 모두 성곽에 걸쳐 내성이 860m, 외성이 6천m이며 둘레는 7km에 달해 규모가 지방의 요새치고 방대하다.
내남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을 얹은 중층 누각이다. 정상에 오르면 담양읍을 비롯하여 금성산성으로 오르는 평야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체찰사 유성룡은 금성산을 두고 “정유(丁酉)왜란에 왜적이 전라도의 여러 성을 보고 모두들 그 허술함을 비웃다가 담양의 금성(金城)을 보고서는 말하기를, ‘만일 조선이 이 성만 고수했다면 우리 군대가 어떻게 함락시켰겠는가.’ 라고 강변했다.柳成龍所啓
앞에는 무등산과 추월산이 보이고 아래로는 담양호 등의 일대의 장쾌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조선 중기 문신. 남명 조식의 학맥을 이었으며 절개와 충절이 높은 선비로 평가 받고 있는 초계(草溪) 정온鄭蘊 1569 ~ 1641의 그리움과 함께.....
눈과 달이 밝음을 다투듯 / 한밤중에 들창에 비춰 드네
잠 못 이루며 님 그리는 마음 / 눈과 달보다 단연코 더하리
雪與月爭明 中宵透窓牖 耿耿戀君心 較居雪月右
우리 속담에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란 말이 있다. 이곳 보국문과 충용문이 위치한 금성산성은 괴암암과 조명이 잘 어울러진 포석 깔린 굴곡진 색다른 트레킹 코스이다.
조상들이 이 긴 맨손으로 성을 쌓다가, 혹은 성을 뚫거나 지키다가 죽어갔을 절망의 깊이를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는 이곳이 산행의 '다홍치마'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한번은 방문해도 후회하지 않을 장소임에는 틀림없다.
이곳은 대구 광주고속도로 담양IC에서 나와 순창 방향 24번 국도를 타고 금성면으로 간다. 면사무소 지나 좌회전 하면 담양댐 가는 101번 지방도에 금성산성 입구가 있다. 주차료 2,000원을 받는다.
아래를 클릭하면 함께 여행할 수 있답니다.
금성산성의 성벽과 조금 다른 느낌은 http://jail6039.tistory.com/155 강천산과 금성산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 내용은 http://www.hankukmail.com/newshome에서 발췌한 내용을 참고 하였습니다.
금성산성의 초도문. 제일 먼저 만나는 보국문(補國門) 지금의 군초소 같은 곳이 자리하고 있는.망루 밑의 금성산성의 정문이다.
이곳은 금성산성 입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약간은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조금은 숨이 차오르는 약 30~40분 정도의 등반을 하면 보국문(補國門)에 도착한다.
이곳을 오르면서 느낀것은 지금도 가파른 악산인데 당시에 성안에서 생활했던 군사들이 음식이나 생활에 따른 도구들을 어떻게 보급 하고 지냈을까 하는 우려가 앞섰다.
산 정상에는 깎아진 절벽들과 괴기한 형상의 바위들이 수목과 어울러 산수화폭을 만들어 내고 있다. 외남문 역시 자연 바위위에 자리하고 있다.
망루 밑의 성문을 지나면 너른 평지와 성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조금 더 오르면 내문으로 보국문을 보조하며 본격적인 성으로 진입하는 '충용문(忠勇門)' 현판이 달린 내남문은 최고의 금성산성 조망지로 보국문에서 발생하는 상황을 미리 알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한다.
보국문 뒤로는 동서로 길고 가파르게 성곽이 둘러져 있고, 성 밖은 이곳까지 어떻게 적들이 올라왔을까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가파르다. 이 일대는 보국문을 연결하는 성벽과 석벽이 우람하게 시야에 들어 온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성곽을 쌓아 난공불락의 요새를 이루고 있는 충용문과 보국문 사이 성곽을 무대로 외침의 방어 군진지였다 .또 성 주변에 노적봉(露積峯)과 금성사(金城寺)가 있고, 서문 밖에는 귀암사(龜巖寺)가 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적고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이런 대나무 숲을 지나 조금 오르면 된다.
동학 농민혁명 전적지. 이 금성산성이 단지 보는 산성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이고 이곳에 치열한 삶의 투쟁이 벌어졌던 곳임을 알려준다.
산길을 조금 오르면 보국문을 만나게 된다.
보국문에서 보이는 충용문, 왜 이곳에서 또다른 성문이 보일까하는 의문은 한걸음만 더 나가면 알 수 있다.
