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영암 월출산을 가기 위해서이다. 광주까지 고속도로로 간다음 다시 나주로 향한다.
그렇게 나주에서 하루를 묵고는 이른 아침 영암으로 떠나곤 했다.
그래서 나주에 머무른 시간이라야 잠자는 시간을 빼면 기껏 몇시간에 불과 했지만 그 시간안에 나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금성관을 비롯하여 복원된 성문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물론 그 유명하다는 나주 곰탕도 한그릇 하긴 했지만 혼밥하기에 딱 좋은 메뉴인 것은 분명했다.
맛에 대해선 사람마다 다르니 내 입에 맛있다고 다가 아니기에 달리 언급할 것은 없다.
나주의 역사가 꽤나 길다는 것은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느낄만큼 우리들 뇌리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듯 하다. 견훤은 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후백제를 세웠고 고려 태조 왕건은 나주 완사천에서 훗날의 장화왕후와 연을 맺었다. 나주는 고려 성종 때 나주목이 된 이래 천년 목사 고을로 불리는 고장이다. 전주와 나주의 지명을 한 자씩 따서 ‘전라도’라 이름 붙인 데서 알 수 있듯이 나주는 천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고장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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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성의 금성관내 중삼문.
나주 금성관(羅州 錦城館)은 전라남도 나주시에 있는 건축물이다.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제 제2호로 지정되었다.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한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망궐례)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나주 금성관은 조선 성종 6∼10년(1475∼1479) 사이에 나주목사 이유인이 세웠다. 일제시대에는 내부를 고쳐 청사로 사용했던 것을 1976년 원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5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며, 칸의 넓이와 높이가 커서 위엄이 느껴진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성관의 정문인 2층짜리 망화루도 함께 만들었으나 지금은 망화루의 현판과 내삼문만을 남산시민공원으로 옮겼다.
임진왜란(1592) 때의 의병장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던 곳이며,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때도 이곳에서 명성황후의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높이기도 하였다.
나주 금성관은 전남지방에 많지 않은 객사 중 하나로서 그 규모가 웅장하고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상을 대표할 만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금성관의 정문인 망화루.
나주 금성관 앞에 있는 나주 곰탕집.
남고문
나주읍성(羅州邑城)의 남문(南門)으로 나주시 남내동에 복원되어 있다. 1920년 경 일제에 의해 약간의 석축만 남고 완전 철거되었다. 이후 1993년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으며 그 후 추녀와 천장이 훼손되어 2005년에 보수하였다. 2층으로 된 문루(門樓)로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나주읍성에는 동쪽의 동점문, 서쪽 서성문, 남 남고문, 북의 북망문이 있는데 이중 남고문이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나주읍성은 대부분의 조선시대 읍성과 마찬가지로 평지와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한 평산성으로 배후에는 금성산성을 이루고 있다.
전체 성벽의 크기를 복원해 보면 둘레가 3.679m 면적은 974.390㎡이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이 훼철되어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성곽의 형태는 타원형이다. 현존하는 유구를 살펴보면, 먼저 서벽(西壁)의 경우는 교동일대에 남아 있는데 민가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중 교동 67번지 부근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성돌 크기는 길이 19m, 높이 90~240cmfh 성벽의 아랫부분을 1X1m 크기의 자연석을 겉면만 치석하여 ‘잔돌 끼움 방식’방식에 의해 쌓아 올렸다. 서문지에서 북벽까지는 잔존유구가 확인되지 않는다.
북벽(北壁)의 잔존유구는 산정동 1-5번지 부근에 길이 15m의 석축열 일단과 성북동 33번지 앞에서 나주 중앙초등학교 뒤편까지 약 50m에 걸쳐 성돌이 흩어져 있다. 동벽은 중앙동 천변(128-12번지) 부근에 석축의 일부가 확인된다. 남벽의 경우 현재로는 남아 있는 유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며 다만 남문지(남외동 2-20번지)는 사적지로 지정되어 남문(南顧門)을 1993년 12월, 동점문은 2006년 10월 복원하였다.
남고문의 안쪽.
서성문은 영금문(映錦門)이라고도 하며 2007년 발굴조사 결과 지하에 유적이 잘 남아있어 2011년 복원하였다.
문헌에는 주로 서성문으로 나타나지만 나무목여지승람(1815년)에 “동남북 삼면에는 편액이 없으며, 서문에만 영금문이라는 편액이 있다.”는 기록에 따라 역사를 기록하는 의미에서 영금문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동점문. 동점문은 1910년대에 훼철됐으며 지난 2004년 1월 6일 복원공사를 착공했다.
복원은 발굴조사자료, 문헌자료, 고증자료, 사진자료 및 타지역 성곽을 분석하여 기초설계를 했으며 중앙문화재위원의 자문을 거쳐 육축 및 옹성공사를 실시했다.
축성공사는 발굴조사에서 모습을 드러낸 초석과 각종 건축재의 성분을 분석하여 이와 유사한 건축재를 선택 사용했다.
축성공법으로는 조선시대 초기의 방식인 들여쌓기 (기울기 14%)와 난층쌓기 (층의 구분이 없이 쌓음)를 실시했다.
동점문의 안쪽.
옛나주역.
1913년 7월 1일 호남선 개통에 따라 신축된 건물로, 1929년 10월 30일 일본인 남학생과 조선인 남학생의 편싸움을 발단으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의 직접적인 빌미가 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저 시간표와 요금표가 낯설지 않다. 옛날 생각 참 많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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