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곡사는 잊고 있었다. 공산성의 매력이 푸욱 빠져 공산성은 수시로 드나들면서도 마곡사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걷기 위주의 내 여행 패턴에서 마곡사가 훨 벋어나 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겨우 찾아 본것이 한여름 땡뼡 아래 시간이 조금 남아 가볍게 걷기 좋겠다해서 찾아 갔는데 가끔이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만나게도 된다.
마곡사가 나름 이름있는 사찰이라는 근거는 일단 주차장이 크게 잘 조성되어 있다.
또한 마곡천을 끼고 걷게 되는 마곡사까지의 진입로는 그냥 아무말 없이 걸어도 좋을만큼 어색하지 않다.
사찰마다 집착에 가깝게 징수하는 입장료니 문화재 관람료니 뭐 다양한 방법으로 수입에 혈안이 되어 있긴 하지만 적어도 마곡사에서 지불하는 문화재 관람료는 액면 그대로 문화재 관람료라 여겨도 될만큼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긴하다.
근사한 화랑에 온듯 실록이 우거진 그늘 아래서 문화재를 관람하는 재미도 솔솔하니 입장료가 그닥 아깝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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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의 이름은 신라 보철화상이 설법 전도할 때 모인 신도가 삼밭의 삼대 같다고 하여 마곡사라 지은 것이라 한다. 절에서 내려오는 얘기로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2년)에 자장 율사가 창건하여 고려 보조국사가 재건하였다 하지만 그 처음 연원이 확인되지 않고 있고 전하는 연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선덕여왕 12년은 백제 멸망이전 백제 의자왕 2년에 해당한다.
만일 642년 창건이 사실이라면, 의자왕 2년으로 전해져야 하는데 적대관계의 신라 연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마곡사의 정문으로서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불교 세계를 들어가게 되며 해탈을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하여 해탈문이라 한다.
중앙통로 양편에 금강역사상과 보현, 문수 동자상을 모시고 있다. 고종1년(1864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마곡사 오층석탑(麻谷寺五層石塔)은 보물 제799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마곡사 대광보전 앞에 있는 고려후기의 석탑이며, 높이는 8.7m이다.
중층(重層) 4각형으로 되어 있다.2층 기단 위의 5층 탑신부에는 부처, 보살등을 조식하고 옥개석 네 모서리의 전각에는 풍경을 장식해 놓은 듯하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상륜부는 라마탑형식의 청동도금제로 되어 있으며, 한국에서는 유일한 것이다. 고려시대 석탑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다보탑이라고도 한다.
마곡사 대광보전(麻谷寺大光寶殿)은 보물 제802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마곡사에 있는 조선후기의 목조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된 다포계 양식의 단층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자연석 더미 기단 위에 세웠으며, 기둥에는 뚜렷한 배흘림이 보이고, 개구부는 앞면 5칸과 측면 앞칸에만 두었다. 1787년에 만들어졌으며,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기 위해 타고 온 어가가 보관되어 있다. 예전부터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세조가 매월당 김시습을 만나러 마곡사에 왔는데 김시습이 이미 떠나고 없자 ‘김시습이 나를 버리니 나도 가마를 타고 갈 수 없다’하면서 타고 왔던 연을 절에 두고 소를 타고 돌아갔다고 한다. 대광보전 마루에는 나무껍질로 만든 30평 정도의 돗자리가 있는데, 이 자리에도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조선 후기에 앉은뱅이가 마곡사에 찾아와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드렸다. 백일기도를 하는 틈틈이 이 돗자리를 짰는데 백일 뒤 기도를 마치고 나갈 때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법당문을 걸어 나갔다고 한다.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에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절 경내에는 응진전을 비롯하여 대웅전, 영산전, 대광보전, 홍성루 등 많은 건물이 남아 있다.
응진전은 철종 3년(1852)에 새로 보수한 것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짜올렸다.
안쪽에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公州 麻谷寺 大雄寶殿)은 마곡사에 있는 보물 제801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17세기 (조선중기)에 건립된 마곡사의 법당이다.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상층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1.5m 높이의 기단 위에 세운 중층(重層) 다포계(多包系)의 팔작건물로서 다른 건축양식에 비해 구조가 특이한 점이 특징이다.외부는 일부가 변형되었으나, 내부는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건물은 대광보전과 함께 마곡사의 본전이다.
원래의 건물은 임진왜란(1592년) 때 불타 없어졌고, 현재의 건물은 1651년(효종 2년)에 각순대사와 공주목사 이주연이 다시 지은 것이다. 외관상으로는 2층 건물 형태인 중층이나 내부는 하나의 공간이다. 중심에 석가여래불을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다. 건축양식은 조선시대에 유행하였던 다포식으로서 외관이 화려하면서도 장중한 감을 준다. 팔작지붕으로 된 네 모서리에 처마를 받쳐주기 위한 활주가 세워져 있다.
현존하는 전통 목조건축물 가운데 많지 않은 중층건물로 목조 건축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출처 다음 위키백과-
고방은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의 남향집이다.
마곡사는 충남지방의 모든 사찰을 통괄했던 큰 사찰로 신라 때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고려시대 보조국사가 재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조(재위 1455∼1468)가 이곳에 와서 '영산전'이라는 편액을 직접 써서 내렸고 잡역을 면제하는 교지를 내렸는데 모두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없어졌다. 효종 1년(1650)년부터 주지스님인 주순의 노력으로 절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데, 정조 6년(1782)년에 다시 큰 불이 일어나 대광보전을 비롯한 1,050칸이 모두 불에 탔다.
마곡사 심검당은 대광보전 5층 석탑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스님들의 거처인 요사채이다.
심검당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조 21년(1797)년에 보수공사가 이루어진 기록과 편액에 적힌 글에 의하면 철종 7년(1856)년에 고치고 1909년에 기와를 다시 올렸다고 한다. ㄷ자 평면에 자연석을 쌓아 1층의 기단을 형성하고 주춧돌을 놓은 위에 둥글고 네모난 기둥을 혼합하여 세웠다.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에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절 경내에는 국사당을 비롯하여 대웅전, 영산전, 대광보전, 홍성루 등 많은 건물이 남아 있다.
국사당은 절을 세운 이나, 훌륭한 스님들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승려들에게 국사(國師)라는 최고의 승려가 되기까지 많은 수행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 세운 것이다. 조사전·조사당·국사전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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