이 보국문은 하산길에 다시 만나게 된다.
금성산성의 성벽.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보국문위에 자리 잡은 충용문.
성벽의 구성만 봐도 왜 이곳을 최적의 요새라고 하는지 짐작이 간다.
내려다 보이는 담양호.
정상에 오르면 멀리 담양호가 그림처럼 나신을 드러낸다. 누군가 표현하 길 물은 어머니이자 그리운 여인이다 했다. 가슴이 탁 트이며 알 수 없는 희열이 몸속으로 흘러든다. 맑은 물줄기가 핏속으로 스며 들더니 급기야 잠들어 있던 세포가 깨어나게 한다. 자시만이 느끼는 희열이 잠시나마 일상의 번뇌를 잊게 한다. 그래서 산을 오른지도 모르겠다.
산성(山城)은 유희의 공간이 아니다. 정자에서 조선 중기의 문신(虛庵) 정희량(鄭希良 1469(예종 1)∼?)이 550여 년 전 어느 진영에서 옷깃을 굳건히 했다고 읊고 있다.
객창이라 유독히도 가는 세월 아깝나니 / 갈대꽃 쓸쓸하고 산에는 눈 가득하네 변방 밖엔 바람 거세 새매 깃은 굳건하고 / 진영 앞엔 구름 일어 피리 소리 차가웁네
客牕偏惜歲華殘 蘆荻蕭蕭雪滿山 塞外風高鷹翮健 陣前雲起角聲寒
당시에 이곳에서 머물렀던 이들은 달랐을 것이다. 대부분 타지의 사람들로 석양이 드리울 때는 고향을 그리는 향수로 괴롭고 외로웠다.
조선 명종대에 문과(文科)하고,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던 관국(灌國) 박계현의 성문에서 그리움의 시라도 들고 이런곳에서 나서 감상하면 한층 실감나는 여행이 되기도 한다.
백년 나라 계획을 두고 / 유월(六月) 달에 갑옷을 입었더라.
나라 위하여 몸이 먼저 죽으니/어버이 생각하며 혼만이 돌아가더라.
百年存社計 六月着戎衣 爲國身先死 思親魂獨歸
진중(陣中)의 외로운 등불 아래 갑옷은 차갑고 /사람 가는 길 이 밤 해는 이미 가는데.
이 하루에도 양수염이 흰 것을 더하노니/백년을 두고도 오직 한 가닥 나라위한 마음뿐일세.
孤燈旅舍鐵依寒 人道今宵歲已闌 一日能添雙鬢白 百年惟有寸心丹
산성에서 보이는 담양호.
보국문루에서 보이는 충용문.
성벽은 산 능선을 타고 흐른다.
보국문에 들어서서 돌아보이는 보국문
충용문으로 가면서 보이는 보국문.
충용문. 문의 형태만 봐도 요새로서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앞으로 가면서 많이 볼 것이다.
충용문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사진이 이래서 그렇지 실재는 정말 아름답고 감탄스럽다.
금성산성의 곡선미는 앞서 소개한 청주 상당산성 못지 않게 아름답다.
금성산성의 수난은 몽골군의 침입과 정유년 등의 왜란을 겪었다. 정유재란 때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던 수은(睡隱) 강항(姜沆:1567~1618)의 글을 모은 책 간양록(看羊錄) 적중 봉소(賊中封疏)편에는 "지금 호남과 영남의 성읍(城邑)이 모두 무너졌으니, 이 무너진 시기를 이용하여 담양부를 금성산성(金城山城)으로 옮겨 설치하고서, 근방의 두어 고을을 덜어다가 보태고, 그 근처 및 읍 밑의 이민(吏民)을 수합하여 성 안에서 살게 하소서.
옛날의 2묘(畝) 반(半)은 전(田)에 있고, 2묘 반은 읍에 있던 제도에 의하여 농사철에는 그 가솔을 성 안에 남겨두고 들 밖에 가서 경작(耕作)하며, 척장(滌場)을 하게 되면 가색(稼穡)을 들 밖에서 거두어 성중에 모아 보관하게 하고, 주장(主將)은 농사의 여가에 그 성황(城隍)을 수리하여, 적이 침입해 오면 그 사람과 그 성으로써 지키게 하소서. 성을 지키는 관(官)은 반드시 문무(文武)와 지략(智略)을 겸비하여 백성을 기르고 군중을 통솔하는 재간이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오래 맡겨 공효를 나타내게 하되, 그 채지(采地)를 허급해 주기를 변장의 예와 똑같이 하며, 혹은 감사(監司)나 병사(兵使)로 하여금 영(營)에 머물러 있으면서 진수(鎭守)하게 할 수 있도록 하소서."하며 그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치열한 싸움터가 되면서 성안의 모든 시설이 불에 타 1994년부터 성곽복원사업을 착수하여 약 7,000m가 넘는 성곽 보수를 비롯해 동헌 등 관아 시설, 대장청 등 군사 시설, 민속촌 등을 조성하여 금성산성을 호국안보 학습장으로 복원 후 많은 방문객들이 찾고 있다.
성벽을 따라 걸으면서 보이는 충용문.
보국문 위로 담양리조트와 들이 보인다.
충용문의 뒷모습.
이제 동문으로 해서 성을 한바퀴 돌 것이다.
금성산성의 북문이 보인다.
이 북문은 강천산에서 올라오면 만나게 되는 곳으로 강천산을 올릴때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금성산성의 북문으로 강천산에서 올라오면 이 문을 통해 산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금성산성에서 보이는 강천산 계곡으로 구장군폭포와 사진 위에 강천산 구름다리가 작게 보인다.
강천산계곡
성벽을 따라 걷는 길이 조망도 매우 아름답고 걷기에 좋다.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이렇게 정상 표지석이 있다.
사진위에 성벽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조망이 시원하고 아름답다.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 금성산성의 성벽
금성산 연대봉에서 보이는 강천산계곡.
이 높은 산위에 쌓아올린 성벽에서 그 흘린 땀이 보이는 듯 하다.
산 정상에 작게 허리를 숙인 사람이 있다.
금성산성에서 보이는 강천산계곡의 구장군폭포.
숲사이로 빼꼼하게 내비치는 성벽이 내게 아름답게 보인다.
금성산성의 동문터. 누각이 없다.
동문터. 이곳으로 사람들이 드나 들었을 것이다.
이곳이 동문터임을 알리는 안내문.
이런거 보면 가슴이 아프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것인지, 복원을 어설프게 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다시 충용문으로 돌아왔다.
올라올때 본 보국문과 약간 그 느낌이 다르다. 나만 그런가!~
충용문에서 보국문으로 내려가는 길
보국문에서 보이는 충용문.
전남지역에 지금 남아 있는 산성(山城)은 몇 곳이 안된다.
성(城) 출입문에는 대부분 누각이 자리하고 있다. 변방 또는 각지의 성터에도 누정이 많이 건립되었다. 주로 병사(兵舍)로 쓰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므로 그 성격은 특이하지만, 산수의 지형이 고려된 것이므로 그 위치의 경관은 일반 누정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전남지역에서 온전하게 복원된 곳은 완도 청해진 누각과 금성산성 누각이다.
그중에 담양군의 대표적인 산, 금성면과 전라북도 순창군의 경계를 이루는 금성산(603m)에 위치한 호남의 3대 산성(山城)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금성산성이 자리한다. 남문, 동문, 북문, 서문 성문 중 외남문(外南門)을 보국문(補國門 보국누각), 내남문(內南門)을 충용문(忠勇門 충용누각)을 합쳐 남문(南門)으로 부르는 곳이다. 높은 곳에 위치하여 평상시 그곳에 오르면 일반누정에서의 감회 보다 색다르게 느끼게 한다.
금성산성(金城山城)은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하였으며 조선 태종 때에 개축하였다(태종실록). 임진왜란 후 1610년(광해군 2)에 파괴된 성곽을 개수하고 내성을 구축하였으며 1622년(광해군 14)에 내성 안에 대장이 머무는 대장청(大將廳)을 건립하고 1653년(효종 4)에 성위에 낮게 쌓은 담인 성첩(城堞)을 중수하여 견고한 병영기지로 규모를 갖추었다.
규모를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9권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편에 "북쪽으로 20리이며, 옛날 돌로 쌓은 성이 있다. 선조(宣祖) 30년 개축하였고, 언덕을 연하여 성을 쌓았다. 효종(孝宗) 4년 중수(重修)하였는데, 내성의 둘레가 6백 10보이고, 외성의 둘레가 4천 9백 4보이며, 미성(尾城)이 72, 호지(壕池)가 5, 우물 29개가 동문과 남문 안팎에 있고, 내성 남문은 서북으로 두 문이요, 동ㆍ서ㆍ남의 세 문은 적의 침입을 받을 만한 곳이 된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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